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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창 26:1-11; 고전 1:18-25; 막 11:15-19)종려주일/제주4・3기념주일(4월2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3.31 00:37

1.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승리와 고난이라는 역설

▲ 장 플랑드랭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1842-1848)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부활절을 한 주 앞둔 주일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며 환영한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호산나는 “우리가 당신께 구하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으로, 기쁨과 승리, 구원의 희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종려나무 역시 그 꽃말은 ‘승리’입니다. 구원자요,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승리를 기뻐 환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려주일이 지나고 월요일부터 한 주간, 곧 부활절 전날까지를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구원과 승리의 날 이후, 고난의 날들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은 참으로 역설적인 주간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환영 이후, 사람들의 배신과 부인, 그리고 고난이 이어지니,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특별히 이번 주일은 제주 4・3기념주일인데, 예수님의 고난과 제주도민의 고난, 그리고 현재 우리 민족의 고난과 겹쳐 보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마침내 영광된 부활의 아침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제주 4・3이 진상규명을 통해 제 이름을 찾고, 지금 우리 민족의 고난도 영광된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를 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백성들이 예수님의 교훈을 듣고 놀랍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교훈은, 또한 ‘십자가의 도(道)’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지만, 실수를 범하는 이삭을 보여줍니다. 이삭은 그랄 주민들을 속여 자신의 안전을 꾀할 목적으로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이것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바로에게(창 12:10-20), 그리고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서 아비멜렉 왕에게(창 20:1-13) 두 번씩이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던 실수를 답습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따라 순종하면서도 사람은 실수하게 됩니다.

오늘은 제주4・3기념주일이라 말씀드렸는데, 제주4・3항쟁에 관해서 지금 이상한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제주4·3사건은 북한 김일성 지시로 촉발된 사건”이라는 등. 제주4·3의 역사를 왜곡하고, 제주의 비극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실 현행 4·3특별법에는 ‘누구든지 공공연하게 희생자나 유족을 비방할 목적으로 제주4·3사건에 대해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거나 단체의 명예를 훼손하면 안 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벌칙 조항이 없어서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잇따릅니다. 결국 일부 극우 인사나 유튜버들이 4·3을 비방하거나 폄훼, 사실을 호도하는 등 ‘4·3흔들기’가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난 2023년 3월 9일 국회에서 ‘제주4·3특별법 개정안’이 발의되었습니다(제주시갑 송재호 국회의원 발의). 개정안은 “제주4·3을 악의적으로 왜곡하거나 헐뜯으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한다.”라는 벌칙 규정을 담았습니다. 이렇게 벌칙 규정이 생긴다고 역사를 흔들려는 세력들은 그저 가만히 있을까요?

더 놀라운 것은 70여 년 전 제주가 아니라, 40여 년 전 광주 5・18도 광주민주화운동이 아니라, 폭도 혹은 간첩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소리도 다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광주 학살의 주범 전두환의 손자였던 전우원이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통해 전두환씨 일가가 은닉한 재산으로 호화생활을 하고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폭로하며 5・18로 희생당한 분들에게 사죄한다고 하였습니다.

이후 한국에 입국하여 5·18민주화운동 공로자회와 부상자회 등 단체 관계자들에게 “저 같은 죄인이 한국에 와서 사죄할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린다. 수사에 최대한 협조해 빨리 5·18 유가족과 피해자분들께 사과드리고 싶다.”라고 말하며 광주를 방문했습니다. 이렇게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면 계속해서 실수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삭처럼 아버지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구원과 승리를 우리에게 주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받지 못하고, 배신과 부인으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은 잘못을 하는 것입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2.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막 11:15-17)

유대교는 성전 중심 종교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백성의 죄를 성결하게 하고 죄사함을 선포합니다. 이것은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당시 유대인들은 종교 지도자들뿐 아니라, 일반백성들까지도 성전 체제를 통해 삶을 영위했습니다. 각종 제사와 절기 행사를 통해 이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상당했습니다. 따라서 성전에는 매매하는 자들이 늘 상주해 있었습니다.

▲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는 예수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시어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성전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부폐한 기득권을 완전히 폐기하시고 새로운 성전 시대를 여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새로운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런 성전 청결, 곧 새로운 종교 혁명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막 11:15-19).” 이렇게 ‘예수님의 교훈’과 ‘십자가의 도’는 종교를 통해 기생하는 종교 권력과 불의한 세력들에게는 걸림돌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십자가의 도가 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서신서 말씀인 고린도전서 말씀을 볼까요?

3.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고전 1:18-20)

말씀의 배경을 살펴볼까요? 그 당시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봐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어가다 보면 나중에 13장에 사랑장, 14장에 은사장이 나옵니다. 왜 이런 말씀이 나올까요? 사도 바울은 당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사랑이 없었기에 올바른 사랑이 무엇인지를 소개한 것입니다. 또 은사를 사용하면서 교회에 덕을 세워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며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 이들 때문에, 참된 은사에 관하여 소개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며 입술로만 하나님을 경배했다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서로 당을 짓고 분열했으며 헐뜯었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니, 자신들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했으며 ‘선비(γραμματεύς, 서기관 혹은 유대 율법학자)’요, ‘변론가(συζητητὴς)’라고 생각하며 대단해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유대 사회에서 선비나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서 변론가(수사학적 변증가)는 최상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은 “이 세상”에 속하였음을 세 번 이나 거듭해서 강조하며 하나님께서 이들을 멸하고 폐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이렇게 멸하고 폐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결국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1-25)

4. 증오심과 복수로 피로 물든 아름다움 섬, 제주!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미국 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합니다.

배경은 이렇습니다.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렸고, 제주읍에서는 북 초등학교의 3·1절 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나자 군중들은 가두시위에 나섰습니다.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쳐 서문통으로 빠져나간 뒤,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여 다쳤습니다. 이때 기마경찰이 다친 아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관덕정 부근에 포진하고 있던 무장경찰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습니다.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희생되었고,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그때까지 큰 소요가 없었던 제주 사회가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제주4·3의 도화선이라 불리는 ‘3·1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사망한 3·1사건에 항의하여 1947년 3월 10일부터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제주도민의 민·관 총파업에 미국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지목했습니다. 본토에서 응원 경찰이 대거 파견됐고, 극우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서청) 단원들이 속속 제주에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교육기관 등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빨갱이 사냥’을 한다는 구실로 테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이는 4·3사건 발발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한경직 목사, 서울 영락교회, 서북청년단기와 학살당한 제주도민

여기 서북청년회의 본거지는 예장통합 영락교회(옛 베다니 교회)입니다. 부산에도 있죠? 영락교회를 세운 한경직 목사가 서북청년 단가도 지어줬고,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협의회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군부정권에 반대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도 창립하는데 일조한 목사가 한경직입니다. 아무튼 이 영락교회에는 공산당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체로 서북지역(황해도 평안남북도)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월남 개신교인들에게 반공은 신앙과도 같았습니다. 정든 고향과 부모 형제를 떠나 아무런 의지할 곳이 없는 타향살이는 이들에게 공산당에 대한 증오심과 적대감을 심어 놓았습니다.

아무튼 4.3 발발 직후 서북청년회 회원 500여 명이 토벌대로 투입됐습니다. 서청 토벌대는 민간인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과 구타를 공공연히 자행했다. 도끼·방망이는 물론 총기와 폭탄 등도 동원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1948년 11월 9일엔 제주도청 총무국장인 김두현 씨가 서북청년단의 요구를 거절해 끌려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두들겨 맞은 후 숨지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제주도 내 한 군인은 “서북청년들은 고얀 놈들이다. 처녀를 겁탈하고, 닭도 잡아먹고, 빨갱이로 몰기도 하고, 이놈들이 사건을 악화시켰다. 주민들은 도망갈 곳이 없으니까 산으로 올라갔다.”라고 증언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이었던 서청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했는가 하면 이러한 기록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게 싱거웠는지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칼이나 창으로 찔러 죽였다. 밟아 죽이고 물에 빠트려 죽였다. 목을 잘라 죽이고 허리도 잘라 죽였다. 폭탄을 터트려 죽이고 차바퀴로 치어 죽였다. 독약을 먹여 죽이고 껍데기를 벗겨 죽였다. 굶겨 죽이고 절벽에서 떨어트려 죽였다. 구덩이를 파게 하고 생매장도 했다. 나무에 목매달아 죽이고 나무에 묶어 놓고 죽였다. 불태워 죽이기도 했다. 굴 입구에 연기를 피워 굴에 피신한 주민들을 질식사시킨 경우도 흔했다.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뺨을 때리도록 강요했다. 그러다 히히덕 거리며 총으로 쏴 죽였다. 여자를 강간한 뒤 죽이는 건 부지기수였다. 여자의 성기에 총구를 꽂기도 했다. 젊은 남녀가 성관계를 맺도록 강요하며 사살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보는 자리에서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나신으로 성관계를 맺도록 강요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낄낄거리며 총으로 난사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된 뒤, 정부는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군 병력을 증파하여 강력한 진압 작전을 펼치고, 대대적인 강경 토벌 작전이 제주 전역을 휩쓸게 됩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한 대대적인 강경 진압 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중산간지대뿐만 아니라, 소개령에 따라 해안마을로 내려간 주민들까지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폭도라 지목당하는 것만으로도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물론 학살은 서북청년단과 군경토벌대만 저지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장대들도 해안마을을 습격하여 경찰 가족과 우익인사를 살해했습니다. 그 와중에 무고한 주민들도 상당수 희생되었습니다. 이렇게 복수와 증오심으로 아름다운 제주가 피로 물든 것입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증오는 격한 충돌로 이어져 민간인들의 희생은 극에 달했습니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2만 5,000~3만 명의 주민들이 희생된 가운데,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냉전 상황과 한반도 분단체제의 고착화 과정에서 발발되고 전개된 제주4·3사건은 국가공권력에 의한 집단 희생으로 귀결되었고, 이후 반세기를 넘어 진상규명 운동의 과정을 거쳐 명예 회복을 통한 화해와 상생의 해결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를 지금 우리는 또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갈라진 남북이 서로 전쟁 준비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남도 이념적으로 양극단을 달리고 있습니다. 70년 전이나,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역사가 발전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비극을 반복하며, 같은 실수를 계속해서 저지르는 것입니다. 앞서 서두에 말씀드린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말씀을 볼까요?

5.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 이삭의 생애와 그랄의 위치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창 26:1-5)

▲ 아비멜렉 왕,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와, 이삭과 아비멜렉 왕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지만, 이제 100여 년 정도 세월이 흘러, 가나안 땅에 또 흉년이 들었습니다. 아브라함 때는 아브라함이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가버렸는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말씀하십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이곳 가나안 땅에 머물라! 그리하면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지켜 제 자손을 번성하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이삭은 애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일종의 휴게소 기능을 하는 성읍인 그랄 땅에 거주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그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창 26:6-9a)

여기 아비멜렉 왕은 아브라함 때, 그랄 왕의 이름과 같습니다.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고 속인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사라를 취하려 했던 그랄 왕 아비멜렉(창 21:22)과 이름이 같습니다. 이것은 아비멜렉이 그냥 사람 이름이 아니라, 블레셋 왕을 가리키는 공통적인 호칭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우리 민족의 ‘단군’도 한 개인이 아니라, ‘제사장’을 의미하는 이름입니다). 그 뜻은 ‘아버지는 왕이시다’라는 뜻인데, 아브라함처럼 이삭도 리브가를 자기 누이라고 블레셋 왕 아비멜렉을 속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연약함과 실수가 아들에게서 반복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아무튼 속임수가 드러나고 책망받자, 이삭은 자백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창 26:9b-11)

이삭의 이러한 자백은 비록 그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축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따라서 아비멜렉은 이삭과 아내 리브가를 범하지 않도록 배려해 줍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창 26:12-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 나오는 군중들처럼 처음에는 예수님을 환영했다가 다시 배신하고 부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삭처럼 실수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면 하나님께서 다시 그에게 복을 주십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처럼 교만하여 자신들이 지혜 있고, 총명하다고 생각하여 진리를 길을 떠나지 말고, 다시 주님께로 돌아오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품을 것입니다.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주4・3의 그 슬픈 비극의 역사를 잊지 말고, 오늘 그 역사의 비극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힘써 애쓰며 기도하며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주간이 고난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광된 부활의 아침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난의 끝이 부활의 소망인 것을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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