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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고난에 동참함(마가복음 15:21-23)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3.04.02 05:19
▲ Titian, 「Christ on the Way to Calvary」 (c.1560) ⓒWikimediaCommons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들어가는 말

이번 주일은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일주일간의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종려주일이기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만, 예루살렘 입성은 여러차례 말씀드린 적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시던 순간의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오늘 저희가 함께 살펴보려고 하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시던 때에 그 십자가를 대신 짊어졌던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단 한 절밖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그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을 제외한 공관복음서에는 모두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복음서마다 표현의 차이는 조금씩 나타나지만 분명한 점은 그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저희가 읽은 마가복음 본문이나 마태복음은 ‘억지로’ 같이 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억지로’라는 표현은 나타나지 않지만, 로마 병사들이 그를 붙들어 십자가를 지웠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타의에 의해서 끌려왔음을 알게 합니다.

그런데 아마도 여러분들께서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면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성경에 단 한 줄,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는 말만 나타나는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얘기는 어디서 나온 이야기일까요?

저희는 이런 해석이 나타나게 된 이유와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가 무엇을 전해주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

저희가 생각할 내용과는 거리가 있지만 구레네 사람 시몬에 관한 2세기 초반의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서 말씀드릴까 합니다. 초대 교부인 이레네우스가 2세기 중반에 작성한 『이단 논박』 (Against Heresies, 본래 제목은 “Ἔλεγχος καὶ ἀνατροπὴ τῆς ψευδωνύμου γνώσεως”, “소위 영지주의라 불리는 이들의 발견과 타도에 대하여”) 1권 24장을 보면 그리스도교 영지주의자인 바실리데스(Basilides)의 주장이 나타납니다.

마태의 제자로 알려진 바실리데스는 자신만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모습으로 변하셨고, 무지하고 잘못된 사람인 시몬이 예수님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렸고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며 비웃으셨다고 합니다.

거의 동시대에 활동했던 이레네우스에 의해 반박당하고 비판된 주장이기 때문에 저 내용 자체를 신경 쓸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120년 정도에 활동하던 영지주의자 바실리데스가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를 각색하고 있다는 점은 그의 이야기가 초대 교회 사이에 상당히 많이 퍼져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그가 시골에서 왔다고 적고 있는데, 이때의 헬라어 아그로스(ἀγρός)는 밭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가 밭일을 하고 돌아오던 사람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더 확장되어서 구레네(קרני, 키레나이)는 당시에 존재했던 지명이기는 하지만, 본래는 농부를 뜻하는 아람어 키르바이(קרוי)였는데, 이것이 잘못 전달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즉 본래는 “밭에서 온 농부 시몬”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의 이 본문은 안식일에 밭일을 하던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고, 안식일 율법에 관한 논쟁을 벌이려는 의도도 없기 때문에 굳이 저런 해석을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밭일을 하다 돌아오는 길이었는지, 시골에서 온 것인지, 그가 구레네 사람인지, 그저 농부였는지 불분명하다 하더라도 그의 아들들의 이름을 본다면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평범한 헬라식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게 된 시몬

시몬의 두 아들은 마가복음에만 나타납니다. 마가복음은 두 아들의 정확한 이름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와 루포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고 추정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마가복음이 이 아들 두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정말로 복음서 한 구절에 등장할 뿐인 사람이라면 마가복음을 기록한 이들이 그의 출신지와 아들들의 이름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의 이름 역시도 알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밭에서 돌아온 한 농부’로 기록되고 끝났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이후에 초대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초대 교회는 가족 구성원 전원이 함께 속하게 된다는 점을 보았을 때, 마가복음이 아들들의 이름까지 알고 있는 점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사도행전 11장 20절에 나오는 ‘구레네 몇 사람’ 중에 시몬이나 그의 아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로마서 16장 13절에 나오는 ‘루포’라는 이름이 시몬의 아들 루포를 가리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구레네 사람이 시몬 본인인지, 로마서에 나타난 루포가 시몬의 아들 루포인지 알 방법은 없습니다. 초대 교회 구성원 중에 구레네 사람이 시몬과 그의 가족만 있었을 리도 없고 루포라는 동명이인이 존재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공관복음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이후에 분명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마가복음의 구성 속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마가복음 15장 21-39절은 수미상관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나가던 이들의 모욕(29-30절)-대제사장과 서기관의 모욕(31절), 강도 둘(27절)-함께 못박힌 자들(32절), 제 삼시(25-26절)-제 육시와 구시(33-34절) 이런 식의 구조입니다.

이 구조 속에서 제일 바깥에 놓인 것이 구레네 사람 시몬과 백부장의 고백(39절)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의 숨지심을 보고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의 경우에는 그가 믿었다거나 예수님을 고백했다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지만, 이 구조 속에서 ‘믿음’ 또는 ‘고백’이라는 주제로 묶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마가복음은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본문의 구조 속에서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난한 동참한 순간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데에서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질 때 예수님과 어떤 대화를 나눴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리고 그 대화 가운데 그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일부 학자는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를 마가복음 8장 34절과 연결시켜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모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8장 34절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가 제자도의 모형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는가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서가 보여주는 한 가지 사실은 그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했다는 사실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고난에 강제로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골고다로 향하는 길에 어떤 체험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 그가 십자가 처형장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어디까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갔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복음서는 그가 고난에 동참한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사실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의 고난을 함께하는 가운데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일전에 예수님의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끝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도 결코 고난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고난의 극복이라는 주제입니다. 그러나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는 그저 고난에 동참하는 이야기입니다.

최근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다들 자신이 피해자라는 생각에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만 힘들고, 나만 고통받으며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래서 나를 힘들게 만드는 대상을 만들어내고 그 대상을 공격합니다. 우리 사회가 계속해서 편을 가르고 집단을 가르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대상을 만들어내는 일에 불과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이 “나 때는 말이야”라는 표현을 쓰면 꼰대라고 부르며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자명합니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우리 시절에는 더 힘들었다”, “지금 너희는 편한 세상에 살고 있는거다”라는 이야기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생각하기보다 내가 더 고통스럽고 힘들었다는 이야기만 하기에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기 싫어합니다. 물론 옛날 얘기만 계속 한다면 그 이야기가 지겨워서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더 고통스럽다. 내가 더 힘들다 라는 말들은 꼭 세대 차이에서만 발생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같은 세대 속에서도 이런 생각들로 인한 갈등은 항상 생겨납니다. 그리고 서로 대립하고 분열하게 됩니다.

마가복음이 전하고 있는 고난에 동참하는 모습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누구의 고난이 되었건 그 고난에 동참할 때 그곳에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깨닫고 함께 나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로 읽힙니다.

고난주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주간입니다. 이런 주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난을 함께 생각하는 기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힘든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기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고난에 동참하는 일일 것입니다.

서로의 고난을 바라보고 이해할 때, 그곳에 도움이 생겨나고 사랑이 생겨나고 평화가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고난을 바라보고 이해하며 동참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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