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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불러오는 갈등의인이 아니라 죄인을(마태복음 9:9~13)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02.08 02:21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고 그 복음의 진실을 따르는 믿음을 말할 때 어떤 느낌이 먼저 다가올까요? 무한한 위로와 안도감일까요? 아니면 어떤 충격과 마음의 동요 같은 것일까요? 이천년의 그리스도교 역사가 있는데다가 이미 교회생활에 익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전자의 느낌이 더 일반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초기 교회 시대에도 그랬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희망으로 위로와 안도감을 느꼈겠지만, 처음 복음을 접한 사람들은 그에 앞서 기존의 편견이 무너지는 데서 충격과 더불어 심각한 마음의 동요를 겪었을 것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의 본문말씀은 그 충격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게 해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께서 마태라는 세리를 부른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마태가 과연 복음서를 기록한 주인공인지 아닌지는 논란이 있습니다. 초기 전승은 그렇게 받아들였지만,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의견 또한 제기되고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의 문제는 일단 제쳐두더라도 예수께서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사건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당신을 따르라 말씀하시자 그는 곧바로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다른 제자들을 부르실 때의 장면(마태 4:18~22)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가 일하던 현장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장면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일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의 양상은 동일하지만, 사실 어부를 부른 것과 세리를 부른 것은 커다란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부나 세리가 고귀한 신분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이들의 삶의 조건과 사회적 평판은 전혀 달랐습니다. 어부는 비천하지만 죄인으로 간주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일터에서 생업도구를 팽개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는 했어도 언제든 그 자리로 되돌아가도 별로 이상할 것 없는 처지였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한 번 자기 자리를 버리고 나면 다시 되돌아가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을 향한 사회적 시선 또한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죄인으로 간주되었던 사람들입니다.

당시 세리는 공직자라기보다는 일종의 청부업자들로 민중들에게 원성을 사고 있던 부류였습니다. 이들은 징세임무를 맡음으로써 헤롯 왕권에 봉사하는 동시에 로마제국의 권력에 봉사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에서 예수께서는 바로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마태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이야기는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한 집에서 마태뿐만 아니라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모여 예수와 제자들과 자리를 같이하며 식사를 나눴습니다. 유대인들의 정결예법에서 식사예법은 매우 엄격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을 함께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상종 못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들과 식탁을 함께 했습니다. 복음서가 일관되게 증언하듯이 예수께서 누구와도 제약 없이 식탁을 함께 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증표와 같았습니다.

세리를 제자로 부른 것도 놀라운데 그들과 더불어 아무런 스스럼없이 식사를 함께 나눈 것은 더더욱 놀랄 일이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예수께서는 아무렇지 않게 행하신 것입니다. 이를 지켜 본 바리새파 사람들이 발끈하여 제자들을 보고 항의합니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시오?”

그저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도 이런 사태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시선은 오늘날도 집요하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특정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면, 바리새파 사람들의 태도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 항의를 듣고 예수께서 답하십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9:12~13)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수입니다. 더 이상 달리 표현하기 어렵다고 할 만큼 명료하게 복음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들도 끊임없이 이 말씀을 환기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이 말씀 가운데 모든 뜻이 함축되어 있지만, 예수께서는 진정한 율법과 예언의 정신을 환기하며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일침을 가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호세 6:6)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한 것입니다.

▲ Giovanni Paolo Panini, 「The Calling of Saint Matthew」 (1752) ⓒGoogle Art Project

여기서 제사는 그야말로 성전에서 드리는 제의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형식적인 율법준수와 제의적 정결의식에 바탕을 둔 모든 경건 행위를 포함합니다. 이른바 스스로 경건하고 거룩하다고 여길 만한 모든 행위와 의식을 포함합니다. 그것을 뛰어넘어 오직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요,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그 허위의식과 장벽을 뚫고 그 일을 행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결론짓습니다. 죄인 취급을 받으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문맥에서 이 말씀의 의미를, 모든 사람이 죄인이니 모든 사람을 위해 오셨다는 이야기로 곧바로 비약해서는 안 됩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오셨다는 이야기는 명백히 의인과 대비되는 죄인을 위해 오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의인이 누구입니까?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사람들, 스스로 경건하다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죄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그 의인들에게 불경스럽고 더러운 존재로 여겨지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사회 안의 특정한 세계관과 그 질서에서 배제된 이들입니다. 오늘날 개념으로 말하면 사회적 소수자들을 뜻합니다.

이처럼 명료한 말씀에 어떤 군더더기를 붙여 그 핵심을 비켜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면하는 것이 됩니다.

지난 주간 대전노회와 일본 교토교구의 실무회의가 있어 3년만에 일본을 다녀왔습니다. 그 전 주간 수요일에 먼저 도쿄에 들러 후배 동역자들(이상경, 홍이표 등)의 사역 현장을 들러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일에 ‘가와사키(川崎) 교회’에서 설교할 기회를 누렸습니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밀집 지역에 세워진 가와사키 교회는 해당지역과 일본사회 안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을 향한 선교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습니다. 지난해 새로 건축한 교회당 전면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모습이 스테인드글라스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 내력에는, 사쿠라모토 지역의 어린이들이 교회당에 모여 노는 바람에 예배당이 혼잡스럽고 심지어는 파손되기까지 해서 거룩한 예배당이 그래서야 되겠느냐는 논란이 일었을 때, 당시 이인하 목사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야기로 그 논란을 일축했던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가 관여하고 운영하는 여러 선교활동 가운데 어린이집을 운영하게 된 과정에서 일어난 한 사연입니다. 섬기는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환기함으로써 복음의 진정한 뜻을 일깨운 일화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처럼 기존의 강고한 질서와 통념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정말로 위로와 안도감을 선사해준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은혜입니다. 큰 은혜를 입은 것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이 위로와 안도가 되는지 우리는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바로 이 말씀의 뜻에 비추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축복입니다.

그렇지 않고 혹 복음이 그저 내가 바라는 욕망, 내가 살고 있는 삶에 아무런 충격도 주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용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운데 누리는 위로와 안도라면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정반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되새길 때마다 마음의 동요와 갈등이 일어난다면, 그것 때문에 스스로의 믿음을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복음의 참 빛이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징표요, 복음의 기쁜 소식이 비로소 내 귀에 들리는 징표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 동요와 갈등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나의 세계 안에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참뜻을 구현하고자 애쓰는 삶을 위한 분투 가운데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니,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삶의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만의 의를 부추기는 삶의 현실 한복판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능력을 입증해야 하고 나의 업적을 내세워야 인정받는 세계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강고한 아성들만 여기저기 쌓이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러니 불화와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강고한 아성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선포입니다. 우리가 거부하고 싶은 대상까지도 안을 수 있을 때 모든 인간에게 비로소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의 뜻을 몸소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을 바로 그 뜻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그 뜻을 우리의 삶 한복판에서 온전히 구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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