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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평화, 해방의 징조예수와 함께 시작되는 기대(이사야 7,10-17; 마태복음 1,18-25)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2.12.14 22:52
▲ 하나님의 징조는 정의와 평화 그리고 해방을 위한 것이다. ⓒGetty Image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자명하지는 않더라도 큰 틀에서 보면 대개 일치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보다 나은 세상, 죽음의 한계를 넘는 생명,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의미 등이 그 이유일 것입니다. 그 밖의 또 다른 무엇이 있든 모든 것을 통틀어 말하면 희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하나님은 희망의 근거입니다. 그 하나님이 무의미함과 덧없음에 절망하지 않고 그것들을 끌어안고 받아들이고 맞서게 하는 새로운 희망의 기반으로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로 그는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을 때 북이스라엘은 시리아와 결탁하여 남유다를 치고 왕권 교체를 계획했습니다. 이른바 에브라임-시리아 전쟁입니다. 유다와 아하스 왕이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아하스에게 보내 그들의 계획이 성사되지 않고 오히려 에브라임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안심시킵니다. 믿어야 한다고 했지만 그가 이를 받아들였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설득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가 믿을 수 있도록 징조를 구하면, 하나님은 그대로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과거에 기드온이 그랬고 후에는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유다를 구하시기 위해 사람에게 시험당하는 것을 허락하시겠다니, 그 뜻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정중한(?) 말로 하나님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는 없지만 왕하 15장과 대하 28장을 참조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있었고 그 이유는 일종의 종교적 열등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됩니다. 이사야의 권고를 물리친 아하스는 북으로 끌려간 포로들이 북이스라엘의 예언자 오뎃의 활동으로 돌아오게 되었음에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아하스가 하나님의 제안을 거부한 것에 대해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 작은 일이냐 그래서 하나님을 괴롭히냐고 묻습니다. 아하스만이 아니라 다윗 왕가 전체를 대상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왕정은 백성의 평안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종교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또 정치군사적으로도 왕들의 첫번째 관심사는 왕권강화였고 백성들은 그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왕정이 끝나고 대체로 공화정으로 바뀐지 오래 되었어도 권력과 국민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권력의 정상에서 백성을 섬긴다는 것은 이상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지배자들이 군림하면서도 마치 은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을 비판하시며 제자들에게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백성 위에 군림하고 백성을 괴롭히고 백성을 불안케 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자는 언제나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그렇게 합니다. 국민의 삶을 위한 법과 질서이지 법과 질서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월드컵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심판은 규칙을 가지고 경기가 물흐르듯 진행되게 하는 것이지 규칙을 위해 경기의 흐름을 깨뜨리거나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권력자의 착각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그가 무시하는 백성을 편드는 하나님도 무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하스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지만 이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을 상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섬긴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 백성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하스가 거부한 징조를 하나님이 직접 보여주실 것입니다. 아하스가 구했다면 아마도 다른 것이었겠지요. 그러나 징조를 구했다면 그 징조가 무엇이었든 징조를 구하는 목적은 바로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증하는 데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보여주시기 위해 앞으로 태어날 한 아기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지어주십니다. 이것이 어떻게 징조가 되는가는 바로 그 아기의 출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알마는 결혼 적령기의 여자 또는 젊은 여자를 뜻합니다. 어느 것으로 번역이 되든 중요한 것은 그 여인이 기적적인 방식으로 임신하게 되었고 그에게서 난 아기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탄생!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하스는 헤롯처럼 이 아기를 찾을까요?

그런데 그 아기의 출생은 하나님이 아하스에게 말씀하셨던 구원의 소식만이 아니라 심판의 소식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괴롭힌 탓입니다. 앗시리아의 개입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남과 북 모두에게 재난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무조건 심판의 배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때에만 우리는 임마누엘의 의미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했던 임마누엘은 새로운 모습으로 예수 사건에 다시 나옵니다. 임마누엘의 출생 과정을 상세하게 서술하는 듯한 예수의 출생도 징조인가요?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그렇습니다. 아하스 시대에 임마누엘이 태어났다면 예수의 출생과 비슷한 경로를 거쳤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약혼자나 신랑의 당혹감, 하나님의 개입, 이 사실의 수용, 출생의 순서가 되었을 법합니다. 임마누엘의 출생이 그 시대의 문제에 답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면 예수의 출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마태복음은 예수가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짤막하게 말합니다. ‘죄’란 무엇인가요? 누가복음은 이를 조금 더 풀어 말합니다.

“그(=하나님)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눅 1,77-78)

평화의 길은 그의 다음과 같은 사역을 통해 닦여질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19)

예수께서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다는 말의 의미를 우리는 이렇게 사람들을 억압하는 사회적 정치적 신체적 경제적 영적 조건들로부터의 해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오심이 하늘에는 영광이고 땅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에게 평화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자들에게 예수의 오심과 사역은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권력과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이 ‘죄’ 가운데 있는 세상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지배 아래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선언하러 오십니다. 예수의 오심은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는 징조이고 이미 그와 함께 그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임마누엘이 지시하는 내용입니다. 임마누엘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그 세상을 기대하며 현재를 살고, 현재를 그 기대에 맞춰 만들어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지금,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신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물질의 발전은 물질적 세계의 한계 때문에 우리를 자유롭게 정의롭게 평화롭게 사는 것을 보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할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정의와 자유와 평화의 길이 예수의 오심과 함께 놓여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예수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그와 함께 하며 그가 연 새세상을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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