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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성경의 ‘기이한 일’이 아니다!(수 3:1-6 롬 7:21-25 막 3:7-12)주현절 셋째 주일/설주일(1월22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1.19 21:47

1.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오늘은 주현절 셋째주일이자 설주일입니다. 주일날이 설날이라, 이 시간 설날을 맞아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기신 분들이나 또 고향으로 돌아오신 분들의 오고 가는 모든 발걸음이 안전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이번 설 명절을 계기로 가족들이 모두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우리 사회도 조금 더 따뜻하고 서로 배려하며 존중하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화되는 그런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귀하고 복된 민족의 명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세 번째 토끼 이야기는 ‘토끼와 거북이’입니다. 아마도 제 기억에 초등학교 2학년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왔던 것 같은데, 내용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간단히 소개하자면,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합니다. 거북이는 꾸준히 성실히, 또 열심히 경주에 임합니다. 그러나 토끼는 잘난체하다가 그만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집니다. 토끼는 경기 도중에 낮잠도 잤죠? 따라서 바른생활 교과서는 토끼의 자만보다는 거북이의 성실함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소름이 돋았습니다. 지금도 이 이야기를 하면 소름이 돋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 토끼는 육지 동물인가요? 바다 동물인가요? 육지에 사는 동물이죠? 그럼 거북이는요? 수륙양용? 물론 거북이가 육지에 있을 수는 있으나 바다가 편합니다. 교과서에는 바다거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다 물속이 삶의 터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삶의 터전과 상황이 다른 두 동물을 어디서 경주를 시켰죠? 들판입니다. 땅입니다. 소름이 돋지 않습니까?

만약 토끼와 거북이를 저 광안리 바다 광안대교 수심 300m 바닷속 바위를 찍고 돌아오는 경주로 상황을 바꿔보세요. 기가 막힙니다. 토끼는 아무리 성실히 하고 또 꾸준히, 열심히 해도 오히려 열심히 한 그만큼 빨리 죽습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설정해 놓고, 교과서는 토끼와 거북이에게 “열심히 해라”, “자만하지 말라!”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예를 들어 설명해 볼까요? 나이 80되는 할머니와 20살 젊은 손자가 100m 달리기를 같은 조건에서 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은 경쟁의 조건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이렇게 시스템을 갖춰놓고 서로 경쟁하게 합니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모두 개인의 잘못이고 또 이겨도 개인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능력주의입니다. 이렇게 능력주의가 판치는 세상은 공정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능력주의에서 뒤처진 사람들을 위해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병으로 고생하는 많은 이들을 고치십니다. 이들은 왜 병에 걸렸을까? 저는 능력주의 세상의 패배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글픈 것은 이렇게 능력주의의 피해를 보아 병들고 지쳤는데도, 이들끼리도 또 능력주의가 판을 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로마서 말씀에서 인간성의 본질을 깊이 있게 꿰뚫습니다. 자기 지체 속에 두 가지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입니다.

결국 바울에 의하면, 우리는 죄의 법과 싸워 내 속에 하나님의 법이 우리의 마음과 육신을 좌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요단강을 건너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가는 것입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2.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몰려옴

▲ 예수께로 밀려드는 무리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막 3:7-10)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으로 고생하는 많은 이들을 고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치유 사역과 설교를 듣고 추종하는 군중들이 생겼습니다. 갈릴리는 물론 근처 지방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 나옵니다. 이들은 자신의 병을 고치고자 예수님께 몰려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에 중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치유 사역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팔레스타인의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은 날이 덥고 비가 많이 오지 않아서 먼지가 많은 지형입니다. 그러면 무슨 병이 생길까요? 눈병입니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 시력을 잃습니다. 요즘도 미세 먼지 걱정을 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먼지 때문에 눈병이 생깁니다. 따라서 성경에 눈먼 이가 많이 나옵니다. 또 물이 부족하니까 무슨 병이 생깁니까? 피부병이나 나병입니다. 날이 덥다고 했죠? 날이 더우면 일사병과 열사병에 걸립니다. 두통과 어지럼증, 구토와 경련이 일어납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것을 귀신 들린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질병은 모두 가난하고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병을 키우다 결국 불치의 병이 된 것입니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면 바로 물로 씻으면 됩니다. 그러나 물이 없어서 손으로 비비니 눈이 상하는 것입니다, 피부가 가렵고 부스럼이 생겨도 제대로 목욕 한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피부병을 달고 삽니다. 모두 가난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나요? 암이나 큰 병에 걸려도 돈이 없으면 병원에 갈 수 없어서 그냥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 가난 때문입니다. 경쟁사회의 시스템은 이렇게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이 병들어 죽게 놔둡니다.

이렇게 병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이 서로서로 예수님을 에워싸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서로 밉니다. 모두 자신의 병이 낫기를 바라고 예수님께 몰려들어 밀고 당기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피하고자 제자들에게 작은 배를 준비시킵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없는 사람이 더 강퍅하고 모질다는 생각이 듭니다. 능력주의와 경쟁사회에 찌들어 살아왔으면 서로 돕고 협력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어느새 그 사회에 길든 것입니다. “나 살고 너 죽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다못해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막 3:11)”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권능을 베풀어 나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막 3:12)”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본문 맥락에서 보면 몰려드는 무리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물론 윌리엄 브레데는 ‘메시아 비밀론’이라는 신학을 이야기합니다만). 따라서 이후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세우시고 그들로 하여금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주시어 파송합니다(막 3:13-19; 마 10:1-4; 눅 6:12-16). ‘메시아 비밀론’보다는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이들은 자신의 고통만 생각하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 상황은 다르지만, 10·29 참사로 고통받고 있는 유가족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리보전만 생각하는 행안부장관, 서울시장, 용산구청장, 서울경찰청장, 용산경찰서장 등 정부 고위층도 같은 맥락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토끼와 거북이처럼 경쟁해서 이겨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패자부활전이고 뭐고 없습니다. 그냥 드라마 <재벌 집 막내아들>처럼 인생 다시 한번 살아야 기회가 있을까 말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먼저 전하고, 귀신을 내쫓고 질병을 고치도록 제자들에게 부탁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었더니, 내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중요한 것은 병을 고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바로 깨달아야 만이 다시는 질병에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

3.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이것을 바울은 깊이 깨달았습니다. 바로 인간성의 본질입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두 가지 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1-23)

결국 바울에 의하면, 우리는 죄의 법과 싸워 내 속에 하나님의 법이 우리의 마음과 육신을 좌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질병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갈등에서도 주께서 우리에게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고백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ταλαίπωρος)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그렇습니다. 인생길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이렇게 곤고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본문에 ‘곤고한’이라는 뜻의 헬라어 단어 ‘탈라이포로스’는 전쟁에서 패한 포로가 적에게 끌려가서 고난과 수치를 당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죄의 속성 때문에 자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죄 가운데 쓰러져서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곤고한이라는 표현으로 쓴 것입니다.

이렇게 죄의 포로로 놓여 있을 때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각자도생과 약육강식, 능력주의가 판치는 세상에 진 사람은 좌절로 인해 곤고하고, 경쟁에서 이긴 사람 역시 그 승리가 큰 의미가 없음에 곤고한 시대입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법, 곧 생명의 법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의 법을 언약궤를 앞세워 진군하였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을 지나고 이제 모세를 이은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들어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했던 방법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4.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 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수 3:1-4)

이스라엘 백성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언약궤를 뒤따릅니다. 여기서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는 말은 하나님의 명령을 속히 수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먼저, 나의 일은 나중에!”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요? “내 일이 먼저, 하나님 말씀은 나중에”가 아닌가요? 그렇게 되면 반드시 죄의 법으로 말미암아 내 일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뭐시 중헌디?”, 중요한 것이 뭔지를 먼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성결하라!”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 언약궤를 뒤따르는 백성들과 언약궤 안에 있는 십계명 돌판, 싹 난 지팡이, 만나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수 3:5).” 여기서 기이한 일은 ‘놀라운 일(새번역)’, ‘큰 기적(현대인의 성경)’을 뜻합니다. 이것은 토끼와 거북이를 땅에서 경쟁시키는 기이한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정말 기이한 일, 큰 기적입니다. 바로 요단강이 갈라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성결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수 3:6).” 언약궤 안에는 무엇이 있나요?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 돌판’과 죽은 나무이지만 다시 싹이 난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 항아리가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언약궤를 뒤따른다는 말은 늘 생명을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순종하고 성결하며 부지런하여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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