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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적 이미지와 새로운 신학적 이해설교와 이미지 (2)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 승인 2023.01.17 03:29
▲ 「Christ Pantocrator」 (c 1261, Byzantine mosaics of the Hagia Sophia in Constantinople) ⓒWikipedia

그리스도교 이미지의 등장과 논쟁

언제부터 그리스도교 안에 이미지들이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아마도 2세기 중반, 확실히 3세기 초반부터는 이미지들이 지하 교회들과 세례 장소들의 벽에 그려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이미지들은 상징적이거나 이야기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사역과 행동의 표식을 나타냈지만, 하느님 자체에 대한 표상들은 없었다.(1)

초기 그리스도교 아이콘(성상) 예술의 발전에 대하여 경고와 반대를 하거나 회화 미술의 위험을 지적한 교부들이 많이 있었다. 터툴리안(Tertullian), 시프리안(Cyprian), 이레나이우스(Irenaeu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유스틴(Justin), 오리겐(Origen) 등이 그들이고, 그들이 성상을 반대한 배경에는 미신과 우상숭배, 혼합주의의 실제적인 위험이 놓여있었다. 비록 카파도시아 교부 같은 몇몇 교부들은 이미지들의 가치와 그것들의 교육적 유용성을 옹호하였으나, 다른 이들은 아이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2)

306년에 열린 엘비라 공의회에서는 교회에서의 이미지 사용에 대한 저주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우리는 절하고 숭배해야 하는 것을 벽에 그리지는 않아야 하고, 교회에는 어떠한 그림들도 없어야 한다.”(3)

이미지에 대한 반대가 절정에 이른 것은 8세기와 9세기의 성상파괴 운동에서였다. 성상파괴운동은 비잔틴 황제들과 주교들의 지지를 받았다. 754년의 공의회에서는 “무지한 예술가들이 경제적 이익에 대한 불경한 욕망으로 인해 그려져서는 안 될 것을 그리고, 마음으로 믿어져야 할 것에 모양을 부여한다”고 책망했다.(4)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는 ‘보는 것’보다 ‘듣는 것’에 익숙한 종교다. ‘오직 성서로만’(sola scriptura)이라는 종교개혁의 주된 명제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교가 ‘택스트의 종교’가 된 것은 종교개혁 때문이라기보다는 오래된 경전종교인 유대교적 전통도 한몫 했다고 판단된다.

종교가 택스트, 특히 ‘언어적 택스트’에 기초했다는 것은 대체로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던 한 사회의 상류계급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이전의 기독교 문학작품들 대부분은 거의 배타적으로 문화적으로 특권층이고, 고등교육을 받은, 남성의, 특히 수도사들의 산물이다”는 마가렛 마일즈(Margaret Miles)의 지적은 정당하다.(5) 택스트가 주도적인 표현양식이 될 경우,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와 관계 맺는 양식이 비언어적인 사람들은 소외되기 마련이다. 그뿐만 아니라, ‘말씀’에 대한 강조에 기초한 종교개혁 전통이 ‘이미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정당화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마틴 루터는 아이콘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태도를 취한 반면, 칼슈타트(Karlstadt), 츠빙글리(Zwingli), 그리고 칼뱅(J. Calvin)은 아이콘을 거부했다. 이들 종교개혁자들의 반대 입장의 배경에는 하느님은 너무 높으신 분이어서 표상될 수 없다고 보는 인문적 계몽주의, 성서에 대한 충성심, 미신의 위험성과 말씀의 우월성 등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6)

이미지에 대한 개신교의 부정적 태도는 청교도적 영향을 받은 경건주의를 통해 더욱 강화되었고, 마침내 예술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로까지 발전되었다. 이들은 기껏해야 음악을 예술적 수단으로 인정했을 뿐, 주로 ‘말씀의 예술’에만 관심을 기울였다.(7) 경건주의적 배경에서 출발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선교현장에서 혼합주의에 대한 불안 때문에 현지 교회 안에 있는 토착적 예술정신과 결별했다.(8)

더욱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서구 선교사들이 ‘자신을 복음의 전달자로만 이해한 것이 아니라, 서구 문명의 선구자로 이해’했으며, 피선교지에서는 선교가 서구화, 곧 근대화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선교와 함께 ‘읽기와 쓰기’ 등 이른바 ‘근대성의 성과’가 함께 전달되었다.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바로 진보적이라는 것을 의미했고’, 그와 반대로 피선교지 전통과 예술은 원시적인 것으로 여겨졌다.(9)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이해

예술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앙을 가시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테오 순더마이어는 “하느님의 첫 번째 행위는 예술가처럼 세계를 창조하고, 혼돈을 제어하고 형상화하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인간은 예술을 통하여 ‘하느님의 창조에 동참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서구의 중세기는 “예술을 하느님에 대한 찬양의 표현으로 알았고, 그래서 교회는 예술가들을 독려했던 것이다.”(10)

순더마이어는 “예술을 통한 현존의 조명이 말씀을 통한 현존의 조명을 능가하기 때문에 설교자는 예술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예술은 언제나 “시대의 지진계이며 어느 정도 예언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교회사의 다양한 국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11)

특정 계층의 능력과 이해관계에 기초해 있는 택스트, 즉 언어보다 종교적 상징과 예술이 훨씬 더 보편성을 가진다. 이미지, 예술, 상징적 행동 등은 비언어적으로 의식의 또 다른 측면을 객관화시킨다. 이미지, 예술, 상징적 행동 등은 단지 언어적이고, 개념적인 사유의 번역이나 설명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유의 방식이다.(12) 다시 말해 “예술에서 우리는 단지 종교적 전통의 비언어적 표현들을 발견할 뿐 아니라, 또한 인간의 의식과 자유에 의해 수용되어지고 있는 계시, 즉 하느님의 자기-의사소통의 장소를 발견한다.”(13)

미주

(1) 리차드 빌라데서, 『신학적 미학: 상상력, 아름다움, 그리고 예술 속의 하나님』, 손호현 역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2001), 116.

(2) 리차드 빌라데서, 신학적 미학, 116 참고.

(3) 리차드 빌라데서, 신학적 미학, 117.

(4) 리차드 빌라데서, 신학적 미학, 117.

(5) 리차드 빌라데서, 신학적 미학, 51 재인용.

(6) 리차드 빌라데서, 신학적 미학, 118.

(7) 개신교 설교학은 음악을 유사정경적 위치에까지 끌어 올렸고,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제5복음서 기자로 추앙 받는다. 참고: 티스 군드라흐, “영상-신화-영화: 영화예배를 위한 한 시도”, 「신학사상」 제90집, 74 참고.

(8) 테오 순더마이어, “아프리카의 그리스도교, 교회, 조형미술”, in: 테오 순더마이어, 『선교신학의 유형과 과제』, 채수일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300-301.

(9) 테오 순더마이어, “아프리카의 그리스도교, 교회, 조형미술”, 같은 책, 301.

(10) 테오 순더마이어, “아프리카의 그리스도교, 교회, 조형미술”, 같은 책, 305.

(11) 테오 순더마이어, “아프리카의 그리스도교, 교회, 조형미술”, 같은 책, 307.

(12) 리차드 빌라데서, 신학적 미학, 51.

(13) 리차드 빌라데서, 신학적 미학, 55.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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