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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chfolge: 뒤따름영생을 품은 사람(수1:5-9, 고전10:1-13, 눅9:57-62)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2.28 00:55
▲ Rembrandt, 「Christ preaches」 (1646-1650) ⓒWikipedia 나치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누구보다 예수 따름의 제자도를 강조했다. 서슬퍼런 나치의 압박 속에도 굴하지 않고 핑켄발트 신학교 교육과정의 이해를 위해 렘브란트의 그림을 걸어두었다.
네가 사는 날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 굳세고 용감하여라. 내가 이 백성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을, 이 백성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사람이 바로 너다. 오직 너는 크게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지시한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이 율법책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이 율법책에 씌어진 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가는 길이 순조로울 것이며, 네가 성공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여호수아기 1:5-9)

1.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한 마디로 하자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셔서 우리가 구원을 입었고, 그렇게 구원 입은 우리도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자도’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구원받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 몰지각한 그리스도인들을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면서도,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복만 달랑 받고서는 입 싹 씻고 제 갈 길로 가는 것이지요.

그런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생을 붙들고 고민해야 하는 신앙의 화두는 ‘어떻게 하면 복을 받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예수님 걸어가신 그 길을 나도 걸어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교회 모든 교우들은 매일 매일의 고민이 바로 이 고민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그 길을 따라나서는,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째 사람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다고 자기 스스로 결심하고 나온 사람입니다. “나는 선생님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대단한 사람이죠. 칭찬받을 사람입니다. 같은 이야기가 쓰여 있는 마태복음서를 보면, 이 사람은 율법학자입니다. 어설프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종교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평생 동안 하나님의 율법만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당신 왜 나를 따라오려고 합니까? 나를 따라와 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습니다. 머리 두고 누울 변변한 보금자리 하나 마련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사실상 거절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성경본문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예수님은 이 율법학자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서겠다고 작정하는 그 마음이, 순수한 복음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예수라고 하는 걸출한 종교 지도자를 이용해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챙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율법학자로서 이룬 종교적 업적을 뛰어넘어서, 이제는 종교 지도자로서 한 단계 높은 명예를 얻고 싶었던 세상적인 욕망과 욕심이 그 안에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신 나 따라와 봐야 소용없습니다. 세상적인 성공과 명성, 업적, 그런 것 얻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직접 부른 사람입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나 부르지 않으십니다.

제가 목사가 되어서 여러분 앞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신학교를 다니고, 전도사가 되고 목사가 될 때, 마음속으로 가장 고민했던 것이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불러주신 것일까? 주님께서 부르신 것도 아닌데, 내가 내 마음대로 교만하게 목사가 되겠다고 설치는 것 아닐까? 주님께서 ‘나는 너 부른 적 없다’ 하시면 어떻게 할까?” 하는 것입니다. ‘소명’에 대한 확신이 제일 힘든 고민이었습니다. 목사가 된 지금도, 매일매일 제일 간절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매우 복된 사람입니다. 가장 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상황이 특별합니다. 마침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을 치르는 중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만큼 특별한 사람인데,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함부로 생각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당연히 그 장례를 경건하고 엄숙하게 치러야겠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내가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오겠습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에 대한 공경도 잊지 않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하니까 갔다 오겠습니다’가 아니라, ‘허락해주십시오’하고 간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에게 맡겨 두어라.” 사실상 거절의 말씀입니다. ‘너도 글렀구나. 너도 십자가의 길에 적합하지 않구나.’

이 사람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보다, 예수님의 명령보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신념, 윤리적 의무가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치보다 자신의 신념을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버려 두고 곧바로 따라왔던 베드로와 요한과 같은 모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도 자기 스스로 주님께로 나온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세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따라가기는 따라가는데, 먼저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습니다.”

십자가의 길에 대한 그의 의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가치에 동조하고, 그 가치를 품고 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는 공존하고 있는 또 다른 마음이 있습니다. 복음서는 ‘가족’이라고 표현합니다. 먼저 가족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다른 가치를 버려버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것입니다.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두 번째 사람과 비슷합니다. 그래서인지 마태복음에는 세 번째 사람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당신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것과 같다”고 선언하십니다. 손에는 쟁기를 잡고서 밭일을 할 것처럼 흉내를 내고 있지만, 앞을 바라보면 밭을 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뒤를 돌아보면서 딴 짓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속으로는 두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하지만, 늘 마음속에는 갈등과 번민 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있으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겠다고 결단한 사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는 사람의 자세는 오직 하나님 나라만 바라보고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만 바라보고 나가도 그 길은 힘들고 어려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3.

십자가의 길은,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느냐 하는 외적인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 상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모습은 누구라도 흉내낼 수 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전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어도, 매주 교회 열심히 나올 수 있습니다. 찬양할 수 있습니다. 노래 부르는 건데 누가 못하겠습니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눈감고 중얼중얼거리면 됩니다. 주기도문 사도신경 누구라도 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흉내 낼 수 없는 것은 그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 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바울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평가하는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똑같이 출애굽 했고, 똑같이 만나를 먹었고, 똑같이 주님 주시는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갔고, 어떤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흉내 냈지만,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악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의심하고, 자기 욕심과 쾌락으로만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2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바울은 ‘서 있는 사람’에게 경고한 것이 아닙니다.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경고했습니다. 전혀 다른 말입니다. ‘서 있느냐, 서지 못했느냐?’ 하는 외적인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잘 서 있다’고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는 바로 그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생각이 문제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은 바로 그 ‘생각’, ‘잘못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험한 길을 걸어간다고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움에 처해서 힘이 빠져서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좌절하고 절망해서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로 인해서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주십니다. 우리를 실제로 넘어뜨리는 그런 시련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는 것은,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나는 지금 잘 서 있어’ 하는 마음입니다. 겉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으니까, 그렇게 보이니까, 스스로 대단하고 떳떳해서 ‘나만큼 하나님 잘 믿는 사람은 없어’ 하는 그런 자부심이 우리를 넘어뜨립니다.

출애굽 했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어도, 광야에서 어떤 생각을 품었느냐? 하는 것이 그 삶을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4.

그래서 오늘 성서는 여호수아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갔던 사람, 출애굽의 은총에 그친 것이 아니라 가나안의 복까지 경험한 사람, 바로 그 여호수아의 마음을 보고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굳세고 용감하여라. 크게 용기를 내어라.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런 일을 해라. 저런 일을 해라.’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행동을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굳세고 용감하게 하나님만을 믿어라. 마음속에 솟아나는 여러 가지 의심과 걱정, 갈등과 번민에 휘둘리지 말아라. 교만하지도 말고 자만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낙담하지도 말아라.”

여호수아는 과연 하나님 말씀대로 합니다. 두려워하지도 않고 낙담하지도 않습니다. 굳세고 용감하게 하나님만을 붙들고 나갑니다. 그렇게 나가서 제일 처음 한 일이 바로 여리고성을 함락시킨 일입니다. 여리고성이 어딥니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면서 첫 번째로 마주친 견고한 성입니다. 여리고성을 여호수아는 어떻게 무너뜨립니까?

예, 맞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칼과 창을 들고 싸우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언약궤를 메고 여리고성을 빙빙 돌 뿐입니다. 그런데 여리고성이 거짓말처럼 스스로 와르르 무너져 내립니다.

이 사건은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어떤 길인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 길을 가려면 내 모든 행동을 내려놓고, 내 마음속에 철저히 하나님의 마음만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5.

오늘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불러주신 사람이든지, 내 결심으로 주님께로 나온 사람이든지. 십자가의 길 앞에서 망설이고 있든지, 십자가의 길로 결연히 뛰어들었든지. 우리 마음속에는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는 순전한 마음으로만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생을 품은 사람일 것입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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