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박해 속에 품은 희망과 신앙마태가 전하는 고난(마태복음 27:45-50)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3.03.19 04:49
▲ Eugene Thirion, 「Triumph of faith」 (19th) ⓒWikipedia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들어가는 말

사순절 넷째 주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시며,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우리의 삶에서 실천하시는 사순절 기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부터 하나의 흐름이 이어집니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과는 다른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이야기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많은 사람이 옷과 종려나무잎을 나귀 앞에 깔면서 호산나를 외쳤다고 말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예루살렘 주민들이 환영하면서 호산나를 연호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을 향했던 로마 병사들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분위기가 약간 다릅니다. 마태복음에서 호산나를 외친 것은 예루살렘 주민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스스로 겉옷을 깔고 호산나를 외치며 예루살렘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본 예루살렘 주민들은 함께 예수님을 맞이하기보다는 오히려 “저건 뭐지?”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며 소동한 것이 아니라 이 시끄러운 행렬을 바라보며 소동했다고 말합니다.

이 모습은 이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과 극단적 대조를 보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이분이 우리의 왕이시다’ 외치며 따랐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신 이후 모두 도망쳐버렸고 예수님 곁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나마 여성들만이 멀리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가 붙어있었고 로마의 군인들과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들어오셨을 때, “저건 뭐지?” 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모여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첫 장부터 예수님을 다윗의 계보를 잇는 왕으로 그리고 있는데, 마지막 십자가 사건에 가서는 기막힌 반전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기다리던 왕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대답이면서 유대인들, 초기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왕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뒤집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모습의 왕, 구세주를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한동안 복에 관한 말씀을 전해드렸으나, 사순절 기간이기 때문에 오늘 저희는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십자가 사건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아닌 마태복음이 어떤 신앙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초대교회의 박해 상황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가진 생각들은 대부분 사도 바울의 편지에 적힌 내용들입니다. 은혜의 십자가, 사랑의 십자가, 대속의 십자가, 이러한 개념들은 대부분 사도 바울이 전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십자가 사건과 복음서의 십자가 사건은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적던 시기와 복음서가 작성된 시기의 시대적 상황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40년대, 50년대에는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에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리스도를 향한 박해는 유대교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분쟁도 예루살렘 내에서는 크게 발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밖에서 살아가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도행전에 ‘헬라파’라 불리는 유대교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그 예입니다.

이러한 분쟁과 박해는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의 갈등 속에서 확장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그리스도교의 존재가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박해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들의 박해는 지속적이거나 전방위적으로 일어나지 않았고 국지적인 박해가 진행될 뿐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내부에서는 로마라는 공통의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 크게 박해가 일어난 것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서가 쓰여지던 70년대 이후는 상황이 완전히 다릅니다. 37년 이후로 로마 황제 칼리굴라의 신상이 예루살렘 성전에 세워지게 되었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유대인들에 의한 반란이 지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이후 66년 가이사랴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봉기가 일어났고, 이는 유대-로마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70년에 함락되고 맙니다.

복음서는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기록되었는데,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 그리스도교인들에게 큰 위기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네로에 의한 박해가 그것입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네로가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대화재의 범인으로 몰아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했다고 말합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짐승의 털을 뒤집어쓰고 개에게 찢겨 죽거나, 십자가에 달려 죽거나 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최근에는 네로가 그리스도인들을 대화재의 범인으로 지목하지는 않았고 이는 타키투스의 오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타키투스의 기록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죄목를 ‘인류 혐오죄(odio humani generis)’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행해지던 성찬 예식은 사람의 몸을 먹는 식인 문화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이 점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의해 박해를 받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에 관해 선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교리는 로마가 가장 거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릴 적에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순간에 제자들은 모두 도망쳐 버렸고, 베드로조차 예수님을 부인하며 도망쳤는데, 예수님께서 처형 당하시는 과정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처형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이 내용이 전해졌을 수도 있겠지만, 더 쉬운 답을 도출할 수도 있습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 그리고 당시의 유대인들이 흔히 겪는 상황이었기에 너무도 쉽게 이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는 단지 예수님의 수난이 아닙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이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히 자신들이 앞으로 당하게 될지도 모를 자신들의 고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는 더욱 처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들과 함께하던 성도들이 당했고, 또 자신들 중 누군가가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고통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처절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로마의 군인들에 의해 조롱을 받습니다. 실제 네로는 그리스도인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처형했습니다. 27장 27-31절의 말씀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조롱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립니다. 그 후에는 같은 유대인들에 의해 조롱을 받게 됩니다.

39절에서부터 오늘 본문까지는 모두 유대인들에 의한 조롱이 나타납니다. 로마인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놀리며 유대인 전체를 조롱하고 있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들을 조롱합니다. 성전을 사흘만에 다시 세우리라는 말씀, 즉 부활의 신앙을 조롱합니다. 예수님의 구원 역사를 조롱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외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말씀은 시편 22편 1절의 말씀을 아람어로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처절한 외침조차도 유대인들에 의해서 조롱당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저가 엘리야를 찾는다고 조롱합니다. 이 사람들이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몰라서 이렇게 조롱한 것이 아니라 ‘엘리야’라는 인물이 구약성경의 마지막 말라기에서 하나님께서 심판 때에 보내리라고 말씀하신 인물이기 때문에 이렇게 조롱하는 것입니다.

“네가 구원을 이룬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는데, 그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엘리야가 와야 할 것 아니냐?” “너희들이 십자가에 달려서야 엘리야를 찾는구나” 하고 조롱한 것입니다. 이 조롱은 재림과 종말을 선포했던 초대 교회를 향한 조롱입니다.

처절함을 넘어서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향했던 이 조롱과 고난을 분명 자신들의 이야기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은 지금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고난으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조롱당하는 순간의 처절함으로 끝마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영이 육신에서 떠나시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더 이상 하나님의 거룩함이 지성소에만 머무르지 않고 성소로 나오고 성전으로 나오고 온 백성에게 전파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지금 이 순간 실현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며 무덤이 열려 죽은 자들이 부활합니다. 이 이야기는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마태복음에만 나타나는데, 부활에 대한 조롱, 성전을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예수님에 대한 조롱에 대해 반박입니다. 자신들은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신앙을 선포한 것입니다.

로마의 백부장과 군인들은 이 모습을 보며 예수님께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던 이들의 입을 빌려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도록 합니다.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이토록 처절하게 이토록 아프게 그리고 있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당하게 될 일이니까 잘 알아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고난 당할지라도, 이 고난은 하나님 구원 역사의 일부이고, 부활을 위한 밑거름이며, 만민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게 되는 초석이 될 것이라는 자신들의 고백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신 이야기는 구원의 도구인 성도들의 고백이고 다짐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에 대해 가슴 아파하거나, 이미 박해받은 성도들로 인해 마음 아파하며 처절함을 느끼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신앙을 보이기 위한 다짐이며 희망과 위로의 선포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기도 합니다. 때론 고난에 관한 찬송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마태복음은 우리에게 눈물만 흘리며 십자가 사건 앞에 서 있지 말라고 말합니다.

고통의 순간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보며 희망을 품고 굳게 일어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의 어떤 고통도 그리스도 안에서 품은 우리의 희망을 꺽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렵고 힘든 세상 속에서 마태복음이 전하는 신앙, 그리고 희망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기록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굳은 희망을 품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가 품은 희망에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