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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정(히브리서 5:1~10)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03.29 00:46

신약성서 가운데서 최고 수준의 헬라어를 구사하는 히브리서는 유대인의 전통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사 종교로서 유대교의 전통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그 청중은 헬라문화권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교와 헬라 문화권의 공통된 제사 관념을 유념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 요체는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제사장으로서 진정한 화해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의 믿음의 연장선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상식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통념을 빌어 말하되 그것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이루는 제사에 빗대어 말하지만, 유대교의 제사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의미의 제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내적 위기에 응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서도 무엇을 믿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하고 회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믿음을 역설합니다. 이 청중들은 유대교적 전통에는 익숙합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는 아직 불완전합니다. 그러기에 유대교적 상식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히브리서의 논조를 이룬 그 제사 관념에 대한 이해를 밑바탕으로 합니다. 말씀 위주의 교회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오늘 개신교인들에게 이와 같은 관념은 사실 그리 친숙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친숙하지 않으면서도 전통적 교리에 의존하여 마치 다 수용하고 있는 듯한, 다소 기괴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이해하고 있는 화해자로서 제사장의 개념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는지 그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아주 깊은 사색을 요구합니다. 특별히 구약성서의 전통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성서를 해석할 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저 문자적 의미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전승이 당대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범과도 같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본문말씀은 제사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밝히며,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제사장의 역할을 온전히 성취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제사장은 특별한 예전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백성의 사죄를 구하는 역할을 맡는 것으로 여겨집니다(5:1). 겉으로 드러나는 역할로 볼 것 같으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은 제사장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게 된 바탕으로서 그 요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5:2~4).

“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휘말려 있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는 무지한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백성을 위해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연약함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영예는 자기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얻는 것입니다.”(5:2~4)

여기서 제사장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요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백성과 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완전무결한 사람이 아니라 그 자신 역시 그릇된 길로 빠질 수 있는 연약함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심정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백성을 심판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백성 편에서 하나님께 아뢰는 역할을 맡는다는 뜻입니다.

언제든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는 사람들의 어려움과 또 어떤 곤란한 상황에 처해 겪는 고통을 스스로 공감하며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없이는 그 역할을 맡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죄의 용서를 위해 드리는 제물은 단지 백성들의 것을 대신해서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몫까지 포함됩니다. 오늘날 제사장을 자처하는 성직자들이 잘 새겨야 할 대목입니다.

그렇게 연약하고 흠이 있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그는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강조하는 의미는, 그가 특별한 자격을 갖췄다는 것 때문에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그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점 역시 오늘의 성직자들이나 성도들 모두 잘 새겨야 합니다.

▲ 연대의 근본은 공감이다. ⓒGetty Images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말씀에 이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제상의 역할을 온전히 성취하였다는 것을 역설합니다(5:1~10). 여기서는 동일한 초점이 역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제사장이 되었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고통의 탄식과 더불어 고난을 겪음으로써 순종을 배워 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시편 2:7).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임명받은 영원한 제사장이다”(시편 110:4).

전통적으로 다윗에게 적용되었던 말씀이 예수께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면, 더는 연약한 사람들과 동일화되지 않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죄와 고통에 연루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5:7)

이에 대한 부연설명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5:8)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에서 그 약함과 고통을 같이 체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순종을 배우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과 똑같은 삶을 사신 예수를 이르는 말입니다. 사실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세주라는 믿음이 형성되어 있는 조건 안에서의 해명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으로 모시는 예수께서도 배우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예수께서 진정한 제사장이 된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에게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5:9~10)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에서 고통에 공감하며 그 고통을 함께 겪은 것이 곧 제사장이 되는 길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 역시 옛 제사장들과 같은 경로를 거쳤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존재가 멜기세덱입니다(창세 14:17~24). 전설상의 예루살렘 왕 멜기세덱을 제사장의 원형으로 삼는 전승을 환기합니다. 여기서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이해하는 멜기세덱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이어지는 말씀은,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할 말이 많이 있지만, 여러분의 귀가 둔해진 까닭에 설명하기 어렵다”고 합니다(5:11).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결국 멜기세덱에 대해서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7:1) 여기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 멜기세덱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는 ‘정의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라는 것입니다(7:2).

제사장의 역할은 곧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멜기세덱이 그러했던 것처럼 옛 제사장의 본분이 그런 것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몫 또한 그런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의 전반적 맥락에서 더 중요한 진실은 어떻게 그 역할을 수행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휘말려 있으므로, 그릇된 길을 가는 무지한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여기에 그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연약함과 고통에 공감하며 연대하는 것이야말로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밑바탕이요,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는 밑바탕입니다. 그 길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옛 제사장들의 몫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몫이었고, 오늘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미국의 법철학자이자 인문학자인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은 저서 <시적 정의>(Poetic Justice)에서, 판사의 법적 판단에서 어째서 인문학적 통찰이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판사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시인은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사유를 단순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건이 갖는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복잡함에 부합하는 공정한 판단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누스바움, 177). 이것은 인간의 좌절과 고난에 귀를 기울일 때에 비로소 공정한 재판이 가능하고 정의가 가능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소설가 카프카는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체험할 수 있는 직업을 찾기 위해서 법학을 택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 신학에 해당하고, 신앙에 해당하고, 교회에 해당한다면 지나칠까요? 재난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처지, 소수자로서 억압과 배제를 일상적으로 겪는 사람들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하고 교리적 잣대를 들이대며 옳으니 그르니 하는 교회라면 그런 냉소에서 비켜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가교를 맡는 거룩한 제사장의 역할까지도 인간에 대한 온전한 이해, 그 좌절과 고통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공감 능력이 없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소용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 진실을 새길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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