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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네 행복을 위해(신명기 10,12-22; 마태복음 5,1-12)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3.02.02 15:43
▲ JESUS MAFA. The Sermon on the Mount, from Art in the Christian Tradition, a project of the Vanderbilt Divinity Library, Nashville, Tenn.

신명기 본문에 눈에 띄는 말이 있습니다. ‘네 행복을 위해’입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 행복하다고 말합니까? 목표가 달성되거나 소원이 성취되면 그럴까요? 분명 그럴 수 있습니다. 부가 쌓이면 쌓이는 부를 보고 그럴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일등을 하거나 명성을 얻으면 그럴까요?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권력을 잡으면 그럴까요? 권력자가 권력 놀이 하는 것을 보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너에게 인정을 받으면 그럴까요?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처음 것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의 이면에는 그러한 것들을 통해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인정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들 가운데 하나로서 삶의 동력이 되고 그 실현은 삶을 의미있게 만들고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의 본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 성서를 번역한 사람들이 이 본문의 ‘לְט֖וֹב לָֽךְ(르-토브 라-크)’를 ‘너의 선(善)이나 복을 위해’로 옮길 수도 있었을 텐데  ‘네 행복을 위해’로 옲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토브는 촣다 또는 좋음을 기본 뜻으로 합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말로 바꾸면 ‘너 좋으라고’ 또는 ‘너 잘 되라고’ 하는 정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을 개념으로 바꾸면 네 행복을 위해가 가장 적절해보입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려고 하는 까닭은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된 세상을 보고 하신 말씀이 ‘טוֹב(토브)’ 곧 ‘좋다’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그 세상을 보고 행복해 하셨다고 바꿔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위의 말을 빌어 말하면 세상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에게 자신의 좋은/아름다운 모습을 보임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활동을 인정받으신 하나님은 그 세상을 보시고 참 좋다고 응답하시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그렇게 행복하게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세상은 사람들 때문에 그 모습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에서 새일을 계획하셨습니다. 종살이 하며 신음하는 이스라엘을 새세상의 출발점으로 삼으시려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신음하는 세상과 이스라엘, 참으로 닮았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의 신음을 멈추게 하고 그 자리에 행복이 자리잡게 하시려고 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그리 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 방식은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행복에 이르는 것은 자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보고 좋다 하신 것은 하나님과 그가 창조하신 세상이 상호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해방된 이스라엘에게 자신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의 길을 가는 것,
그를 사랑하는 것,
그를 섬기는 것,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목표이자 결과가 행복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태도의 서로 다른 측면들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길을 가지 않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의 길을 가는 것은 여러가지로 이해될 수 있으나 악을 미워하고 따라 가지 않는 것이 일종의 마지노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다른 신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그와 같은 같은 태도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로 표출됩니다. 공정하고 자비로운 삶입니다. 공정하지 못하고 무자비한 세상에서 희생당하는 당하는 자들은 약자들입니다. 이주민/난민을 사랑하라고 꼬집어서 말씀하시는 것은 특별히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이집트에서 이주민/난민이었고 더나아가 억압을 당하는 약자로 살았습니다. 이를 기억하고 그들을 돕는 것이 그들을 기억하고 구출해낸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섬기는 삶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작은 자/약자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렇게 살 때 행복에 이를 것입니다.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입니다. 약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지 않도록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길입니다.

행복은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나눔과 배려에 있고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에 있고 무시와 혐오가 아니라 인정에 있고 차별이 아니라 평등에 있고 적대가 아니라 공생과 상생에 있고 갈등과 불의가 아니라 정의와 평화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행복의 조건이 의미하는 것들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은 이 행복의 조건을 조금더 구체적으로 풀어놓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온유한 자, 정의에 주린 자, 불쌍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평화를 일구는 자, 정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입니다. 이것은 몇 개의 그룹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
온유한 자, 불쌍히 여기는 자,
슬퍼하는 자, 정의를 갈구하는 자,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

이들은 크게는 다시 두 그룹으로 나누어집니다. 앞의 네 사람과 나머지 네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불쌍한 마음에 의해 통합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빈마음의 사람이기에 마음이 깨끗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기에 불쌍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정의가 없어 슬퍼하고 정의를 갈구합니다. 그 현실을 아파하고 불쌍한 마음이 되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행복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일하시며 우리를 그의 행복으로 초대하십니다. 행복의 초대장이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와 같은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처럼 불쌍한 마음으로 일할 때 정의와 평화의 행복과 땅을 차지하는 변혁이 우리를 맞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갈 것입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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