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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로 인해 바뀌는 오늘새세상이 열리는 날(창세기 1,1-5.31; 요한계시록 21,1-7)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3.01.05 01:37
▲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The Third Day of Creation」 (From Die Bibel in Bildern, 1852-1860) ⓒGetty Image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희망을 갖기 참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 희망의 근원이며 보증입니다. 그 희망을 우리는 창조와 새하늘과 새땅의 약속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우주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참으로 오랜 인간의 질문입니다. 현재 우주의 시작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들이 대표적입니다. 시작될 때 있었던 무엇인가가 분리되었다는 것과 폭발했다는 것입니다. 후자는 근래에 와서 확립된 자연과학의 견해이고, 전자는 성서의 입장입니다.

이것은 창조와 우연의 차이이고 신의 존재와 개입 인정 여부에 따라 생겨납니다. 성서의 창조 묘사가 모든 과정을 세세하게 다룰 수 없고 또 현존하는 세계의 해명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생물학이나 물리학 등의 자연과학이 현재 너머를 추적한 결과에 대해 교회와 신학이 왈가왈부할 이유는 없습니다. 종교나 신학의 이름으로 과학적 탐구를 왜곡 또는 폄훼해선 안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작에 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시작과 관련된 성서와 자연과학의 입장은 한 사건에 대한 두 가지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 안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는데, 빛이 이에 해당합니다. 빛도 이렇게 보면 파동이고 저렇게 보면 입자입니다. 이에 따라 빛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지지만 빛은 하나입니다. 이처럼 우주의 시작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는 보는 눈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서와 자연과학의 차이는 접근방법에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인가 인간의 이성인가입니다. 물론 전자를 말할 때에도 이성의 작용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창세기 1장은 창조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현재를 창조하시기 이전에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매우 강한 바람으로 이해되기도 하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영을 그대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한덩어리로 뭉쳐 있는 물, 땅, 어둠 위에 마치 알을 품듯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얼마동안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그것은 창조 이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영원 속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생명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창조는 영원의 한 순간에 빛이 생겨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어둠 뿐이었던 우주에 빛이 생겨났습니다. 빛이 어둠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 이전 세상이 모든 것이 뒤섞인 덩어리였던 것처럼, 빛과 어둠도 그랬던 것일까요?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고 양자의 관계를 설정하셨습니다. 시간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빛과 어둠이 서로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창조란 영원 속에 시간이 들어온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덩어리였던 그 무엇은 가능성입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분리 작업은 물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로써 공간이 만들어지고 위의 것은 하늘이라 명명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아래의 물과 땅을 분리시켜 육지와 바다를 만드십니다. 이처럼 시간 속에서 공간이 하늘과 땅과 바다의 형태로 차례 차례 형성되었습니다.

이제까지 가능성이기만 했던 땅의 생명 작용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현실화되었습니다. 땅위의 식물들과 동물들이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바뀌어가는 세상은 하나님에게 즐거움이었습니다. 창조의 기쁨입니다. 여기에 사람이 최종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다른 동식물과 달리 사람 창조에  땅은 행위자로 나타나지 않고 재료로 사용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만 강조됩니다. 흙으로 빚는다는 것은 2장에 가서야 비로소 언급됩다.

땅과 하나님의 형상, 보호받는 것과 ‘다스리는 것’의 차이가 이렇게 그려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란 인간의 특별한 지위에 대한 표현이며, 이로부터 인간의 자의식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중심주의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일차적으로 다른 생명체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형상 곧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를 봅니다. 형상은 말하자면 하나님과 다른 생명체들을 잇는 매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창조된 물고기, 새, 동물, 사람에게 서로 달리 복을 주십니다. 사람과 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물고기에게만 사람과 같은 복을 주십니다. 동물들에게는 복 주시는 말씀이 없습니다.

땅 위에 있는 것들에게 주어진 복의 차이는 각각이 차지하는 공간 점유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먹거리 구별에서 드러납니다. 식물은 크게 씨맺는 채소와 씨가진 열매 그리고 풀로 나눠집니다. 그리고 풀은 동물들의 먹거리로 할당되고 씨 있는 것들은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이러한 차이는 창조세계에 대한 세심한 배려의 산물입니다. 그것들은 곧 생명체들 사이에 평화를 수립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에게 이 평화의 조건 아래 평화의 세상을 보존하는 책임이 부여됩니다. 평화의 세상이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하나님은 이 평화의 세상 창조에 만족하시고 참 좋다 하십니다.

이렇게 모든 생명들의 존재가 긍정됩니다. 모든 생명들의 존재 이유가 여기 곧 하나님의 긍정에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불행하게도 그런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자연세계 지배는 보존이 아니라 파괴였고, 다른 생명들은 살륙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도 갈등과 대립과 전쟁이 지배적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창조목적을 거꾸로 이해하고 실현시킨 탓입니다.

그 결과 세상은 빛이 여전히 있음에도 어둠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세상의 불행이고 인간은 불행의 원인이고 다른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이 상황을 돌이키고 창조세계로 전환시킬 능력과 의지가 있는지요?

스스로 존재위기를 자초한 인간의 어리석음, 그 근원을 성서는 인간의 탐욕에서 찾습니다. 인간은 홍수로 멸망을 경험하고도 하나님과 그의 은총을 잊은채 또다시 멸망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큰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에게 계속 새세상의 꿈을 열어주십니다. 그 꿈을 우리는 이사야 2,ㅣ-4; 11,6-9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새세상의 전제는 정의와 공의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인간의 탐욕과 상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세상은 한낱 꿈일까요?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한에게 새하늘과 새땅의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눈물과 고통과 한숨 그리고 죽음마저 없는 그 세상에서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 가운데 살던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출애굽 이후 하나님의 역사가 목표로 하셨던(출 6,7-8) 그것이 최종적으로 완성됩니다.

이렇게 만물을 새롭게 하는 것은 평화의 창조 세상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끝이신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미래의 일임에도 그는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심으로써 이를 반드시 실현할 그의 강력한 뜻을 보여주십니다.

새하늘과 새땅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준거가 될 것입니다. 그 새세상은 우리를 통해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는 그의 생명샘의 물을 그러한 우리에게 거저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거저 라는 말은 이기는 자에게 해당되는 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기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는 새하늘과 새땅의 꿈을 품고 이 세상을 끝까지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그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고 고통을 안기고 상처를 주며 한숨짓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견뎌내고 새하늘과 새땅의 꿈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 새세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 세상을 상속하실 것입니다. 그에게 생명샘의 물을 거저 주실 것입니다.

이 꿈을 안고 새세상을 위해 일하는 올 한 해가 되기를 빕니다. 현실이 아무리 엄혹하고 실망스러울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뿌리는 우리의 새해를 만들어 갑시다. 주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와 연대하시고 우리를 그의 새세상으로 인도해가실 것입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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