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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 뒤로 숨는 자 누구인가하나님의 어린 양, 무고한 희생의 종결(요한복음 1:29~34)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01.10 21:50

주현절 첫 주일입니다. ‘주께서 나타나신 날’로서, 성탄절과 구별되는 주현절(主顯節, Epiphany)은 예수의 신성을 기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의 전통에 따라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경배한 날 또는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날을 그 기점으로 삼기도 합니다. 역사적 계기를 실증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고, 다만 그 뜻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선구자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반면 요한복음은 그 사실을 명시하지 않은 채 자신이 베푸는 물세례의 의미와 장차 예수께서 베푸실 성령세례의 의미를 구분하면서 그 세례를 베풀 예수를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예수께 머무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선포입니다.

그 부연 설명을 덧붙이기에 앞서 요한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예수를 보고 의미심장하게 선포합니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몫은 곧 어린 양의 몫과 동일시된다는 의미입니다.

‘어린 양’은 어떤 존재일까요? 매우 익숙한 표상으로서, 성서에서 관련된 내용을 찾자면 수없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어린 양(창세 22:8,13,14), 유월절의 어린 양(출애 12:3; 고전 5:7; 베전 1:19; 요한 19:36), 하나님의 종으로서 어린 양(이사 52:13~53:12), 그리고 최후의 심판자로서 어린 양(계시 5:6~14; 7:14; 12:11; 13:8) 등 여러 문맥에서 등장합니다.

가장 전형적인 경우를 든다면 속죄 제물로서 염소(레위 16:21~22)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광야로 내보내지는 염소, 이른바 ‘희생양’입니다. 제물로 드려지든 광야로 내보내지든 그 역할은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되는 것입니다. 그 희생양 덕분에 공동체는 죄를 씻고 평화를 누린다는 믿음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 특히 신약의 복음서와 서신서가 말하는 ‘어린 양’이 과연 고대의 종교적 개념으로서 ‘희생양’과 그대로 일치할까요?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 공동체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희생양을 찾는 것은 고대세계에서 일반화되어 있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그 현대적 의미를 떠올리면 오늘날 사법적 절차로 또는 더 교묘한 형태로 일상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 희생양 메커니즘은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공동체로부터 영원히 배제함으로써 공동체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을 뜻합니다. 죄 있는 자를 척결함으로써 무고한 이들이 평화를 누린다는 의식이요, 그에 따른 삶의 방식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는 폭력을 은폐하는 방식입니다. 고대세계에서는 이를 종교의례로 정당화했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고하고 안전하다는 허위의식에 갇혀 살아갔습니다. 오늘날에는 종교적 의례보다는 의식적인 생활방식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희생양’ 개념은 떨쳐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사회의 고질적 병폐입니다.

성서, 특히 복음서와 서신서가 말하는 ‘어린 양’이 그 끔직한 희생양의 개념을 과연 그대로 이어받고 있을까요? 앞서 말했듯 광야로 내보내지는 염소 이야기는 확실히 고대 종교적 관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끊임없이 그 희생양 의식에 반하는 내용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많은 신화들이 희생양의 추방을 정당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 때 희생양은 현대적 의미에서처럼 한 공동체가 제거해도 좋은 사람입니다. 성서는 끊임없이 그 부당성을 환기합니다. 고대의 신화들이 불가피한 희생을 정당화하고 공동체의 정당성과 안전을 역설하는 반면 성서는 가해자의 부당성과 그에 대비되는 희생자의 억울함을 강조함으로써 공동체의 갈등과 불편함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것은 종교적으로 은폐하거나 무마하지 말고,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삶의 방식을 바꾸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어린 양으로 그 제물을 대체했다는 이야기(창세 22장)는 인간 희생제물을 종식시킨 사건을 뜻합니다. 요셉 이야기는 형제들에게서 배제되었던 주인공, 곧 ‘희생양’이 거꾸로 화해를 이루고 공동체를 회복하는 진실을 전합니다(창세 37장 이하).

실제 희생‘양’으로 대체되어 속죄의식이 지속적으로 행해질 때, 예언자들은 제사보다는 정의를 강조했습니다. 희생제의를 통해 공동체의 불의를 감추어서는 안 되며, 삶 가운데서 정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요청이었습니다. 시편과 지혜서 특히 욥기는 가해자의 부당함과 희생자의 억울함을 절절하게 호소합니다. 그 희생자의 목소리는 하늘에 상달됩니다. 하나님께 전해집니다.

▲ Jan van Eyck, 「Ghent Altarpiece」 (1432) ⓒWikipedia

마침내 예언은 그 희생양의 무고함을 선포하고 그 무고한 희생양의 고난에 구원의 길이 있음을 선포합니다(이사 52~53장).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 세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느 누가, 그가 사람 사는 땅에서 격리된 것을 보고서, 그것이 바로 형벌을 받아야 할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느냐?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악한 사람과 함께 묻힐 무덤을 주었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들어가게 하였다.”(이사 53:7~9)

어린 양처럼 끌려가는 이의 고난을 보며 저마다 스스로의 허물을 돌아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고난을 겪고 끌려가는 것을 보며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과연 누구의 허물 때문에 그가 그렇게 고난을 겪는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 진실을 깨달을 때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이 바로 여기에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의 삶은 잃어버린 이들을 되찾는 것으로 일관합니다. 잃어버린 양 이야기(누가 15:1~5)는 그 단적인 예입니다. 예수께서는 누군가에게 죄를 전가함으로써 자신은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허위의식을 끊임없이 일깨우셨습니다.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을 두고 사람들이 흥분하여 돌로 내리치려고 할 때 예수께서는 외칩니다. “여러분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시오.”(누가 8:7) 희생양을 찾고자 하는 욕구가 솟구치는 순간 예수께서는 그 폭력의 충동을 저지합니다. 배제된 이들, 희생당한 이들을 회복하는 것이 예수께서 이루신 일관된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께서는 끝내 그 충동에 희생제물이 되고 맙니다. 무고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합니다. 모든 복음서는 누가 과연 유죄이고 누가 무죄인지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무고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이들이야말로 유죄입니다.

누가복음은 무고한 예수를 처형한 세상권력의 실체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바로 그 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누가 23:12) 유대와 로마의 권력이 한통속이었다는 것을 말하며, 그 권력이 지배하는 체제 가운데 동참하는 사람들이 모두 한 통속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이 유죄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그 진실을 만천하에 드러내었습니다.

복음서는 더욱 놀라운 진실을 선포합니다. 그렇게 희생당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언입니다. 공동체로부터 배제되고 상처 입은 그분이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복귀하였습니다. 희생양으로 안도하는 세계와는 달리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오히려 그렇게 희생양으로 배제되었던 이를 주님으로 모시는 새로운 공동체로 탄생하였습니다. 십자가형은 희생양 메커니즘과 같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구원의 도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누군가를 희생함으로써 스스로 깨끗해질 수 있다는 믿음의 세계가 비로소 끝났다는 데 있습니다. 더는 그와 같은 희생양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준 데 구원의 도로서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이,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압니다.”(로마 6:6)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당신을 십자가에 달아놓고 우리는 이제 안락하게 삽니다.’ 하고 안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놓고 안락한 삶을 누리는 인간의 삶의 방식이 끝나야 한다는 염원을 확인하는 것이며, 그런 삶의 방식을 끝내야 한다는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의미를 받아들일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주술적인 믿음이 아니라 진정한 삶으로서, 사랑의 실현으로서의 믿음이 됩니다. 그리스도교의 예배 가운데 희생제의에 해당하는 예식이 없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나의 죄를 누군가에게 전가시키거나 나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짐을 나누어지는 삶으로 구체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 상호간에 책임을 나눠 지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은 철저한 삶의 윤리로 구체화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깊이 숙고한 끝에 탄생한 복음서입니다. 요한복음은 본문말씀에서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유념하며,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자 동시에 성령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린 양’은 끊임없이 반복하여 희생제물이 되는 양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희생양의 종결로서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이것은 희생제의 또는 전통적인 대속론적 믿음 가운데 가려진 안일함을 넘어 삶의 진실을 직시하도록 만들고, 그 가운데 진정한 삶을 누리도록 이끕니다.

희생양 의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동참하고 있는 폭력적 삶의 방식을 은폐할 뿐만 아니라, 분노와 원한의 감정을 일으키는 대상을 향하여 저항하기보다는 그것을 전가할 대상을 찾아 분풀이하는 삶의 방식까지 함축합니다. 단지 사랑을 이루셨을 뿐 그 어떤 죄에도 연루되지 않았는데도 바로 그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다가 사람들 가운데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삶의 방식을 끝내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진실을 새기며 진정한 삶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 삶을 방해하는 사회적ㆍ정치적 세력을 극복하고 누구나 마땅한 삶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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