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대는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길이다. ⓒGetty Image

약한 신학의 차연의 왕국과 민중신학의 민중의 나라

카푸토가 주장하는 ‘차연의 왕국’의 특징은 그것이 법 밖에 있는 자들, 쫓겨난 자들, 가난하고 약한 자들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카푸토는 신이 부르는 이들은 지혜롭지 못하고 힘도 없고 잘나지도 못한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왕국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신은 아웃사이더를 택했다. 힘과 부, 교육, 높은 수준의 문화와 고귀한 가문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택한 것이다. 왕국은 이들의 왕국이었다.(1)

하나님 나라는 맨 아래 위치한 왕국이다. 병든 자, 힘없는 자, 경멸 당하는 자, 세상의 눈에 아무 것도 아닌 자, 세상의 원칙에 의해 버림받은 자, 세리, 창녀의 왕국이다. 신은 이들의 특수성과 예외성 때문에 이들을 선택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다. 부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신의 이름으로 요청되는 사건은 권력과 특권의 법칙을 깨는 정의이다.(2)

신약성서에 나오는 왕국의 주인공들은 죄인, 잃은 양, 잃어버린 동전, 탕자, 세리, 창녀, 사마리아인, 문둥병자, 절름발이, 귀신들린 사람, 아이들이었다. 이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다면 동성애자, 불법 이민자들, 미혼모, 에이즈 환자, 약물 중독자, 죄수, 아랍인들이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왕국에 모여 있는 이들은 모두 배제되고 소외되었으며 사회의 바깥에 버려진 사람들이었다.(3)

이러한 왕국의 윤리는 차이 혹은 타자성과 관련된다. 카푸토에 따르면 전적 타자의 도래를 열망하면서 타자를 환대하는 것이 차연의 왕국에서의 통치 방법이다. 이때 전적 타자는 나와는 다른 낯선 것, 기대하지 않았고 예상치 못했던 것, 갑작스러운 도래로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다. 카푸토가 말하는 전적 타자는 전통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타자성’, 즉 초월성이나 절대전능성과는 다른 개념임을 유의해야 한다. 카푸토가 데리다의 개념을 빌려와 이해하는 전적 타자란 나와는 다른 모든 것 혹은 모든 이를 포괄한다.

차연의 왕국에서는 이러한 타자 개념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차연은 다름과 지연의 결합이다. 지연이 개념을 확정하거나 이론을 결정하고자 하는 시도를 계속해서 지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면, 따라서 계속해서 뒤로 물러남, 한없는 개방성, 불확실성을 의미한다면, 다름은 타자 혹은 타자성에 대한 강조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차연은 타자성에 근거한 복잡하고 상이한 체계로 구성된 이질적인 집합이고, 해체는 타자의 출현, 사건, 발명으로서의 전적 타자와의 연합이다. 다시 말해, 해체는 ‘차이’가 있는 존재들의 복잡한 관계를 의미한다.(4) 포스트모더니즘이 ‘차이의 철학’이라 불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민중신학의 시작도 타자의 발견을 그 계기로 했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노동자,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했지만 신문에 제대로 기사 한 줄 실리지 못했던 전태일을 발견함으로써 민중신학은 시작되었다. 민중신학도 하나님 나라는 곧 민중의 나라라고 단언한다.

민중신학에서는 예수가 민중이고, 민중이 예수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민중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기존의 권력 관계를 거꾸로 뒤집어놓은 새 세계, 다시 말해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새 나라”를 의미한다.(5) 차연의 왕국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주인이 되는 것처럼,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도 민중의 나라인 것이다.

약한 신학과 민중신학 모두 세상의 질서 밖으로 밀려난 자들의 차이를 존중함으로써 이 타자들을 왕국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특히 카푸토의 약한 신학이 약자를 수용하고 옹호하는 방식은 ‘환대’이다.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테드 제닝스(Theodore W. Jennings)에 따르면 데리다는 정의라는 개념을 법 밖에 있는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우리의 눈은 항상 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정의는 시야의 주변에서 어렴풋이 감지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정의는 해체 불가능한 것이라고 단언한다.(6) 법은 항상 무너질 수밖에 없지만, 정의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정의는 법에 상대성과 유연성을 요구한다.(7)

해체는 전적 타자로서의 가난한 이들이 갖는 특수성과 법의 보편성 사이의 간격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해체는 정의”이다.(8) 데리다는 법 밖에 있는 이들, 법으로 보호되고 지지받지 못하는 이들을 정의의 영역으로 인정하는 것이 환대라고 말한다. 이것은 경제적인 교환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무조건적인 것이어야 하고, 따라서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제닝스는 여기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타자로서의 타자에 대한 환대’라고 강조한다. 데리다는 타자, 이방인, 외국인을 통합하거나 동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타자성을 존중하며 환대하는 것을 강조하고 이것이 정의의 방식이라고 말한다.(9) 데리다가 말하는 이러한 환대가 약한 신학의 왕국에서의 윤리이다.

차연의 왕국은 강력하고 매우 중요한 질서나 긍정적이고 엄청난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 없는 자들의 권력, 약하고 강하지 않은 자들의 힘, 예외적이고 홀로 있는 자들의 세심함, 버려진 사람들, 외국인과 이민자에 의해 조직된다. 법이 아니라 은총, 은혜, 우연한 행운, 사건에 의해 지배되는 왕국이 차연의 왕국이다. 이것은 버려진 사람들, 아프고 천한 사람들, 초라하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의 무정부적인 왕국이다.(11)

환대, 약자를 위해 자리는 내어주는 것

카푸토는 또한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을 환대의 사례로 제시한다. 

위의 성서 본문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아무 것도 지니지 않은 채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다른 마을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환대와 함께 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것이라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카푸토는 이 환대가 하나님의 통치라고 강조한다. 왕국은 이 환대를 통해 여기, 지금을 통치하는 것이다.(12)

환대를 장소의 차원에서 접근한 연구도 있다. 인류학자인 김현경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장소를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한 장소를 승인하는 방식이 환대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환대는 사람으로서 갖는 인간의 권리이다.(13) 환대는 자리 없는 자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고 권리가 박탈된 자에게 권리를 회복시켜주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반대로 적대란 타인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다.

이어서 그는 데리다의 논의를 끌어와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환대를 언급한다. 데리다는 이러한 환대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김현경은 절대적 환대에 기초한 사회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4) 과거의 일에 대해 복수하지도 않으며 미래의 보답을 기대하지도 않는 환대가 새로운 사회의 윤리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은 카푸토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바로 ‘오늘’을 사는 것을 강조한 ‘일상주의’와도 연관된다.

카푸토는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과거에 있었던 일도 포기하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통치할 때에는 미래와 과거 모두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또한 과거에 대한 비난도 없다.(미주 15) 바로 이 점에서 복수가 아닌 용서는 타자를 환대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김민아 박사(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집행위원장)  minahkim@i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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