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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마주하는 순간마셔야만 지나가는 잔(마태복음 26:36-46)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4.04 00:08
▲ Andrea Mantegna, 「Agony in the Garden」 (1460) ⓒWikipedia

1.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길을 나섭니다.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이르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동산 위로 데리고 올라가십니다. 한참을 올라가서 세 제자를 남겨두고 이번에는 예수님만 따로 조금 더 올라가십니다. 그리고는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겟세마네의 기도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이 기도가 얼마나 처절했는지, 땀이 핏방울 같이 땅에 떨어졌다고 말합니다. 천사들까지 나타나서 기도하는 예수님에게 힘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과연 무엇을 놓고 처절하게 기도하셨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예수님처럼 이렇게 처절하게 기도합니까? 아니면 기도해야 하니까, 기도시간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 시간을 때우십니까?

기도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예배 중에 드리는 회중기도, 대표기도도 있고, 혼자 은밀하게 드리는 개인기도도 있습니다. 기도의 모습으로 말하자면, 입으로 소리 내어 기도하는 구송기도도 있고, 조용히 속으로 기도하는 묵상기도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함께 큰 소리로 외치는 통성기도도 있고, 방언으로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 내용으로 말하면, 탄원의 기도도 있고, 탄식의 기도도 있고, 간구하는 기도도 있고, 회개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입으로 하는 기도뿐만 아니라, 몸으로 드리는 기도도 있습니다. 절하며 드리는 절기도도 있고, 호흡기도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목적에 따라 적합한 기도들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기도들에 있어서, 기도의 중심에 무엇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대로, 아무리 대단한 제사를 드리고 엄청난 제물을 바쳐도 하나님은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강한 사랑이 없으면 무의미한 기도가 됩니다.

2.

예수님도 기도의 중심에 있는 간절함, 솔직함을 지적하셨습니다. 시장 바닥에서 큰 길에서 그럴듯한 기도문을 외워서 줄줄줄 멋지게 기도해도,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과 절박함이 없다면 그 기도는 위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아무 말 제대로 하지 못하고 더듬더듬 거려도, 자기 마음속의 간절함을 가지고 절박함을 가지고 솔직한 마음으로 아뢰는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말하는데, 하나님과 대화하겠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의 이 대화를 어떻게 보는가에 관심 가지고 있다면, 그 대화는 아무 의미 없는 대화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모습처럼,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쏟아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쏟아 놓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꼭꼭 감춰 놓아도 모든 것을 환히 속속들이 아십니다. 우리가 쏟아놓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고백하고 우리가 간청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 그것을, 우리가 감춤 없이 하나님 앞에 다 내놓고 고백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 놓을 때, 그 기도가 비로소 참된 기도가 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예수님이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그 길을 앞에 놓고 이미 결단하고 모든 각오를 마쳤습니다. 하나님도 이미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냥 아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두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지금 굳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길을 고백하고, 자신의 결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심정을 하나하나 속속들이 내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두려움과 근심, 괴로움과 절망, 아픔과 억울함, 섭섭함과 안타까움 이 모든 감정들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로서의 담대함과 결의, 결단과 결심, 용감함과 뿌듯함, 희망과 즐거움 이 모든 것도 내어놓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 하시는 대로 마음대로 하십시오. 나는 그대로 순종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십자가를 벗어나고 싶지만,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니 지겠습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구원받은 새 사람이 되는 그 구원의 진리에 대한 자기고백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자리는 하나님과 내가 이 세상을 벗어나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 만남에 나의 모든 존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 뜻’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내가 이렇게 생각합니다’가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나의 모든 것입니다.

그것은 생각일수도 있고, 신념일수도 있고, 본능일수도 있고, 욕망일수도 있습니다. 육신의 적나라한 모습이기도 하고, 살아가고 있는 나의 삶의 환경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 은혜에 대한 나의 응답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를 둘러싸고 그 안에서 그 밖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나조차도 몰랐던 나에 대한 깊은 이야기들이 기도라고 하는 순간에 낱낱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도 같은 의미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사랑, 지금 이 순간 이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입니다.

나라고 하는 한 인간과 관련한 하나님의 생각이기도 하며, 나를 포함한 모든 인류와 모든 생명, 모든 세상과 관련한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이 기도라고 하는 순간에 나에게 낱낱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3.

그래서 기도의 순간은 초월의 순간이며 신비의 순간입니다. 카이로스의 순간입니다. 성서의 시간 개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크로노스’라고 하는 시간인데,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시간입니다. 몇 월 며칠 몇 시 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열심히 일을 해도, 혹은 놀면서 쉬어도 똑같이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잠에 들어서 시간가는 줄 전혀 몰라도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나나 너나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은 초월의 시간입니다. 하늘로부터 이 땅으로 뚫고 들어오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시간입니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종말의 시간이 카이로스적인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크로노스’적으로 몇 월 며칠 몇 시라고 말 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시간을 공간을 초월하여 뚫고 들어와서 역사하시는 시간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그런 시간입니다.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지만, 그들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이 땅을 벗어난 시간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보낸 그런 시간입니다. 세례 받으신 예수님이 땅으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는 그런 시간입니다. 존재가 완전히 바뀌는 그런 시간입니다. 불현 듯 이루어지는 시간입니다.

이 카이로스를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만화영화입니다. 요즘 만화 보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아이들 때문에 요즘도 자주 보는데요. 만화를 보면 항상 등장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이 결정적인 순간에 변신을 합니다. 악당로봇이랑 싸우다가 엄청 두드려 맞고는, ‘안 되겠다. 마지막 필살기를 써야겠다.’ 하고는 변신을 하는데, 이 장면을 두고 다들 말이 많죠. ‘지금 절체절명의 순간인데 한시가 급한 때인데, 저렇게 천천히 세월아 네월아,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변신한다는 게 말이 돼? 저렇게 변신하고 있을 때 왜 악당은 가만히 기다리고 있느냐?’ 저희 아이들도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변신의 순간이 카이로스적인 순간입니다. 일상적인 시간을 벗어나 있는 시간입니다. 지금 악당이랑 싸우는 시간, 째깍째각 가고 있는 그 시간에서 벗어나서, 그 시간을 초월해서,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존재가 완전하게 바뀌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이 길고 오랜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 상관없습니다. 왜냐면 지금 악당이랑 싸우는 시간과 상관없는 다른 시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바로 이런 카이로스의 순간, 완전한 존재변화의 순간인 것입니다. 그 카이로스에 이루어지는 일이 바로 ‘내 뜻’이 완전히 내놓아지고, ‘하나님의 뜻’도 완전히 내놓아지는 일입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한 자리에 나와서 내 뜻도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도 더 이상 하나님의 것만이 아닌,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하나 된 순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후에 십자가의 길로 가신 것은, 예수님의 두려움과 무서움, 벗어나고 싶은 인간적인 생각에 대한 포기가 아닙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이겨내고 뭔가 새로운 결단을 한 것도 아닙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도 아닙니다.

기도라고 하는 카이로스의 순간에 예수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의 모든 뜻을 이해하시고 받아들여주시고,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자기 뜻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자기 것으로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억지로 그 잔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결단으로 그 잔을 마셔내는 것’도 아닙니다. 잔을 마시는 것이 원래의 자기 뜻으로 되어버린 것입니다.

4.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로 가서 사탄의 유혹을 이겨낸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사탄이 세 가지 유혹을 합니다. 떡으로 물질로 유혹합니다. 권세와 영광으로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이겨냅니다. 누가복음은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재미난 이야기를 덧붙여 놓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탄이 이 모든 시험을 끝마치고 물러가서, 어느 때가 되기까지 예수에게서 잠시 떠나 있었다’는 것입니다(눅4:13).

그렇게 잠시 떠났던 악마가 가룟 유다에게 들어갑니다. 그리고 유다를 통해,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에게 최후의 유혹이, 마지막 유혹이 닥쳐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라는 작가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에서 이 마지막 유혹을 그려냅니다.

십자가 위에서 사탄은 예수님에게 꿈을 꾸게 합니다.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아름답고 행복한 미래를 그에게 제시합니다. 소소한 일상의 행복에서부터 커다란 명예와 권세권력까지, 광야에서의 유혹과는 비교되지 않는 엄청난 유혹이 예수님에게 닥쳐옵니다. 이 유혹이 바로 ‘내 뜻’의 결정체입니다. 광야에서 유혹을 이겨낸 것마저도 실은 ‘내 뜻’으로 이겨낸 나의 결단이고 나의 결심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내 뜻’을 모두 비워내고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을 가득 채우는 완성을 이룹니다. 그리고는 그 꿈에서 깨어납니다. ‘내 뜻’으로 이루어가는 삶에서 깨어납니다. ‘하나님의 뜻’이 가득한 삶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선언하십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의 기도가 예수님과 같은 기도가 되길 기원합니다.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그 기도를 통해 ‘내 모든 뜻’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모든 뜻’을 마음에 품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하나 되어,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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