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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계산, 하지 말아야 할 계산앉아서 헤아려 봅시다(눅14:25-35, 삼하24:18-25, 행4:32-5:11)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3.13 22:56
▲ 예수를 따른다는 것인 반드시 그 값이 뒤따른다. ⓒGetty Image

1.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흔히 3년이라고 말하는데요, 그 3년을 보면, 예수님은 처음에 갈릴리를 중심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전도하시다가,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말씀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앞 두고 있는 마지막 시간의 한 장면입니다. 12제자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닙니다.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주십니다. 무식하고 못난 사람들도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비유의 말씀으로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병든 사람, 아픈 사람 고쳐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라고 하면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리’라고 하니까 그럴듯해 보이고, 대단해 보이는데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몸으로 보여주신 것처럼 아픈 사람, 병든 사람 돌봐주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가난한 사람, 못 먹는 사람 먹게 해 주는 겁니다. 강도 만난 사람 살려주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강도가 되지 않는 겁니다. 강도처럼 살지 않는 겁니다.

아프고 병든 것이 몸뚱아리 뿐이겠습니까? 마음도 아프고 병들지요. 영혼도 아프고 병들지요. 그렇게 병들고 아픈 마음과 영혼을 돌봐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지요.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아프고 병든 마음을 돌봐주시면서 길을 가시다가, 문득 돌아서서 말씀하십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뒤를 졸졸 따라갑니다. 오늘은 무슨 일을 하실까? 어떤 대단한 일을, 기적을 일으키실까? 오병이어 기적으로 우리를 먹이실까? 하면서 기대하고 들떠서 따라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문득 발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뒤돌아서시더니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신들, 나를 따라오고 있는데, 진짜로 나를 따라오려면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잘 생각하고, 잘 계산해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뒤따라오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우리에게 갑자기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존재의 중심을 찌르시죠.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성경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이 이렇게 다가와야 합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소설책을 읽듯이 아무런 긴장감 없이 술술 읽혀서는 안 됩니다.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그동안 성경쓰기도 했었고, 묵상집으로 성경묵상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탄소금식 실천을 하는데요,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익숙한 내용입니다. 방송에서 티비에서 익히 들어왔던 것들입니다. 누구라도 잘 아는 손쉬운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아무 긴장감 없이 있으면 안 됩니다. 잘 알던 것이, 별거 아니던 일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선 예수님처럼, 갑자기 나에게 생소하게 다가오고 내 중심을 찔러 내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 실천의 시간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2.

그렇게 갑자기 돌아선 예수님, 그리고는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망대를 세우려고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망대’라고 되어 있지만, 큰 탑이나 성을 말합니다. 그럴듯한 건물을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자기가 가진 비용을 잘 계산해서 거기에 맞게 설계를 하고 지어야지요. 무턱대고 주먹구구로 만들면 안 됩니다. 가진 돈은 1층짜리 건물을 세울 돈만 가지고 있으면서, 10층짜리 건물을 짓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땅 파고 뼈대를 세우고 하다가 돈이 다 떨어져서 이도 저도 못하고 망하고 말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앉아서 셈을 해봐야 합니다. 셈을 해보라는 말은 헬라어로 ‘자갈돌을 늘어 놓는다’는 말인데요, 우리식으로 하면 주판알을 튕겨본다는 뜻입니다. 주판알을 잘 튕겨겨 잘 계산해야 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임금입니다. 왕입니다. 그런데 이 왕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앞두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뛰쳐나가면 됩니까? 아니지요. 적군의 힘을 헤아려 보고, 작전도 세우고, 손자병법도 한 번 더 들춰봐야지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죠.

딴소리지만, 사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어떻게 백번을 다 이겨요? 원래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합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겁니다. 앉아서 잘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나를 헤아려 보고, 적도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아니다 싶으면 전쟁을 하면 안 됩니다. 사신을 보내서 ‘우리 싸우지 맙시다’ 하고 화친을 청해야 합니다.

이야기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잘 헤아려 보고, 잘 계산해야 합니다. 세상일도 그런데, 하물며 그리스도를 따라갈 때는 오죽할까요?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 길을 무턱대고 따라가지 말고 잘 계산하고 헤아려 보고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3.

물론입니다. 우리는 잘 계산하고 헤아려가면서 살아갑니다. 계산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잘 계산해서 탈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구약의 말씀과 신약의 말씀 속에는 계산을 너무 잘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다 하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한 계산까지 하고 나섭니다.

다윗을 봅시다. 다윗은 모세와 더불어 가장 위대한 신앙인으로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고대하던 사람들은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윗’ 하면 최고의 임금입니다.

정치적인 업적만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어리고 부족한 사람도 아닙니다. 사울 왕이 그렇게 끈질기게 쫓아다니면서 엄청난 박해를 할 때에도 아름다운 신앙으로 그 박해를 이겨내죠. 오히려 사울에게 복수하지 않고 사울을 용서하고 살려준 사람입니다. 때때로 인간적인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피눈물 나는 회개를 통해 다시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다윗이 오늘 한 가지 계산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구조사입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를 합니다. ‘내 백성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보자’ 하고 사람 머릿수를 센 겁니다.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은 우리나라로 치면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라는 말입니다. 온 땅을 샅샅이 조사했다는 말입니다.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국민들이 몇 명이냐를 센 것이 아니라, 군대를 점호하고 군사력을 측량한 것입니다. 또한 세금을 부과하는 기준을 만들어서 나라의 재산을 늘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당연히 나라에서 해야 하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된 일입니다.

아까 전쟁하는 왕 이야기했잖아요. 잘 헤아려 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왜 헤아리면 안 됩니까? 그냥 일반적인 왕하고 이스라엘의 왕은 다릅니다. 우리의 힘과 우리의 능력은 인간적인 조건에 있지 아니하고,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있다는 것을 믿고 따라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산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데, 다윗은 오늘 인간적인 계산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에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이 내립니다.

사도행전 말씀에도 계산 잘하는 부부가 등장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입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이 부부는 세상적인 계산법에 도통한 사람들입니다. 이때는 모든 교인들이 하나 되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자기 가진 모든 것을 내놓고 각각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 썼습니다. 이를 두고 신도의 공동생활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성경에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이 있다면, 신약성경에는 신도의 공동생활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진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자기 가진 모든 것을 팔았습니다. 그렇게 판 돈을 모두와 함께 쓰도록 내놔야 하는데, 내놓지 않고 먼저 계산을 해 본 겁니다. ‘남의 거는 다같이 나눠 쓰고, 내 거는 나만 쓰면, 어? 그러면 엄청나게 이득인데?’ 얼마나 계산을 잘 했습니까? 그렇죠? 최고의 계산법입니다. 그렇게 딴 주머니를 차고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최고의 계산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발 앞에 쓰러져 죽고 맙니다. 한마디 변명도 못 해보고, 회개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허망하게 땅에 묻히고 맙니다.

4.

오늘 말씀 속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잘 헤아려 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하는 이런 계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계산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나름 계산한다고 우쭐대고 있는데, 아닙니다. 당신들 가진 계산기 자체가 틀려먹었습니다. 계산법이 엉망입니다. 완전히 새롭게 계산하십시오.”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내 목숨을 위해 계산하지 않나요? 내 가족, 내 자식, 내 형제자매, 내 부모를 위해 계산하지 않나요? 어떻게 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어떻게 하면 내가 잘될까? 그런 계산 아닙니까? 그런 계산을 때려치우라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길은, 오히려 내 아버지 어머니를 버리고, 내 남편, 내 아내를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형제 자매를 버리는 길입니다. 그 길에서는 우리의 계산이 먹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길은, 그 길에서의 계산법은 완전히 다릅니다. 완전히 새로운 계산법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내 목숨 지켜서 만드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산 잘~ 하라는 두 비유의 끝에 예수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의 계산법에 따른 올바른 결론은 자기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26절에 ‘자기 목숨까지 미워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미워한다’는 이 말은 ‘박해한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로마제국 치하에서 교회가 박해당하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지요?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밥이 되었던 사람들을 네로 황제 이야기나, ‘벤허’ 같은 영화로도 보았습니다.

그냥 마음으로만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내 목숨을, 내 삶을, 내 욕심을, 내 교만함을, 내가 스스로 박해하는 것입니다. 억누르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끊어내는 것입니다.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 사순절에 탄소금식하고 있는데요. 잘 실천하고 계십니까? 이 탄소 금식이 실제로 해보면, 쉬운 일인데 잘 되지 않습니다. 별거 아닌 일인데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쉬운데 안 되요. 왜 그럴까요?

문제는 그 실천이 어렵냐 쉽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를 죽이느냐 죽이지 못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나를 죽이려는 마음의 결단과 각오가 없으니까, 쉬운데도 안 되는 겁니다. 내가 불편해지려는 각오가 없으니까, 쉬운데도 잘 못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들 말합니다. ‘야, 이거 별거 아닌데, 막상 하려면 잘 안 되네. 그렇지? 원래 이렇게 별거 아닌 게 그래~’

무슨 소립니까? 원래 그렇다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별거 아닌 게 원래 그런 게 아니라, 별거 아닌 것조차 포기하지 못하고, 별거 아닌 것조차 내려놓지 못하고, 별거 아닌 것조차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지 못하는 겁니다. 내 신앙의 상태가 지금 그 모양인 겁니다. 그걸 깨달아야 합니다. 원래 그런게 절대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이 말은요. 그냥 짐보따리 짊어지듯이 등에 걸친다는 말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내 몸에 예수님의 흔적, 그 상처 자국을 지니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예수님처럼 똑같은 상처 자국이 있다는 것이 아니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셨던 그 상처, 바로 그 사랑, 그것을 내 몸에 모셨다는 말입니다. 훈장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며 자랑스러워하면서, 그 상처를 매일매일 바라보면서 복음의 길을 다짐하고 결단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바스타조’라는 말인데, 이 말은 ‘영접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힘들고 무거운 짐짝처럼 생각하고 억지로 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싫지만 ‘이거 짊어지면 복을 받는다니까 눈 딱 감고 한번 짊어지지 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영접하는 것입니다. 감히 내가 소유할 수 없고, 감히 내가 맡을 수도 없고, 감히 내가 근처에도 갈 수 없는 그런 고귀하고 거룩한 것을, 주님의 은혜로 내 삶 속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탄소금식 하는 거 별거 아닌데 잘 안되네?’ 할 것이 아닙니다. 소중하고 고귀하게 거룩하게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이 작은 일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생각으로 대해야 합니다. 탄소금식 뿐입니까?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명령이 그렇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감히 감사하게 영접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살아가는 내 모습을 다시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계산해 봐야 합니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십자가를 지려 하는가? 십자가를 진다고 감히 말하고 있는가? 짐짝처럼 짊어지려고 하는가? 아니면 감사함으로 영접하고 있는가? 나는 내 목숨에 휘둘려가면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내 목숨을 박해하면서까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결단하고 있는가? 그 결단을 실행하기 위해서 내 삶 속에서 목숨처럼 지켜왔던 것들 버릴 수 있는가? 하나님의 귀하고 소중한 일들을 나는 손쉽고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았던가?

소금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길거리에 던져지고 짓밟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좋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그 할 일을 하지 못하면 내던져져 짓밟히게 됩니다.

맛을 잃었다는 것은, 원래 그 맛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맛이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자의 귀한 맛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잃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잃지 않으려면, 잃어버려도 무방한 것을 버려야 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5.

지난 주간 3.1절을 보냈습니다. 3.1절은 우리 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특별한 사건입니다. 백여년 전 이날,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이 많았는데요, 그들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를 차지합니다. 헛된 세상적인 계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의로운 세상에 대한 계산, 그 참된 계산의 결과 목숨까지도 초개와 같이 버린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만세운동의 선봉에 섰던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오늘 우리는 깊은 기도 속에 잠잠히 앉아서 바로 그 계산을 해내야 합니다. 그 계산의 끝에 주님의 십자가 나도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참된 제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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