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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위한 한국 교회의 메시아적 사명교회의 일치와 민족의 통일문제 (4)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 승인 2023.04.04 00:46
ⓒWikipedia

교회일치를 위해 성서가 제시하는 모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에스겔서 37,15-23이고, 다른 하나는 요한복음 17장이다.

에스겔서의 통일 모델

예언자 에스겔은 두 가지 놀라운 환상을 본다.(1) 첫 번째 환상은 이스라엘이 역사의 죽음에서부터 부활하는 것이고, 두 번째 환상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메시아적 왕의 통치하에서 통일되는 것이었다. 이 두 번째 환상은 남 왕국과 북 왕국으로 분열된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것이다.

예언자는 두 개의 나무를 들어 한 나무 막대기 위에는 ‘유다’의 이름을, 다른 나무 막대기 위에는 ‘요셉’이라는 이름을 써야 한다. 이것은 두 왕국의 이름이기도 하다. 나무 막대기는 두 나라 왕들의 지배를 상징하는 지팡이이다.

그 후 예언자는 이 두 개의 나무 막대기가 하나가 되도록 붙여야 한다. 유다라는 막대기와 요셉이라는 막대기로부터 하나의 막대기가 생기는 것이다. 이런 상징적인 행동으로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하느님이 이스라엘 자녀를-옛 날에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키신 것처럼-분단에서부터 다시 끌어내 하나의 민족을 만들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을 나의 땅 이스라엘 산악지대에서 한 민족으로 묶고 한 임금을 세워 다스리게 하리니, 다시는 두 민족으로 갈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반으로 갈라져 두 나라가 되지 않을 것이다.”(겔 37,22-23)

이 마지막 문장은 시나이에서 체결된 가장 오래된 동맹형식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동맹을 연결하는 것이 동맹단체 자체가 아니라 메시아적인 왕이라는 것이다. 회개를 통한 하느님과의 수직적 통일이 전제되어 있다. 문제는 하나의 통일이 아니라 두 개의 통일, 곧 하느님과의 통일과 분단된 민중의 통일이다. 전자가 수직적 통일이라면, 후자는 수평적 통일이다.

에스겔은 수직적 통일, 곧 민중을 해방하는 하느님과의 통일이 분단된 민중의 수평적 통일을 완성한다고 본 것이다. 에스겔은 두 막대기를 하나로 묶는다. 두 막대기는 여전히 두 막대기로 남아 있다. 민중의 어느 편도 다른 편에 흡수되거나, 굴복하지 않는다.

각자의 막대기는 자기의 고유한 성격과 특수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왕국, 유다의 요셉, 각각의 민중은 고유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민중도 다른 민중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막대기에서 하나의 새로운 막대기가 생겨난다.

이스라엘의 두 개의 민중, 두 개의 왕국이 새로운 메시아 왕의 통일된 메시아적 민중이 된다. 북왕국이 남왕국에게 흡수되는 것도 아니고, 남왕국이 북 왕국에게 굴복하는 것도 아니다. 두 왕국으로부터 메시아적 희망을 가진 하나의 민중, 하나의 하느님의 나라가 생긴다.

에스겔 환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서로 다른 교회들이나 교파들, 단체들의 일치가 일방적인 흡수통일이나 한편의 굴복과 다른 한편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치를 통해 메시아적 희망을 가진 새로운 민중이 탄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과의 수직적 통일, 회개와 화해 위에서 추구하는 일치가 수평적 통일의 평화적 실현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불의와 폭력에 맞선 교회의 통일 모델

요한복음 17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앞두고 한 마지막 기도라는 점에서 그 진지함과 엄숙성이 더 돋보인다. 예수의 기도는 하느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인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의 교회는 여전히 분열되어 있고, 세상은 교회를 미워한다는 것이다(요한 17,14).

세상은 왜 교회를 미워할까? 그것은 교회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요한 17,14).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교회가 세상의 질서와는 다른 질서 속에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이 자아실현, 자기성취를 통해 삶의 가치를 확인한다면, 교회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확인한다.

세상의 미움은 교회가 진정한 교회인지, 거짓 교회인지를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다. 세상의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정의를 사랑하는 교회는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 그런데 세상의 미움을 받는 교회를 위해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기도 한다:

“내가 아버지께 원하는 것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요한 17,15)

세상의 미움, 박해와 시련이 닥쳐오면 교회는 자칫 현실을 도피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교회가 악의 세력을 회피하거나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과의 적극적인 대결과 그에 필요한 하느님으로부터의 능력을 요청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진리로 거룩해져야 한다.”(요한 17,17)

교회의 성화는 교회 자체의 속성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진리가 교회를 성화시킨다. 교회의 성화는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실천적 행동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공동번역은 이 말씀을 “이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번역한다.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거짓과 폭력에 대항하는 것이다.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해 함께 투쟁하는 것이다. 진리는 그 진리를 확신하는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칠 때 그 진실성을 획득한다.

교회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곧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치도록 요청받고 있다. 진리를 증언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길은 진리를 삶으로 증거 하는 것이다.

교회는 왜 하나가 되어야 할까? 보다 효과적인 선교활동을 위해서? 교파분열에 대한 세상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아니면 교회의 조직된 세력을 과시하고 사회에서 발언권을 얻기 위해서일까? 요한복음이 증언하는 일치는 실용적인 목적과 아무 관계가 없다. 요한은 “세상으로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교회 일치는 그 자체 안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 그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을 교회에게도 주신다(요한 17,22). 그 영광은 십자가 사건에서 가장 완벽하게 표현된다.

일치에서 중요한 것은 정체성이다. 교회의 일치는 조직의 통합이나 신학의 통일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일치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참여하는데서 성취된다. 즉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써 교회는 영광을 받으며, 복종과 겸손을 통하여 그 영광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통일을 위한 교회 일치의 가치

교회일치모델과 관련하여 우리는 민족통일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협의회적 친교모델’은 ‘한민족 공동체론’과, ‘연합모델’은 ‘연방제 통일론’과 어느 정도 유사한 관계에 있다고 보인다. 민족의 통일은 지난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도 복잡하고, 서로 다른 체제에서 70년을 분단 상황에서 살았으며,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루고 오랜 냉전체제에서 서로를 불신해온 역사 때문이다.

물론 민족통일은 교회만의 과제도 아니고, 또 교회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그렇다고 통일이 정부만의 과제이고 주변 강대국들과 남북의 권력집단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통일은 우리 민족 모두의 과제이고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성취해야 할 과제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에게도 통일은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이다. 문제는 우리 민족의 통일이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담보하는 통일이 되도록 교회가 메시아적 사명감을 가진 공동체로서 통일논의와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미주

(1) 에스겔서를 통해 본 일치모델은 필자가 몰트만에게 크게 의존한 것임을 밝힌다. 위르겐 몰트만,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채수일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24-27 참조.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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