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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목적지를 향하여어디로 가시나이까(요한복음 16:4-6)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3.03.05 05:30
▲ Annibale Carracci, 「Domine quo vadis?」(c.1601) ⓒWikipedia
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들어가는 말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절 둘째 주일입니다. 사순절 기간 중에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시기 바라며,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저희는 올해 들어서 두 달 동안 계속해서 하나님의 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복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복에 관한 말씀은 계속해서 나눠볼 생각입니다. 저 역시도 지금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복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사순절 기간에, 너무 복에 관한 말씀만을 드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주일에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요한복음에는 최후의 만찬 이후 공관복음에 나타나지 않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4-17장의 말씀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16장까지 예수님의 말씀이 나타나고 17장은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17장에 나타난 기도문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겟세마네 기도와는 다릅니다.

요한복음 14-17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은 아마도 단편적인 예수님의 말씀을 요한복음이 확장시켜 놓은 결과물일 것입니다. 이 말씀들에는 그리스도교 박해의 상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타난 2절의 말씀만 봐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출교할 뿐 아니라’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헬라어로는 ‘회당에서 쫓겨난다(ἀποσυνάγωγος, 아포쉬나고고스)’고 되어 있습니다. 회당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유대교에서 출교되었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기에 이렇게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너희를 죽이는 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죽임을 당하는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여기며 박해한다고 말합니다. 즉 박해의 가해자는 유대교인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들은 유대교에 의한 박해의 순간을 겪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독려하기 위해 작성한 말씀이며, 공동체 구성원들은 이 말씀들을 통해서 위로를 얻고 신앙을 지켜갔을 것입니다. 또 자신들의 시대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확장시켜 놓았기 때문에 요한복음 공동체의 신학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16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실족한다는 말은 ‘걸려 넘어지다(σκανδαλίζω, 아칸달리쪼)’인데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박해라는 어렵고 힘든 순간에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을 포기하는 일은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로마의 법률가이자 작가인 ‘플리니(Gaius Plinius Caecilius Secundus, 61 – c. 113)’는 그의 편지에서 “주후 92년경에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합니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신앙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탓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신앙이냐 목숨이냐를 놓고 저울질 했을 때, 많은 이들은 목숨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런 성도들을 향해 신앙을 굳게 붙들라고 말합니다.

이에 관한 말씀은 20절 이후에 잘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로 인해 곡하고 애통할 때 세상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기뻐합니다. 예수님을 처형한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에서 설명한 바와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는 멸망하는 이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지만, 구원받은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도 바울의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부활을 이루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 근심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앞선 요한복음의 본문과 모순된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을 나눈 후에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여쭤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네가 따라올 수 없다.”라고 대답하시며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14장에서 예수님의 긴 고별말씀이 시작되었을 때, 이번에는 도마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은 어찌 알겠습니까?” 이때 예수님께서 우리가 외우고 있는 말씀을 도마에게 들려주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제자 중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두 명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는지’를 질문했습니다. 자신들은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 중에 이 질문을 하는 이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질문은 요한복음에서보다 소설이자 영화로도 나왔던 ‘쿼바디스’로 인해 우리에게 익숙할지도 모릅니다. ‘쿼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라는 라틴어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의미입니다.

이 질문은 요한복음의 본문보다 위경 중 하나인 베드로행전에 나온 표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에서 그리스도교 박해가 심해지자 베드로는 성도들과 함께 피난길에 오릅니다. 피난을 가던 중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게되는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걸어온 길 반대로 로마를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러 로마로 간다.”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다시 로마로 돌아가 순교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과 요한복음의 앞선 본문은 모순된 내용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목적지, 아버지께 돌아간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신 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보다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실제적인 목적지는 귀로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 목적지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자신들 앞에 놓인 현실이라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박해의 순간에 놓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의해 근심에 빠져 있습니다. 이들의 눈에는 자신들이 어디로 향해 가야할지, 현실적인 길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가겠다고 말씀하셨던 그 길이 어디인지, 예수님의 진정한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길을 걸은 후에 도착하게 될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고난의 길을 거부했기에 결국 목적지를 볼 수 없었습니다. 또 박해 받던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의 고난 속에서 그 길 위의 아픔으로 인해 목적지를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고난의 길만을 바라보는 삶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무도 묻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고난의 삶, 고난의 길만을 바라보았을 뿐, 그 뒤에 맞이하게 될 기쁨의 순간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은 바라보지 못하고 현재의 고난만을 보며 슬퍼하고 있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최종 목표는 분명 천국에서의 영원한 안식일 것입니다. 언젠가 삶을 마치게 되었을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곳에서 영원한 평안을 누리길 바라며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목표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박해 중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말씀이라면, 죽음 이후의 세상만을 이야기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요한복음은 죽음을 강요하는, 순교를 강요하는 책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현실에서의 고난에 매몰되어 그 고난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걷고 있는 길, 어렵고 힘들고 아픔이 있는 이 순간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기쁨의 순간을 바라볼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진정한 최종 목적지인 기쁨의 순간을 바라보고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나서 살게 되거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결국 약속하신 그 기쁨의 순간을 누릴 수도 없게 됩니다.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에 아무런 고난이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의 고난을 직접 체험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고난의 길 끝에는 분명 참된 기쁨의 순간을 누리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목적지의 의미를 깨닫고 마음에 품으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 또한 여기에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순간 이후에 참된 기쁨의 때가 온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참된 목적지를 바라보며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기쁨을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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