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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딘 걸음으로 보일지라도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인간의 도리(이사야서 55:8~11)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02.15 02:18

오늘 본문말씀은 두 번째 이사야(40~55)의 마지막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서가 전하는 예언의 근본적 성격을 환기해주고 있습니다. ‘예언’을 접할 때 과연 어떤 생각이 먼저 떠오릅니까? 흔히 예언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객관적 진실을 미리 선포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성서의 예언은 예정된 앞날을 단순히 내다보는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닙니다. 성서의 예언은 선택의 가능성 앞에 있는 청중의 결단을 요청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저 객관적인 미래가 아니라 주체의 결단으로 그 성취 여부가 결정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적셔서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하고,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고 나서야,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과 길, 인간의 생각과 길을 대비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생각과 길, 곧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이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통념으로 말씀의 의미를 헤아려서 안 될 것 없지만,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서 헤아릴 때 그 의미가 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이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두 번째 이사야는 바빌론 포로기에 활동했던 예언자로서, 바빌론으로부터의 해방을 제2의 출애굽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머지않아 해방의 새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희망을 선포하는 말씀의 결구입니다. 바로 그 맥락에서 인간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생각을 대비하는 것은 당대의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과 대비되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 것입니다.

당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지금 당장 포로로 잡혀 있는 현실에 절망했습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현실에 매인 태도입니다.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더디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그와 다르다고 선포합니다. 더디게 느끼고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후반부의 말씀입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비유로 그 진실을 전합니다. 비와 눈의 비유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 땅을 적시고,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을거리를 주고 나서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는 비유입니다. 생명의 질서가 지속하는 이치를 이렇게 아름다운 비유로 설파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의 운동 속에, 생명의 약동 가운데, 사람의 삶 가운데 마땅히 이뤄져야 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시 하나님의 입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마침내 이루어진 그 일을 보고서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반드시 바른 데로 돌아갑니다. 바르지 못한 것이 기승을 부리는 것 같지만, 반드시 바른 데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질서는 무너지고, 생명은 죽음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은 그렇게 살아 있는 생명의 운동 가운데서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인간이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한 순간도 끊이지 않고 있기에 생명을 살리는 말씀으로서 권능을 발휘합니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시편 19:3~4) 바로 그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불확실하게 느껴지느냐, 그렇지 않다, 이렇게 확실하게 입증되는 것을 모르겠느냐?’ 이사야서의 말씀은 그렇게 집약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말씀이 여전히 청중들에게 자명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명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여전히 자신들의 생각 속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말씀에서 ‘나의 생각’ 곧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너희의 생각’ 곧 저마다의 생각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실을 넘어설 가능성, 곧 희망이 없다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언은 바로 그 생각, 그 마음을 향한 것입니다. 객관적인 법칙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을 어떻게 헤쳐날 것이냐를 묻고 결단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지금 둘러싸인 현실을 넘어설 희망의 의지를 품고 있다면, 그 뜻을 품은 이들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생각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결단을 촉구했다. ⓒGetty Image

앞서 말했듯, 성서의 예언은 선택의 가능성 앞에 있는 청중의 결단을 요청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의 비유로서 자연적 법칙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명확하게 그 청중을 겨냥한 결단의 요청으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사회의 현실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현실은 인간 스스로 형성해온 질서일 뿐입니다. 물론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짜인 질서입니다. 그것은 결코 운명적 질서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새롭게 구성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어진 질서를 운명의 족쇄로 여기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이루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희망의 의지와 실천에 따라 가능해집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선포된 것이라는 점을 다시 새겨야 합니다. 그것은 포로민의 상태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될 희망을 선포하고자 하는 데 그 뜻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헤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사야는 그 첫머리에서 위로와 희망의 선포로 시작합니다. “복역의 기간이 끝났다. ...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40: 2~3)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그 위로와 희망의 선포 결론에 해당합니다.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 두 번째 이사야는 백성들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도록 매우 심각한 예언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른바 ‘고난의 종’으로서 메시야에 대한 선포입니다. 고난을 겪은 이가 곧 그 고난으로부터 구원의 길에 이른다는 위대한 통찰입니다. 그 점에서 두 번째 이사야의 메시지는 매우 일관되어 있고 그 만큼 인상적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또한 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본문말씀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선택한 백성에게 특혜를 베풀어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는 편협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수용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길을 만천하에 알리라는 요청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습니다. 자연은 스스로 균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나 인간사회는 저절로 균형을 잡지 않습니다. 인간사회는 역시 인간들의 작위적인 행동 여하에 따라 결정됩니다. 다행스럽게 인간은 부단히 더 나은 세계를 향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희망이 절망스러운 현실 가운데서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 왔습니다.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는 소설은 마르코 폴로가 자신의 여행담을 쿠빌라이 황제에게 전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에서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에게, 우리의 일상이 지옥이라면서 지옥을 견디는 두 가지 방법을 말합니다. 하나는 스스로 지옥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옥의 한복판에서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는 것으로, 이것은 매우 어려운 방법입니다. 이 방법을 따르기 위해서는 늘 깨어 있어야 하고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렵기만 하겠습니까? 그 길을 따르는 것은 스스로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며,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길이 됩니다.

지난 주간 의미 있는 역사적 판결이 나왔습니다. 베트남 전쟁시 한국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당사자가 제기한 소송에서 처음으로 한국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사건 발생 후 52년만입니다.

앞으로 유사한 소송이 계속 이어질 때 한국정부가 감당해야 할 배상의 금액이 문제가 아닙니다. 인륜과 정의를 세우는 이정표로서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줄기차게 책임을 부정하고 사과를 거부하는 일본정부의 길을 따를 것인지 책임을 인정하고 지속적으로 사과하는 독일정부의 입장을 따를 것인지는 우리사회 구성원의 의지와도 무관할 수 없습니다. 분투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인륜과 정의는 세워집니다.

저 지난 주말, 그러니까 지난 주일 바로 하루 전 충격적인 비보를 접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을 위해 그 누구보다 앞장서 왔던 임보라 목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난 주일 오후 빈소를 다녀왔고, 그의 삶을 기억하는 글을 요청받은 상태이지만 아직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빈소에 갔더니 너무 좁게 느껴질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나보내는 그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저로서는 방패막이 역할을 자임하면서 연대해왔지만 그에게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웠다는 것을 알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는데, 그를 떠나보내는 자리에 함께 한 이들을 보며 그의 삶이 결코 헛되이 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위로 아닌 위로를 삼았습니다.

역사는 그렇게 분투하고 헌신하는 이들을 통해 한 걸음씩 나아갑니다. 그 발걸음이 외로운 발걸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혼자만의 발걸음이라면 무겁고 외롭지만, 함께 하는 발걸음이라면 가볍고 즐거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로 함께 하는 것은 그 발걸음을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 공동체로 모이는 것은 구원의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에 겸손히 함께 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만한 생각을 품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함께 하면 우리는 서로에게서 격려를 받고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생각을 따른 그 길의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지치지 않고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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