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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출 수 있는 사람화해를 위한 제물 예수(사무엘하 6.16-19; 요한1서 2,1-6)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2.12.29 14:39
▲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올 때 언약궤 앞에서 춤을 추는 다윗 ⓒGetty Image

하나님이 오랜 침묵을 깨고 이스라엘을 통해 역사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그 시간은 어둠의 시간으로 기억됩니다. 로마 지배 하의 세계는 힘에 의한 세계 평화와 부의 증대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불의였고 폭력이었습니다. 약자들을 양산하고 약자들을 짓밟고 약자들을 약탈하는 것이었습니다. 향락과 신음소리 가득한 불평등의 세계였습니다. 하늘만 바라보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일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오신 세상은 이런 세상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사정은 지금까지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세상이 스스로 재촉한 멸망의 위기 앞에서도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이같은 세상이 달라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특히 약자들을 짓밟고 우쭐대는 권력이나 그런 권력을 지지하는 세력이 들끓는 우리의 현재에  주님의 오심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주님의 오심은 낮아지심으로 권력의 실체를 드러내고 그 권력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오심에서 질서의 전복에 대한 희망을 보고 노래했습니다. 눌린 사람들이 일어나고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당당해지고 약한 자들이 평화를 누리는 새질서가 주님의 오심으로 수립될 것입니다. 그 희망을 발견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빕니다.

새질서는 주님의 오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된 사람들이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수립할 질서입니다. 화해는 용서를 전제하며 용서를 비는 행위가 용서 앞에 있습니다. 예수의 오심이 이를 가능케 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서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현실은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찬양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오심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다윗이 야훼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올 때의 일입니다. 본래 실로에 있던 궤가 실로를 떠나 여기에 오게 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궤는 잊혀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다시 기억하고 모셔온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신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재발견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그러니 궤를 옮겨오는 일이 얼마나 큰 일이었겠습니까? 온 이스라엘이 축제 분위기입니다. 다윗은 있는 힘을 다해 야훼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것은 그만큼 신명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 미갈에게는 이것이 천박한 행동으로 비쳐진 것 같습니다.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춤추는 것이 왕으로서의 체통을 잃는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이 스스로 낮아지는 일이라 해도 더 천하게 보일지라도 그렇게 하겠다 합니다. 야훼 앞에서 하는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이어서 다윗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우리는 이 순서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이 잊었던 궤를 기억하고 궤를 모셔온 것이 제사 앞에 있습니다. 제사는 야훼의 궤에 대한 기억과 행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사를 마친 다음 다윗은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선물로 나눠줍니다.

그런데 미갈은 이에서 제외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왕의 아내여서가 아니라 다윗과 함께 춤추지 않고 춤추는 그를 천하게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직접적인 예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축제에 누구나 참여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화목제의 위치는 분명합니다. 사람과 하나님의 화해가 먼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1서에서는 조금 모호하게 보입니다. 예수 자신이 화목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죄와 세상의 죄 때문에 곧 용서를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화목제물입니다. 특히 세상의 모든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라는 말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용서가 이미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누구나 용서받을 수 있음을 뜻합니다. 용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앞에서 말한 현실을 만들어내는 ‘힘’입니다. 탐욕의 노예가 되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그 결과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탐욕의 그물 속에 있는 우리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문제는 사람이 탐욕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이러한데 이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가 화목제물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드린 화목제와는 순서가 바뀌어져 있습니다. 화해 과정의 시작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화해가 이루어져서 화목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위해 화목제물이 먼저 드려졌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 공은 사람에게 넘어왔습니다.

이 사건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탐욕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도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자세히 알지는 못해도 몰랐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만큼의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깨달음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화목제사에 참여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참여의 결과는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 계명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바로 이 사랑이 탐욕을 다스리는 지렛대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커지면 커질 수록 우리에 대한 탐욕의 지배력은 작아집니다. 새피조물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계명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화해의 사건이 다른 사람에게서도 일어나도록 화해의 직분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저 불의한 현실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를 이러한 존재로 변화시키고 하나님 앞에서 춤추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축제를 벌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를 바꾸듯 세상을 사랑과 평화로 바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에 참여하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알리는 빛이 세상 구석구석을 비추며 사랑으로 채우기를 빕니다. 그 빛과 사랑을 나르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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