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사회 칼럼
성소수자이고 비성소수자인 우리,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성)소수자와 그리스도교 14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 승인 2023.02.10 15:05
▲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의 한 장면 ⓒ화면 갈무리

1.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 죽임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나이를 먹는 것은 두렵지 않아 / 상냥함을 잃어가는 것이 두려울 뿐
모두가 다 그렇게 살고 있다고 /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싶지는 않아
흐르는 시간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네
언젠가 정말 할머니가 된다면 / 역시 할머니가 됐을 네 손을 잡고서
우리가 좋아한 그 가게에 앉아 / 오늘 처음 이 별에 온 외계인들처럼 / 웃을 거야

정의당 장혜영 국회의원의 본업은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입니다. 발달장애를 겪으면서 오랫동안 시설 생활을 해 왔던 동생 장혜정 씨와 같이 사는 생활을 시작한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와 책 《어른이 되면》으로 만들었죠. 그 다큐멘터리에 수록된 노래의 제목이 이번 칼럼의 제목이기도 한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입니다. 서두에 인용된 글은 이 노래의 가사입니다.

2.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마지막 글입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정규직, 공정, n포 세대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키워드를 또다른 하나의 키워드로 관통할 수 있다면 “인생 스케줄”이라는 키워드가 어떨까 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 존재하는 ‘정상가족’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적절한 때에 취직을 하고 결혼도 하고 자식을 낳아 키운 뒤에 나이가 들면 직장에서 물러나 자식에게 봉양을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인생 스케줄 말이지요. 물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인생 스케줄 자체가 일단 여자보다는 남자에 더 맞는 기준 아닌가 이런 생각부터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아직도 저런 인생 스케줄이 인생 스케줄의 전형이라는 선입견이 퍼져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 듯 합니다.

아마도 저런 인생 스케줄을 생각할 때 가장 기본으로 놓여야 하는 것이 ‘정규직’일 것입니다. 저 인생 스케줄을 뒷받침해 줄 경제력은 물론이고 스케줄을 채워갈 내용에 대한 결정력에서도 기본이 되는 것이 ‘정규직’으로서의 직장 생활일 테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자니 '정규직'은 이미 수십년째 인생의 스케줄이라기보다는 타이틀이나 고급 아이템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성소수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아도 이 정도인데 성소수자라면 다른 요인이 더 들어가게 될 겁니다. 자신이 운이 좋아 정규직을 얻었다면 성소수자란 걸 감출 수만 있다면 큰 문제가 없을 수 있지만 이미 그 ‘감춘다’라는 것 자체가 차별이고 스트레스이겠죠. 정규직이라는 운이 없는 경우에는 노동자에 대한 보호가 그만큼 약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해서, 성소수자라는 조건은 잘리기 좋은 조건의 하나가 되기도 하고 말입니다.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장애인과 같은 다른 소수자들의 경우에도 비슷한 상황이 존재하겠죠.

언제부터인가 정규직이란 말과 공정이란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붙어 다니지요. 공정의 기준으로 뽑히는 것은 무엇보다 ‘능력’일 텐데요. 성소수자들은 사실 이 능력이란 말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생각해 왔다고 합니다. 성소수자라는 조건을 생략해 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인데요. 공정과 능력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성소수자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잘린다면 부당하다고 대부분 대답한다니 저 생각이 맞는 구석이 있긴 한가 봅니다.

그런데 공정과 능력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능력 이외의 다른 것에는 엄청 싸늘하다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아 왔지요. 게다가 사실 이 공정과 능력이란 말은 이제 앞에서 쓴 표현을 빌리면 정규직이라는 ‘타이틀’과 ‘고급 아이템’을 두고 다툴 수 있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요. 그 밖의 일자리에서 필요한 것은 능력자가 아니라 ‘인력’, 회사의 비용을 특히 회사가 어려울 때 전가해 버릴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할 뿐입니다.

성소수자를 비롯한 제반 소수자들은 그 '인력'으로 쏠릴 가능성이 다른 사람들보다 높기도 하겠구요. 여기에 평소 제 생각을 덧붙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과 능력 이외에 사회를 조직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지금 우리 사회는 모르고 있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정규직이 인생 스케줄의 전형인데 그 전형이 타이틀과 고급 아이템이라면 그 전형이 전형이라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겠죠. 그래서 앞에서 이야기했던 ‘n포 세대’, 연애/결혼/자식 등등을 포기한 세대 운운하는 말이 돌기 시작한 것이겠습니다. 더군다나 성소수자라면 이른바 ‘정상가족’을 전제하는 결혼과 자식과 노후 봉양 등등에서 다 벗어나게 될 테니 아예 나이들면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다르게 그려야 할 테구요.

그래서 요즘 성소수자 운동이 노후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서두에 인용한 노래 가사대로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를 묻기 시작했다고 봐야겠죠.

지금까지 이야기한 정규직, 공정, n포 세대라는 세 가지 키워드 모두에서 특히 트랜스젠더들은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성애자로 패싱하는 것이 더 어려워서 취업에 문제를 겪기도 하거니와 성 재지정 수술을 하게 되면 몇천만원대의 돈이 필요하니 능력 따위를 갖출 새도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 재지정 수술을 하면 그것은 이제야 사회에 끼워줄만 하다는 입장권을 받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동시에 수술 전/수술 후로 인생 자체를 둘로 쪼개 놓는 것처럼 다루어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시간이라는 중요한 자본주의의 자원이 둘로 쪼개져 하나가 거의 사라져 버리는 꼴이 된다고나 할까요.

3.

정규직, 공정, n포 세대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관통하는 인생 스케줄의 문제에서는 성소수자들을 비롯한 제반 소수자들이 더 많이 어려움을 겪지만 그 어려움은 결국 성소수자이고 비성소수자인 우리의 어려움이기도 하다는 것을 지금까지 쭉 살펴 보았습니다. 성소수자이고 비성소수자인 우리 모두가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무사히 할머니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무사히 할머니가 되기 위해서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에 실린 에피소드 하나를 마지막으로 짚고 가고자 합니다. 인권위원회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던 어느 성소수자가 임시직이라고 직원 신분증을 주지 않는데 항의하기 위해 인권위 노조를 찾아갔더니 곧 신분증이 나왔답니다.

그 성소수자는 이 에피소드에 대해서 이런 해석을 합니다. 성소수자/비성소수자 노동자가 겪는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대처방법이 있을 텐데요. 다른 대처방법과 노조를 통한 방법과의 차이는, 노조를 통하는 방법이 유일하게 자신에게 직장과 동등하게 맞설 수 있는 위치를 부여하는 것이었답니다. 이 ‘동등하게 맞선다’가 무사히 할머니가 되기 위해 반드시 챙겨야 할 것이 아닐까요.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