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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동쪽에서의 삶어떤 양을 찾으십니까(신21:1-4, 계5:11-14, 요1:29-34)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2.21 01:09
▲ 자신과 공동체의 문제를 외부로 돌려 파괴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직시해야 한다. ⓒGetty Image

1.

오늘 신명기의 말씀을 보면 소위 ‘속죄양. 희생양’이라고 하는 제물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법률입니다. 어느날 변사체가 발견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조사를 해 봐도 살인자가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할 것이냐? 큰일이죠? 오늘날에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은 이렇게 지시합니다. 가장 가까운 마을에, 물이 잘 흐르는 골짜기로 갑니다. 그곳에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와서는 목을 꺾어서 죽이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죽는 일에 우리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죄인이 누군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살인의 책임을 지우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끌고 가서 죽이는 제물을 속죄양이라고 부릅니다. 분명히 본문에는 암송아지라고 되어있는데 왜 ‘양’이 되었는지 그 이야기도 재미납니다만, 각설하구요.

하나님은 왜 이런 율법을 주셨을까요? 진짜 범인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암송아지의 목을 꺾는다고 해서 그 죄가 없어질까요? 악용하는 사람들이 생기면 어떻게 하죠? 고의로 사람을 죽여놓고서 ‘야, 범인도 찾기 힘들고, 우리 율법대로 속죄양이나 죽이고 끝내자’ 그럴 수 있지 않겠어요? 하나님은 왜 이렇게 허술하고 미신적인 율법을 만드셨을까요?

2.

신명기의 말씀은 모세의 유언입니다. 신명기 1장 1절을 보면,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요단강 동쪽에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을 모아놓고 마지막으로 모세가 유언을 남깁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신 저 땅에 들어가 살게 될 텐데, 당신네들 맘대로 멋대로 살면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내가 알려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기억나시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하고 율법 전부를 알려주는 것이 신명기입니다. 신명기의 문제의식은 명확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이 주신 땅, 가나안, 이 땅은 어떤 땅입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 설명 말구요. 진짜 그 땅의 정체가 뭡니까? 가나안에는 이미 그곳에 오랫동안 살고 있던 원주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거인처럼 힘센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과 삶을 두고 치열한 투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가나안은 낭만적인 낙원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낙원 이야기를 할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곳이 있습니다. 어디죠? 바로 에덴동산이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는데,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죄를 짓고 동산 밖으로 쫓겨납니다. 그렇게 쫓겨난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바로 ‘에덴의 동쪽’입니다. 에덴의 동쪽,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에덴에서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죄로 인해서 에덴에서 쫓겨난 사람들, 그렇게 쫓겨난 곳, 에덴의 동쪽. 이곳에서 우리 인간들은 끊임없이 에덴을 동경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의 동쪽에서는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가인과 아벨 이야기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양을 칩니다. 그렇게 평범하게 그러나 서로 다르게 살아갑니다. 이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패합니다. 창세기는 이것을 ‘하나님의 반기심’이라고 표현하는데, 진짜로 하나님께서 아벨을 좋아하시고, 가인을 싫어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벨은 성공했지만 가인은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머리로는 결코 이해가 되지 않게, 누군가는 행복하고 누군가는 눈물 흘립니다. 불공평합니다. 불공정합니다. 열심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엄혹한 현실입니다. 열심히 살아도 실패하고, 악한 자라도 성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맘대로구나’하고 표현한 것입니다.

에덴의 동쪽의 현실이 가인을 못 견디게 만듭니다. 가인은 이런 현실에 몹시 화가 났습니다(창4:5). 아벨을 들로 불러내어 죽입니다.

가인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화가 납니다.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인처럼 누군가에게 화를 내면 될까요? ‘너 때문이야!’ 하고 비난의 화살을 돌리면 될까요? 그렇게 일이 풀리나요?

하나님의 말씀은 명확합니다. “어찌하여 너는 화를 내느냐?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가인이 무슨 올바르지 못한 일을 했습니까? 아직 아벨을 죽이기 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올바르지 못한 일’은 아벨을 죽인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인이 뭔가 잘못을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도 말하지만, 성경은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성경은 정확히 말합니다. 가인이 화를 내는 것, 가인이 억울해 하는 것, 그 화를 누군가에게 돌리는 것, 희생양을 찾기 위해 눈을 부라리는 것. 이것이 가인의 잘못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화를 참지 못하고 뱉어내는 것. 이것이 자기 죄에 지배당하는 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처음 퍼져나가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코로나를 ‘우한 바이러스’라고 불렀습니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되었다면서 마녀사냥하듯이 중국을 향해 손가락질하기 바빴습니다. 중국을 희생양 삼으려 했습니다. 대구에서 신천지 이단 교회 때문에 코로나가 퍼져나갔을 때에도 똑같았습니다. 교회가, 신천지가, 손가락질을 당했습니다.

메르스 때는 어땠나요? 애꿎은 중동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사람들은 희생양을 필요로 합니다. 바이러스를 잡아야지 왜 희생양을 잡습니까? 내 삶을 돌아보고 선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 생각을 해야지, 왜 애꿎은 아벨을 죽입니까? 이것이 에덴의 동쪽, 바로 우리 삶의 현실이라는 겁니다.

3.

자, 이제 다시 신명기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희생양은 뭡니까? 속죄양은 뭡니까? 미신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한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의 폭력적인 죄를 깊이 통찰하고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희생양을 필요로 합니다. ‘양’말고 진짜 ‘사람’말입니다. 중국 우한이 희생양이 되어야 하고, 대구 신천지가 교회가 희생양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관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내 화를 표출하고 폭발시킬 대상이 필요할 뿐입니다. 무한경쟁의 비정한 사회에서, 나의 욕심이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삭막한 사회에서, 충족되지 않은 소원은 화가 되고 원망이 되고 증오가 되어 희생양을 찾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아벨을 찾아 헤매는 폭력의 사회가 되고 맙니다.

바로 이런 세상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겁니다. “인간을 희생양으로 삼지 말아라. 인간에게 헛된 화살을 돌리지 말아라. 함부로 질투하지 말아라. 함부로 노여워하지 말아라. 함부로 화를 내지 말아라. 함부로 죽이지 말아라. 너의 앞에서 너를 지배하려고 도사리고 있는 너의 죄를 다스려라. 그 죄에 휘둘리지 말아라.”

그리고는 해결책을 주십니다. “자, 이 양을 제물 삼아, 마음을 풀어보자. 흐르는 물에 손을 씻으며 이 양에게 죽을죄가 있었는지 돌아보자. 양이 무슨 죄가 있는가? 그러면 사람은 죄가 있는가? 누군 죄가 있고, 누군 죄가 없는가? 누구에게 진짜 죄가 있는지 돌이켜보자. 누가 죽을죄를 지었는지 돌아보자. 죽을죄를 지었다 해도 우리가 그를 죽일 수 있는지, 우리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지 돌아보자.”

희생양의 율법은 에덴의 동쪽을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율법입니다. 죄의 연쇄반응을 끊어내고자 하는 은혜입니다. 희생양을 찾아서 내 화와 울분을 토해내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속죄양을 필요로 할 정도로 화와 울분에 사로잡힌 내 욕망을, 나의 허탄한 욕망을 제대로 바라보게 해주시는 은혜입니다. 정당하지 못한 화와 분노를 삭이게 해주시는 은혜입니다. 속죄양의 죽음 앞에서 ‘같은 인간을 속죄양 삼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하고 감사하게 해주시는 은혜입니다.

4.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당신들은 희생양을 찾아 그 희생양에게 모든 화를 쏟아부으며 살지만,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딸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죄를 짊어지십니다. 담당하십니다. 아무 죄도 없으시지만, 불평하지 않습니다. 변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자기 몫의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라는 것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하는 구속의 의미도 있습니다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은 철저하게 우리의 모범입니다.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 하고 보여주시는 모범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들임에 분명합니다만, 그것으로 전부는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삶의 모습대로 살아서, 우리도 누군가를 구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나의 구원이 내 신앙의 종착역이 되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희생양을 찾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희생양이 되어주는 삶, 그렇게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해 주는 삶, 그리스도의 구원의 삶을 본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은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예수님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삶은 그런 삶이라는 것입니다.

계시록을 보면 세상 끝날에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자세히 읽어 봅시다. 심판받는 자는 누구이고 심판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패망하는 자는 누구이며, 마침내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받는 자는 누구입니까? 성서는 분명히 말합니다. 어린양, 죽임 당하신 어린양, 성령이 함께 하시는 어린양입니다.

5.

어떤 양을 찾으십니까? 희생양이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어린양이 필요하십니까? 희생양을 찾는 인생은 그 하나의 희생양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핏발 선 눈으로 또 다른 희생양, 제2의 제3의 희생양을 찾아 다니는 가인과 같은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린양을 사모하는 인생은, 나의 순종과 나의 복종으로 이 죽음과 죽임의 연쇄고리를 끊어내는, 그래서 이 에덴의 동쪽에 마침내 생명과 살림과 사랑의 길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런 인생 되길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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