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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라!(삿 16:28-31 빌 3:1-11 막 14:43-50)사순절 넷째 주일/총회순교자기념주일(3월19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3.17 02:38

1. 어떻게 예수님은 잡혀가는가?

지난주에 우리는 예수님의 적대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적대자들에게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며 그들과는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도 역시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등장합니다. 같은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을 잡아들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를 매수하여 예수님을 잡으러 옵니다. 이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갑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안과 밖의 배신자와 적대자들에 의해 잡혀갑니다. 끌려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처형을 당합니다.

오늘은 총회순교자기념주일인데, 어떻게 보면 오늘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첫 순교자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을 파괴하는 사람들을 ‘개’라고 부르며,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라고 권면합니다. 결국 구약 말씀 사사기를 보면, 사사 삼손은 이러한 행악하는 개들을 싹 쓸어 버립니다. 지난주 말씀 여호수아서에, 내부와 외부의 적대자인 아간과 아이성을 무너뜨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파송한 무리가 검과 몽치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이때 예수님 제자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폭력적으로 대항합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가버립니다. 말씀을 볼까요?

▲ 바르나 다 시에나 <유대의 배반>(1350-1355)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막 14:43-46)

예수를 파는 자는 가룟 유다죠? 유다는 군호(軍號), 곧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자들과 신호를 짭니다.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사탄과 마귀는 이렇게 이중적으로 다가옵니다. 속으로는 흉계를 갖고 있으나 겉으로는 웃으며 좋게 다가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막 14:47-49)

아마도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 중 한 명인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렸나 봅니다. 요한복음은 그 제자가 베드로이고 종은 말고라고 전합니다(요 18:10).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겠다(요 18:1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 일은 성경을 이루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이사야 말씀을 찾아볼까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바로 이사야서의 예언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찔림과 상함은 결국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 의미를 모르는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막 14:50)”갑니다.

앞서 오늘은 총회순교자기념주일이라고 말씀드렸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세상의 박해를 받고 순교한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처럼 많은 순교자가 안과 밖의 배신자와 적대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만 순교를 당할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사는 가장 건강한 체제인 민주주의도 순교를 당하고 있습니다.

2.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민주주의 연구의 권위자인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트럼프 당선 직후,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의 민주주의조차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닫고 전 세계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매우 유사한 패턴으로 무너졌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어크로스, 2018)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민주주의는 세 가지 유사한 방식으로 무너진다!”

▲ 레비츠키 & 지블랫,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유대교를 내적으로 쇄신하지 못하고, 예수님과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고 적으로 간주하며 무지한 유대 백성들을 오도한 이 세 가지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듯이, 민주주의도 이렇게 세 가지 방식으로 무너집니다. 그렇다면 그 세 가지 방식은 무엇일까요?

첫째 ‘후보를 가려내는 역할을 내던진 정당’, 둘째 ‘경쟁자를 적으로 간주하는 정치인’, 셋째 ‘언론을 공격하는 선출된 지도자’ 등입니다. 이 3가지가 민주주의 붕괴 조짐을 알리는 명백한 신호라는 것입니다. 먼저 ‘후보를 가려내는 역할을 내던진 정당’을 살펴볼까요? 레비츠키&지블랫은 이렇게 말합니다.

“프라이머리(primary,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를 선출하는 예비 경선의 한 방식으로 등록된 당원만 참여할 수 있는 코커스(caucus)와 달리, 당원이 아니라도 참여할 수 있다)는 분명하게도 더욱 민주적인 방식이었다. 그런데 혹시 ‘지나치게’ 민주적인 방식은 아닐까? 대선 후보 지명을 오로지 투표자의 손에 맡겨둠으로써 구속력 있는 프라이머리는 정당의 문지기 역할을 약화했고, 동료에 대한 평가 절차를 생략함으로써 아웃사이더에 문을 열어놓았다.”

사람들은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 때문에 새로운 인물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검증되지 않은 아웃사이더는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의 붕괴를 이끌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증하지 않은 이에게 권력을 맡겼을 때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을 당하며, 또 역사는 얼마나 많이 후퇴하는지요!

둘째 ‘경쟁자를 적으로 간주하는 정치인’도 민주주의를 붕괴로 이끕니다. 레비츠키&지블랫에 의하면 상대를 권력 경쟁에서 퇴출하려는 모든 의도는 민주주의의 붕괴라는 것입니다. 물론 적폐 세력을 몰아내야 하겠지만, 의미 있는 의견입니다. 레비츠키&지블랫 이렇게 말합니다.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는 밀접하게 얽혀 있다. 이 둘은 때로 서로를 강화한다. 정치인이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받아들일 때 그들은 자제의 규범도 기꺼이 실천하려 든다. 또한 경쟁자를 위협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 정치인은 상대를 권력 경쟁에서 퇴출하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자제 규범의 실천(가령 민주당 대통령이 제시한 연방대법원 판사 임명안을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이 통과시킨 것처럼)은 스스로 관용적인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줌으로써 선순환을 이뤄낸다.”

마지막으로 ‘언론을 공격하는 선출된 지도자’도 민주주의의 붕괴를 알립니다. 레비츠키&지블랫은 이렇게 말합니다.

“독재 정권은 종종 명예훼손이나 모욕죄 혐의로 소송을 함으로써 반정부 성향이 강한 언론을 ‘합법적으로’ 경기에 뛰지 못하게 막는다. 에콰도르 대통령 라파엘 코레아는 이러한 기술에 특히 능했다. 2011년 코레아는 주요 일간지 〈엘 우니베르소>(El Universo)가 자신을 ‘독재자’라고 칭한 사설을 게재한 것에 대해 4천만 달러의 명예훼손 소송을 걸었고, 승소했다.”

우리 언론은 ‘기레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가짜 뉴스를 남발하는 이러한 불의한 언론도 개혁하지 말고 내버려 둬야 할까요? 만약 언론을 개혁한다면 이러한 개혁은 또 군부독재 때 언론을 길들인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참, 쉽지 않습니다.

아무튼 결론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듯이, “잘 설계된 헌법이 민주주의를 지킨다?”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레비츠키 & 지블랫의 답은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제도가 아닌 규범이다!” 그렇습니다. 지금 민주주의의 위기는 법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규범, 곧 윤리와 도덕이 붕괴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레비츠키 & 지블랫은 이렇게 말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민주주의 제도를 직접적으로 허물어뜨리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의 규범 파괴는 분명히 그러한 일을 했다. 취임 후 이어지는 트럼프의 규범 파괴는 미국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대통령의 행동 범위를 넓히고 있다. 거짓말과 속임수, 탄압 등 예전에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겨졌던 행동들이 점차 정치인의 전술적 공구함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거짓말과 속임수, 탄압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으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진정한 민주주의는 “법대로 합시다!”라는 법치주의가 판치는 세상이 아니라,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 곧 관용과 절제의 미덕으로 이뤄집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윤리와 도덕이 없는 이들을, 또한 관용과 절제의 미덕이 없는 이들을 개와 행악자들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3.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라!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κατατομήν)을 삼가라.”(빌 3:1-2)

물론 이 말은 바울이 마케도니아 지역인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유대인인 ‘할례파 그리스도인(손할례당이라고 합니다)’을 주의하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보통 할례를 말할 때는 헬라어 페리토메(περιτομή)(1)라는 말을 쓰지만, 여기서 바울은 카타토메(절단하다), 곧 단순히 몸을 해한다는 말을 써서 순수한 할례인 페리토메와 구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손할례당은 할례의 깊은 뜻과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살을 베는 것만 중시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이를 ‘형식적인 할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식과 형식에만 치우치고 본질을 잃어버린 율법주의자들, 곧 할례파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이들 할례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바울은 할례 자체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할례파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할례를 추가한 것입니다. 물론 할례파 그리스도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여기에 할례와 율법을 첨가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인정하듯, 부정하는 것으로 복음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들을 개라고 부른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자체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에 ‘순’을 더하거나, 혹은 뭔가를 더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바로 할례요, 율법입니다. 결국 ‘오직 예수’에 뭔가를 덧붙이거나, ‘오직 말씀’에 다른 어떤 것을 더하고자 하면, 이것은 예수님 대신 다른 어떤 것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앞서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이유는 윤리와 도덕, 관용과 절제의 미덕이 없어 무너졌다고 했는데, 동시에 민주주의에 다른 무엇을 자꾸 첨가하면 그 또한 민주주의의 위기입니다. 사실 민주주의는 백성(民)이 주인(主)인데, 여기에 백성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주인이 되려고 하면 그것이 민주주의의 위기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3-6)

진정한 할례파는 바로 나다! 나야말로 율법의 의로는 흠 없는 온전한 할례파요, 온전한 히브리인이다. 그러니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의 할례와 율법을 의지하지 아니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오직 예수’입니다. 따라서 예수 이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라는 말은 예수님의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비록 적대자들이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지만 부활의 산 소망으로 믿음을 가지고 싸워 이겨나가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그리고 이 싸움의 모습을 구약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 삼손이 파란만장하게 보여줍니다. 말씀을 볼까요?

4. 주 여호와여, 나를 생각하시고,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옵소서!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삿 16:28-30)

▲ 포도원에서 사자를 찢어 죽이는 삼손과 그의 최후

오늘 이 말씀의 배경은 이스라엘 민족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약 40년 동안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블레셋은 군사력이 강하여 가끔 이스라엘 민족에게 찾아와 물건을 빼앗고 탈취를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삼손을 보내십니다. 삼손이라는 뜻은 ‘강한 자’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삼손은 장사였습니다. 엄청난 힘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이러한 힘을 엉뚱한 데 소모하고, 또 이방 여인인 드릴라(‘속임과 모략에 능한 여인’이라는 뜻)의 유혹에 넘어가 힘의 근원인 머리를 다 깎여버리고 블레셋의 포로가 됩니다. 한마디로 초라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블레셋 사람들은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붙였다”라고 말하며 다곤 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있는 “삼손을 불러서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라고 말하며 “저자가 정말 사자를 찢던 자인가? 여우 삼백 마리에 꼬리를 묶어서 불을 지른 자인가? 나귀 턱뼈로 천명을 물리친 자인가?” 하면서 삼손을 비웃습니다. 이렇게 잔치가 절정에 이를 때, 삼손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잔치에 참여한 모든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가 죽을 때 적대자를 죽인 것이 그가 살았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삿 16:31)

삼손은 비록 한때, 어리석어서 잘못된 길로 나갔으나, 이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마지막 불꽃을 태워 행악자들을 물리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수난받으시는 이 사순절기에 지금 행악자와 개들이 판을 쳐,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에 것을 덧붙여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삼손과 같은 순교자의 마음으로 예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죽음의 길이지만 그 길 끝에는 영광된 부활의 아침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오늘도 진실한 말과 상대에 대한 배려와 공감의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미주

(1) 할례는 히브리말로 ‘브릿트 밀라’입니다. ‘브릿트’는 ‘계약(언약)’이란 뜻이고 ‘밀라’는 할례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할례’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헬라어로는 ‘페리토메’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의 ‘circumcision’은 ‘cut around’의 뜻을 가진 라틴어 ‘키르쿰키시오(circumcisio)’에서 온 말로 영어와 라틴어는 ‘언약’의 의미가 빠져 있습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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