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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과 회복, 그리고 사명(창 3:1-7 행 22:1-21 막 11:1-10)사순절 첫째 주일/3・1절 기념 주일(2월26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2.23 20:49

1. 나 하나 꽃피어

오늘은 사순절 첫째주일입니다. 사순절(四旬節)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경건히 준비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사순절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40을 의미하는 테사라코스테(Τεσσαρακοστή)의 번역입니다. 우리말로도 넉 사(四)와 열흘 순(旬)을 사용해 숫자 40을 의미합니다. 재를 머리에 얹거나 이마에 바르며 죄를 통찰하는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주일 전날까지 주일을 뺀 40일간 지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전,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신 것과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신 고난의 길에 동참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렌트(Lent)라고 하는데, 이것은 고대 앵글로 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을 뜻합니다. 또한 길이(Length)를 의미하는 앵글로 색슨어 ‘lencten’에서 유래한 말로, 봄의 기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 절기로도 입춘(2월 4일)이 지났으니, 사순절은 봄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지난 2월 16일 ‘똑똑똑 봄을 여는 마중물 음악회’에서 성공회 문화선교 사제인 성요한 신부님이 봄에 관한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고 제가 그 노랫말의 의미를 해설하는 음악회를 가졌는데, 이 시간 사순절과 봄의 의미를 잘 담은 시가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조동화 시인의 ‘나 하나 꽃피어’입니다.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최근 각자도생의 시대에 ‘나 하나’로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 무력함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민주주의와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낭만주의, 혹은 이상주의로 멸시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꽃 한 송이, 단풍잎 한 장처럼 미약해 보이는 ‘하나, 하나’가 모여서 꽃밭과 울긋불긋한 산을 이루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각자도생, 약육강식, 양극화 사회가 자연의 순리가 아닙니다. 더불어 사는 것,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 되는 세상, 생명이 생명답게 존중받는 세상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바로 그런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주현절기에 활동하셨고, 이제 그것을 완성하시기 위해 봄의 꽃처럼 사순절 구원의 꽃을 아름답게 피우시는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최초 인류의 타락과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한 회복의 말씀입니다. 구약 말씀을 통해 우리 인류의 죄 때문에 에덴동산의 아름다운 꽃이 시들어 버렸으나, 복음서 말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부활의 꽃이 다시 핀 것입니다. 타락에서 회복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말씀은, 이렇게 다시 회복된 대표적인 사람인 바울에 관한 말씀, 곧 그의 사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순절을 맞아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신 예수님의 보혈로 다시 새로워지시기를, 또한 바울과 같이 사명자로 부름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먼저 타락에 관한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2. 타락,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1-3)

에덴동산의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입니다. 뱀이 그들을 유혹합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도록 유도합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 3:4-7)

▲ 미켈란젤로의 선악과 사건과 에덴 추방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죄의 시작과 인류의 불순종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진화생물학자 카럴 판스하이크와 과학 저널리스트인 카이 미헬은 『신은 성서를 쓰지 않았다』(시공사, 2023)라는 책에서 흥미로운 해석을 합니다. 이 책은 성서의 연대를 그대로 따라가며 성서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살펴보는데, 창세기에서 시작해 출애굽기와 예언서, 시편과 욥기를 거쳐 예수의 등장과 함께 대장정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책을 보면, 판스하이크&미헬은 근본주의자들처럼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습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과는 달리, 이들은 성서를 보는 기본 전제를 “중동 지역에 등장한 종교 및 문화 발전 과정을 충실히 기록한 문서”로 봅니다. 판스하이크&미헬은 성서를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한 인류의 일기장이라고 합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볼까요?

“성서가 거의 1,000년에 걸친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어쨌든 1,000년간 쌓아 올린 경험 덕분에 성서는 진정한 책 중의 책이 되었다. 성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인간이 직면한 온갖 재앙에 대처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어떻게 다양한 전략을 실험했는지, 그리고 그럼으로써 어떻게 완전히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는지 들려준다. 따라서 성서는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시도한 모든 것을 기록한 인류의 일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일기장을 읽으면 과거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특정 분야가 발전한 원인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특징짓는 전형적 행동 패턴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성서라는 이름의 일기장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서를 제대로 읽으면 인간의 본성과 문화의 상호작용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문화적 진화의 작용 방식에 대한 근본적 통찰력을 제공할 뿐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고군분투하는 온갖 어려움의 기원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를 수렵·채집 시대에서 정착 시대(농경사회)로 넘어가는 순간(혹은 기억)을 기록한 문서라고 규정한 것은 인상적입니다. 논의를 따라가 볼까요? 빙하기가 끝난 기원전 1만 2,000년 무렵부터, 인류의 수렵·채집 시대는 서서히 저물게 됩니다. 정착 시대인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인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에 부닥치게 됩니다.

사실 수렵·채집 시대에는 남성과 여성이 평등했던 정도가 아니라, 한 여성이 남편 여러 명을 거느렸습니다. 모계제 사회였죠? 그러나 남자가 여자보다 더 심한 노동을 해야 하는 농경시대가 되면서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됩니다. 부계제 사회가 된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에덴동산 안에서의 생활은 모계제 사회이자, 수렵·채집의 시대입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먹었고, 또 아담은 하와의 말에 잘 순종합니다. 그러나 실낙원, 곧 에덴을 벗어나면서 농경사회가 시작됩니다. 부계제 사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관계도 역전됩니다.

생물 인류학적으로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 여성의 신체는 점차 작아집니다. 힘쓰는 농사일을 남성이 하게 되고 여성은 힘을 쓰지 않는 집안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출산하는 아기의 크기, 특히 머리 크기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산모가 느끼는 고통도 심해지고, 출산의 위험 역시 커졌습니다. 취리히 대학교 생물 인류학 교수인 카럴 판스하이크의 말입니다.

“고인구학의 분석에 따르면, 초기 농경시대에 산모와 아기의 주산기 사망률(周産期死亡率, 임신 28주 이후의 사산과 출산 후 1주일 이내 신생아 사망 비율)도 수렵·채집인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여기에 농경 생활을 하며 이동성이 감소한 것도 출산율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성서의 말대로, 여성은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 남편이 너를 다스리게 되리라!(창 3:16)”가 된 것입니다. 물론, 남성들은 정착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땅을 가는 수고를 알게 되었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 가득한 땅에서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게 될 것이며(창 3:17)” 이렇게 인류가 수렵・채집에서 농경시대로 접어든 상황의 고민을 에덴동산, 선악과 사건 등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수렵・채집 시대로, 모든 것을 공유한 시대였으나, 선악과 사건을 통해 사적 소유가 등장하며 에덴동산 시대는 끝나고, 동산에서 쫓겨나 농경시대로 접어듭니다. 이때 사유재산을 통한 사적 욕망의 시대가 열리고, 동시에 신체적인 차이가 남녀 차별로, 사적 소유의 차이가 사람 차별로 이어지게 됩니다. 인류의 타락이 시작된 것입니다. 판스하이크&미헬은 이러한 배경에서 성서의 선악과 사건을 정착 생활을 시작한 최초의 인류가 느꼈던 낯섦을 반영한 것으로 봅니다.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사유재산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쉽게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특정 자원을 개인이나 가족이 소유할 수 있다는 개념을 공동체 모든 사람이 이해하기까지 막대한 지적 노력이 수반되었다. 왜 갑자기 이 땅에 들어가면 안 되고, 이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인가? 전에는 누구나 지나다닌 땅이고 누구나 열매를 따 먹은 나무인데!”

물론 신학적으로 선악과 사건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불순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판스하이크&미헬은 이 사건을 문자적으로 읽고 진화생물학적으로 분석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정말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는 말인가? 인류가 단체로 책임을 지면서 수백 세대에 걸쳐 벌을 받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고작 사과 하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니, 어이없지 않은가? 게다가 성서는 그저 ‘열매’라고 표현할 뿐, 사과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고대 후기로 접어들면서 학자들이 그 열매를 사과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는데, 아마 사과를 의미하는 라틴어 말룸(mālum)이 ‘악행’, ‘악’ 또는 ‘재앙’을 뜻하는 라틴어 말룸(malum)과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수렵·채집 시대는 농경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인류의 황금시대로 기억됩니다. 따라서 신석기 혁명(정착 혁명)은 황금시대와 달리 많은 문제를 초래합니다. 환경적, 사회적 문제입니다. 곧 새로운 생활 방식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우리 인류는 새로운 시대에 등장한 불평등, 폭력, 전염병 등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고민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여성의 지위도 재조정해야 했습니다.

▲ 수렵・채집 시대 모습과 이집트 벽화에 나타난 가축을 길들여 농사짓는 모습

 

이 모든 것을 오늘 창세기는 인류의 일기장으로 그 해결책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류의 일기장에서 판스하이크&미헬과 달리, 인류의 죄와 불순종을 봅니다. 그리고 그 죄를 사할 수 있는 은혜로운 방법을 또 다른 인류의 일기장인 신약성서, 곧 생명의 일기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다시 에덴동산으로 초청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시작됩니다. 말씀을 볼까요?

3.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막 11:1-3)

신약성서에 나오는 생명의 일기장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겸손하여 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렇게 새 에덴동산은 겸손과 배려로 완성됩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 11:4-10)

이렇게 인류의 타락과 회복의 역사가 선악과에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도행전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4.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행 22:1-5a)

변화되기 전 바울, 곧 타락한 바울은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히 있어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죽였다고 합니다. 잘못된 종교와 가치관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바울이 타락한 상태로 계속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바울을 찾아옵니다. 바울은 이 만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행 22:5b-10a)

새 에덴동산으로 가는 방법을 본 바울,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5.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 22:10b-16)

▲ 아나니아와 바울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환상 가운데 바울이 만난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권면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어 사명자가 됩니다. 새 에덴동산이 열렸음을 모르는 이들, 곧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명은 자신의 죄를 알 때, 더욱더 견고해집니다. 바울은 이전에 자신이 주를 믿는 사람들을 괴롭힌 것과 스데반 집사가 순교 당할 때 증인으로 있었음을 회개합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주님은 바울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님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행 22:17-2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타락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면, 이제 주님 곁으로 다시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우리는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하리이까?”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조동화 시인의 ‘나 하나 꽃피어’에 나오는 시처럼, “나 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각자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면 세상은 바뀝니다. “네가 꽃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런 사명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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