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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금지“순종하는 성도의 복”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3.02.06 15:09
▲ William Unger, 「The Parable of the Talents」 (1874) ⓒIndianapolis Museum of Art (http://collection.imamuseum.org)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매일의 삶에서 평안을 선택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월 주일 설교 중에 전도서 본문으로 ‘복’에 관한, 성도님들이 어떻게 느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강도가 높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을 때는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이 짧은 생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는, 크게 마음 쓰지 않는, 삶을 좀 더 가볍게 경험하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성도,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야 하나님이 바라시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과 세속적 가치에서 벗어나, 오늘 하루에 주어지는 각 사람의 몫인 행복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받아야 할 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을 때는 성경에는 오염된 단어가 많고 그중에서도 복이라는 단어가 오염이 많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의 복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을 쫓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돈, 건강, 능력, 힘 등 무엇으로라도 불행한 때와 악한 때를 피해 갈 수 없기에 복은 이런 불행한 때와 악한 때를 피하는 것이 복이 아니며 또한 사라지고 없어지고 잃어버릴 수 있는 허무한 것들을 소유함도 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받고 누려야 할 복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는 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내 뜻을 관철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하는,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 흐를 수 있도록 하는 삶의 태도가 바로 복입니다. 

이런 믿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 헛된 세상의 가치와 욕망을 좇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그 어디에서나 하늘나라를 경험하는 것이 복입니다.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강요함으로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복’과 관련된 모든 이미지를 내 안에서 지우고, 다시 ‘복’에 관한 이미지, 성도가 누려야 할 복의 이미지를 세우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또 하늘나라는 이런 사정과 같다.”(14a, 새번역)는 말씀의 시작으로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종들을 불러서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의 재산을 맡깁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로 말씀드리면 적은 돈처럼 느껴지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으로 환산됩니다. 1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1달란트를 얻으려면 6000일, 16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며 돈 쓰지 않고 저축해야 모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요즘 일반 노동자의 하루 벌이를 최저임금을 적용해 9시간을 일했을 때 9만원 정도가 됩니다. 6000일 곱하기 9만원은 5억 4천만원입니다. 쓰지 않고 오로지 16년을 모을 때 얻을 수 있는 금액이기 때문에 평범한 이들은 절대 모을 수 없는 금액입니다.

주인은 제일 적게 준 종에게도 5억 4천만 원을 주고 갔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을 다른 종들에 비해서 주인이 차별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종들 간의 금액 차이는 있지만, 차별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각자에게 충분한 양 이상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이 비유를 가난한 이들이 듣고 있었다면 결코 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와, 가장 적게 받은 종도 5억 4천만 원이나 받았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누군가에게는 많이 먹고 남을 정도로 풍요롭게 주고, 누군가에게는 먹어도 먹어도 배고플 수밖에 없는 양을 주었다면 차별이지만 이미 준 가장 적은 양도 먹고도 넘치도록 남을 정도라면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차별은 해당하지 않습니다.

종들 간의 금액 차이를 둔 것은 오히려 주인의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과 함께 한 종이 무엇을 잘하는지 알고, 그 종이 무리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양만큼 허락했다면 이것은 주인의 배려입니다. 그리고 달란트의 양은 오히려 주인이 종들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비유에서 나오는 제일 적은 금액인 1달란트, 5억 4천만원의 금액은 오늘날 자식에게도 맡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어떻습니까? 종들에게 기꺼이 맡겼습니다. ‘맡긴다’는 표현은 단순히 ‘잘 가지고 있어라, 잊어버리지 않게 잘 지키고 있어라.’의 의미가 아닙니다. 여행을 가는 자신을 대신해 이익을 남기라는 의도의 말입니다.

교차 본문인 누가복음에는 더 직접적으로 장사를 하라는 표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9:12-13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귀족 출신의 어떤 사람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날 때에, 자기 종 열 사람을 불러다가 열 므나를 주고서는 '내가 올 때까지 이것으로 장사를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주인에게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16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17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어떻게 행하시고 말씀하시는지를 본,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4:3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에,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다가와서 말하였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와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시작된 제자와 예수님의 대화가 오늘 본문에까지 이릅니다.

그리고 이 비유에 앞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45-47 “누가 신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주인이 그에게 자기 집 하인들을 통솔하게 하고, 제 때에 양식을 내주라고 맡겼으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하고 있는 그 종은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종은 주인이 시킨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충실해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떤 사람은 종들에게 총 8달란트의 돈을 맡긴 것을 볼 때 굉장한 부자입니다. 아마도 이 어떤 사람은 굉장한 상인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종들에게 장사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가르치지 않았다면 그 큰돈을 맡기지 않았을 것이라 쉽게 추측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두 종은 주인이 떠나자 즉시 주인에게 보고, 배운 것을 실천합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에서 제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네가 보고 배운 바를 실천하라, 네 안에 있는 주어진 풍요로움을 더욱 풍요롭게 하라.’

중요한 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는 주님이 얼마를 맡기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나라를 풍요롭게 할 수 있도록 성도 각자를 배려함으로 알맞은 만큼 풍요롭게 맡기셨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이 풍요를 더욱 풍성히 해야 할 사명이 성도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비유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마치 잘못된 취급을 받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히려 가장 적게 받은 종 즉, 가장 적게 받았을지 모를 성도의 능력은 결코, 작지 않음을 말씀하시는 비유입니다.

가장 적게 받은 이도 한 달란트, 5억 4천만 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이 정도 양은 사용할 수 있고, 이익을 남길 수 있다고 판단되었기에 주인은 가장 적게 준 종에게도 많이 맡겼습니다. 풍성하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18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숨겼다.” 얼마나 안타까운 행동입니까? 주인은 충분히 한 달란트나 준 종의 능력을 높이 샀기에 맡겼지만 한 달란트나 받은 종은 보고 배운 바를 실천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어쩌면 우리가 이런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풍성하게 주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풍성하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음에도 스스로가 능력을 간과하고, 과소평가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너는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어찌 저 같은 사람이’라고 반문하며 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과소평가하고, 제한하며 살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4:12) 제자는 예수님보다 오히려 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어떤 사람이 돌아옵니다. “19 오랜 뒤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주인님, 주인께서 다섯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였다. 21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22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다가와서 ‘주인님, 주인님께서 두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의 이익을 낸 종들을 향해 주인은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다.’고 표현합니다. 앞서 달란트가 오늘날 어떤 정도의 금액인지 알려 드렸지만, 결코 적은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적은 일에 신실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주인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는 그저 작은 양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각 삶의 자리에서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면 적은 일이든, 많은 일이든 맡겨질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할 때 주인이 누리는, 예수님이 누리고 계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많은 일을 해야겠다. 적은 일만 해야겠다.’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맡겨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맡겨집니다. 하루하루 충실하게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다는 다짐과 성실함이 중요할 뿐입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제자는 마땅히 예수님이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삶, 말씀이 각 성도의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주인의 의도를 전혀 알지 못한 종은 여러 변명과 주인을 향한 비난으로 모면하려 하지만 결국 이 종에게 돌아온 것은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29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30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뿐이었습니다.

길을 가르쳐주고, 풍성하게 맡겨졌음에도 스스로를 결핍의 상태로, 자격지심의 상태로, 제한된 상태로 살아간다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어도 맞이할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도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결핍, 자격지심, 과소평가로부터 꺾이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오늘 비유를 통해 우리 각자가 가진 달란트가 결코, 적지 않음에 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 자신을 제한하지 않고, 꺾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성도는 풍성한 사랑의 삶,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기쁨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줄 믿습니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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