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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종말을 맞이하지 않았다헤겔의 인정투쟁: 알제리와 인도 그리고 너머에 (3)
정승훈 교수(시카고 루터신학대학원) | 승인 2023.03.04 14:37

헤겔은 포스트콜로니얼 칼리반

변증법적 드라마에서 헤겔은 지성적인 칼리반이 되는데, 이것은 세익스피어의 연극 “폭풍우”(The Tempest)에 나오는 반은 인간, 반은 괴물의 모습을 한 주인공을 말한다. 이러한 모습은 식민주의 억압에서 예속된 백성의 고통을 상징한다. 헤겔의 변증법적 현상학에서 이러한 상징적인 모습은 유럽의 식민지에 저항하고, 동시에 비유럽권의 인정과 해방욕구를 확인하면서 진행된다.

“헤겔과 니그로”에 대한 반성에서 파농은 헤겔의 인정철학에서 주인과 노예가 상호간의 인정으로 들어가는 단계를 핵심으로 본다. 인정의 권리를 위해 주인과 노예는 격렬한 투쟁에 돌입하고 자유와 해방을 위해 생사를 걸게된다. 이러한 인정투쟁은 파열, 전투, 그리고 다름으로 나타난다.

헤겔은 인간화과정에서 위신투쟁에 주목했고, 역사의 과정에서 지배와 억압의 시스 템을 철폐하고 자유의 이념을 강조한다. 사실, 이 부분은 코제브가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을 분석하면서 헤겔철학의 중심 자리로 옮겨 놓았다. 인정투쟁은 생사를 건 투쟁에 속하며 노예의 위신과 삶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자유의 이념이 실현되는 역사적인 과정에서 나타난다. 자유의 진보는 시민사회와 민주주의가 작동되는 상황에서 인정투쟁을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헤겔의 인정투쟁은 파시즘적인 생사를 건 투쟁을 넘어서서 지배자를 변혁시키고 인정해주는 민주주의 사회를 지향한다. 코제브가 암시하는 사회 파시즘적 투쟁 (스탈린)과는 거리가 멀다. 자유의 진보를 향한 여정에서 인정투쟁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다양한 스펙트럼과 형식을 띈다.

헤겔과 역사의 종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코제브의 헤겔 해석을 소개하면서 성급하게 역사의 종언을 돌출했다. 헤겔에게서 철학은 시대의 문제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사변은 없다.

역사의 종언은 인정원리가 완성된 상태를 말하며, 자유의 진보를 통해 역사를 향해 새로운 전망으로 열려있다. 그러나 후쿠야마는 종언되었다고 말한다. 후쿠야마는 니체적인 의미에서 마지막 인간(부르주와적으로 평준화된 인간)을 헤겔의 인정욕구와 동일시했다. 귀족주의자 니체는 영원회귀, 권력의지 그리고 초인의 출현을 위해 이러한 마지막 민주주의적 인간에 대한 경멸을 표시했다.

후쿠야마와는 달리, 헤겔은 인정을 절대지에서 파악하면서, 역사는 자본주의적으로 종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가 새롭게 출현한다고 본다. 헤겔에서 종언은 이전 시대의 철학과의 파열을 의미하지 역사의 종언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개념적으로 시대의 문제를 파악하는 리얼리스트였다. 그는 사실주의 철학자로서 <법철학>에서 말한다: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기존질서(현실적인 것)는 이성의 원리에 따라 구성 되어야 한다. 이것은 자유의 진보를 통해 역사에서 인정원리를 향해 나간다.”

그러나 니체는 인정욕구가 실현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인간의 다름이 동질화 되어버리는 것을 보았고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역겨워했다. 니체의 근대적 인간에 대한 역겨움과 피로감은 헤겔의 말하는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인정을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와는 전혀 다르다. 니체가 귀족적이고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혹독한 비판가였다면, 헤겔은 시민사회에서 일어나는 노동의 착취와 경제적인 위기를 잘 알고 있었고, 이러한 적대감정의 사회를 넘어가는 하위 계급으로부터의 혁명을 그리고 있었다.

코제브가 노예가 주인을 타도해서 미래가 새로운 인정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보는 지점에서 후쿠야마는 소련의 몰락을 보면서 존 로크적인 의미에서 자유 민주주의 이념의 승리를 선언하고 역사는 종언되었다고 성급한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어설픈 독법은 헤겔의 변증법 이론이 아니라 로크의 정치이론에 더 많은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종언되는 사회는 부패하고 변질된다. 후쿠야마가 그토록 옹호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지금 우쿠라이나 전쟁에서 종언을 고하고 있다.

언어의 모방욕구와 해방

헤겔의 자유의 진보는 미래를 향한 역사를 닫아놓지 않는다. 파농은 자유의 진보에서 백인과 투쟁하는 흑인의 정체성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검은피부, 하얀가면》에서 파농은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를 인용하면서 개인의 세계는 언어로 표현되지만, 그것은 육체에서 길을 잃어버린 신처럼 보인다고 쓴다. 언어는 피부의 색깔에 의존된 권력의 도구이며 문화적 편견 이다. 하얀 피부의 프랑스인들의 언어를 흑인들은 배우고 싶어하고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벗겨내려고 한다. 신은 피부색갈과 인종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헤겔의 인정철학에서 파농은 언어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파농에 따르면, 아프리카에서 진정한 혁명은 서구의 사회와는 달리 산업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들을 통해 오며, 문화혁명의 주체로 드러난다. 파농은 인정투쟁을 마르크스적인 노동자의 계급투쟁이 아니라 광범위한 계층 에서 드러나는 억압된 농민들과 인종차별 그리고 문화에서 보았고 혁명의 정신분석학을 시도했다.

프랑스로부터 독립 후 파농은 알제리 임시정부를 위해 가나의 대사로 일을 했다. 백혈병 진단을 받은 후 그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의 집필에 몰두했고, 식민주의 조건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해에 사르트르에 의해 출간되었다. 1961년 12월 파농은 암으로 인해 미국 메릴랜드의 국립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은 알제리로 돌아갔고 알제리 민족해방군의 영접을 받으며 안장되었다.

파농이 제기하는 문제들

파농에 의하면, 폭력과 백인 정체성은 식민지 주권의 기초를 놓으며, 그 예속의 과정은 급진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의 실천으로 응답된다. 식민지를 형성하는 것은 테러정치이며, 권력 은 식민지 백성을 정복의 기획으로 통합시킨다. 이러한 잔인한 영역에서 권력은 살해정치학 으로 등장한다. 적수를 일차적으로 선정하고 살해하는 것을 주요목표로 삼는다.

살해의 정치는 노예와 인정의 투쟁에서 지배계급이 행사하는 국가권력이며, 죽음이 중심으로 들어온다. 이것은 위로부터의 지배계급의 투쟁을 말한다. 여기서 노동과 언어가 더 이상 매개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점이 출현하고, 식민지배는 마니교적인 이분법으로 사회를 갈라놓는다.

헤겔에게서 인정투쟁은 노동과 비판적 담론으로 매개된다. 노예는 생존하기 위해 주인을 위해 노동하고 상품을 만들어낸다. 주인은 노예노동을 향유하지만 결국 노동능력을 상실하고 노예의 산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사물을 둘러싼 사회질서에서 노동하는 자가 최후의 승자가 되지 노동을 향유하는 왕이나 귀족은 타도될 수 밖에 없다.

물론 노예개념을 단순히 흑인노예로 좁혀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시대와 역사에 따라 지배자와 예속된 자의 사회 변증법을 파악하는 기초 이론에 속한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며 지배와 예속의 변증법은 긴장, 대립, 부정 그리고 지양의 절차를 통해 폭넓은 역사 적인 스펙트럼에서 나타날 수 있다. 언어나 비판적 담론은 사회적 삶의 자리안에 설정된다.

헤겔은 투쟁을 통해 권력의 이동이나 신분의 자리바꿈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보편성과 더불어 매개를 통해 사유한 사람이고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계기들은 오로지 보편성과의 연관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철학적으로 시스템적 사고를 보여 준다. 보편과 매개되는 구체나 개별적 계기는 그 정체성이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의 회복과 인정을 향해 고양이 된다. 새롭게 등장하는 보편성은 단순한 개별들의 종합이 아니라, 변증법적 작용과 운동과정을 통해 개별적인 것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차원의 시스템과 환경으로 드러난다.

헤겔의 인정 시스템에서 혁명 이후 나타나는 집단적 이기주의나 폭력 그리고 테러정치는 봉쇄된다. 개별적인 계기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이라는 측면에서 보편성이 시스템, 환경, 문화로 인식의 과정에 관여한다. 이러한 새로운 의식을 가진 고결한 자들은 노동을 향유 하는 게으른 귀족이나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을 하는 예속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덕목이 된다. 노동이 인간의 삶을 고결하고 도덕적으로 만든다. 노동은 착취되거나 소외가 되어서는 안되며, 이것을 국가는 공공선의 윤리적 차원에서 보증해 주어야 한다. 비판적 지식인들은 저항의 담론을 만들어 내고 불의에 대한 파레시아의 실천을 한다.

생사를 건 투쟁을 하지만 폭력을 지양하는 용서와 인정이 알제리 상황에서 헤겔처럼 가능한가? 흑인은 백인 주인에게서 무엇을 원하는가? 이러한 모방 욕구는 흑인을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인 현실에서 열등감을 산출한다. 파농은 흑인들의 심리학적 억압에서 출발하지만 흑인여성들에 대한 별다른 주목이 없다. 페미니스트들은 파농의 식민지배 조건에서 살아가는 흑인 여성들에 대한 파농의 약점에 불만을 표현할 것이다.

노예와 인종차별 그리고 노동을 통한 자본축적은 식민주의와 제국의 팽창의 조건이다. 인종차별은 사회 문화적 구성에 기입이 되고, 다양한 영역에서 생산과 재생산의 메커니즘을 통해 계층화가 된다. 노동도 사회적으로 분화된다. 프랑스 식민주의는 문명선교로 특징된다. 이것은 흑인을 프랑스 문화적 기준과 가치에 순응시키는 것이다. 예속된 자들에 대한 편견은 종교적으로, 경제적으로 심지어 정치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런 점에서 파농은 헤겔의 제자이지만 헤겔의 한계를 넘어서서 흑인 정체성(네그리테)을 폭넓은 스펙트럼에서 인정정치를 위해 문화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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