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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의미?, ‘동굴 밖으로’+‘패자부활전!’(창 26:26-33; 롬 9:30-33; 막 15:42-16:8)부활주일/씨뿌림주일(4월9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4.06 22:58

1. 동굴 속에서, 동굴 밖으로!

정치학자 전인권 교수가 쓴 『남자의 탄생』(푸른숲, 2003)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지은이가 다섯 살부터 열두 살까지, 자신의 유년기를 소재로 삼아 한국 남자의 인성 형성 과정을 심리적・정치적・사회적 맥락에서 분석한 책입니다. 이 시대 한국 남자들의 정체성을 결정지은 한국 특유의 가족문화와 한국 사회의 구조적 특징들을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전인권 교수는 먼저 이렇게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언제나 성실한 사회인이자 친절한 동료, 착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 주변을 돌아보니, 나는 지난 10여 년 동안 직장, 친구 관계, 가족관계에서 실패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번 같은 실수를. 어찌 된 일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전인권 교수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식 남자는 동굴 속 황제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요?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한국 남자들은 어릴 적부터 부모에 의해 철저하게 한국식 남자로 길러지는데, 동굴 속 황제인 한국 남성은 모성의 공간에서 양육되고, 부성적 질서에 의해 완성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국 특유의 가족문화가 낳은 인간이 바로 동굴 속 황제인 한국 남자의 탄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든 인간관계를 진선미(眞善美)의 우열에 따라 상하관계로 설정하는 봉건적 인간이며 자신을 ‘진선미의 화신’이라고 여기며, 자신의 우월함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타인으로부터 끊임없이 인정받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또 동굴 속 남자들은 이러한 신분 관계에서 생겨나는 심리적 영토를 끊임없이 넓히려는 행동 원칙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전인권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동굴 속 황제’의 허영심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두 가지의 특징적 증상이 있는 듯하다. 첫째는, 그저 ‘남보다 우월하다’라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진선미의 화신’이라고 생각하며, 이 사실을 끊임없이 타인에게 주지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신의 심리적 영토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넓히려 한다는 것이다.”

한국 남자들을 ‘권위주의’와 ‘자기애(自己愛)’의 동굴에 갇힌 황제로 분석한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동굴 속 황제’라고 부르는 전인권 교수는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자신이 갇혀 지낸 동굴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그것은 바로 동굴 속 황제의 습성을 버릴 때 가능하며, 그때 비로소 자신과 주변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권위주의, 아버지를 ‘신분의 감옥’에 가두고, 어머니에게는 단지 세 가지 얼굴, 곧 ‘여자’와 ‘현모양처’, ‘어머니’만을 만들어준 그 권위주의의 그물을 걷어버릴 때, 우리 사회가 비로소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다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어떻게 보면, 한국 남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동굴 속에 갇혀 있는지도 모릅니다. 철학자 플라톤의 비유대로 인간은 동굴 속 그림자를 보며 만족하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권위주의’와 ‘자기애’의 다른 이름입니다. 오늘 서신서 말씀의 맥락에서는, ‘율법의 의’와 ‘행위의 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의 율법과 행위의 의를 고집하여 참 진리의 세상인 동굴 밖을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를 통해, 유대인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들이 의롭게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복음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위주의와 자기애의 화신(化身)인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헤롯당과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이러한 권위주의와 자기애의 소굴인 동굴(무덤)에 갇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부활하시어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2. 동굴(무덤) 속에 계시지 아니하니라!

“이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는지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막 15:42-47)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지냅니다. 바위 속에 판 무덤(동굴)에 예수님을 넣어둔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찌기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막 16:1-4)

안식일이 지나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무덤(동굴)으로 갔습니다.

“무덤에 들어가서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 16:5-7)

▲ 예수께서 여기(동굴 속)에 계시지 아니하니라!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예수께서 여기(동굴 속) 계시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막 16:8)”였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사망 권세가 예수님을 동굴 속에 가둬놓을 수 없습니다. 권위주의와 자기애가 예수님을 어둠 속에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곧 기독교 진리인 참된 부활은 이렇게 동굴 속에 갇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동굴, 곧 무덤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편협한 교리와 배타적인 신앙이 예수님을 가둘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이기시고 부활하십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한국 남자들처럼, 참된 진리를 동굴 속에 가두고 그 속에서 기생하고 있습니다. 어둠에 갇혀 참된 빛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서신서 말씀에서 바울 역시,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다고 선포합니다.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불의하다고 여겨진 이들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선으로 보면, 패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패자들이 승리한 것입니다. 패자부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 부활을 믿는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베풀며 나아가 패자부활전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3.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패자들)이 의를 얻었으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9:30-33)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했고,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동굴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굴은 배타적인 교리와 편협한 신앙이라는 동굴입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의식, 곧 우월의식이 가득했습니다. 이러한 편협한 동굴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동굴 밖 새로운 세상, 예수님의 부활로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동굴 밖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 이들, 곧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이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기에 믿지 않는 이들도 이들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삶에 있어서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구약 말씀에 나오는 이삭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지난주 종려주일 말씀에 우리는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실수를 반복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내 리브가를 누이로 속이는 실수를 범합니다. 그 결과 이삭은 그랄 땅의 아비멜렉 왕에게 책망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 실수를 인정합니다. 이후 이삭은 그랄 땅에서 농사를 지어, 그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심으로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창 26:9, 12-13). 실수를 인정한 후, 변하여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동굴을 벗어난 것입니다. 교만과 아집, 자기주장의 동굴에서 벗어나 새로워졌을 때,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들도 압니다. 오늘 구약 말씀은 동굴을 벗어난 이삭이 아비멜렉 왕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정받고 계약을 맺는 것입니다. 동굴 밖에 새로운 존재, 곧 부활을 경험한 이들은 이방인들로부터도 이렇게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4.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보았으므로!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 26:26-29)

상황은 이렇습니다. 이삭이 그랄 땅에서 농사하여 큰 복을 받습니다. 그러자 아비멜렉 왕이 이삭의 강성함을 보고 떠나라고 합니다(창 26:16). 따라서 이삭은 브엘세바로 가게 됩니다(창 26:23). 이곳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이삭에게 내려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말씀은 이후의 일입니다. 아비멜렉이 다시 이삭을 찾아옵니다. 그는 이삭에게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계약을 맺자고 말합니다. 쫓아냈는데, 번성하니 아비멜렉 왕은 분명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 이삭과 아비멜렉의 계약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그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창 26:30-33)

브엘세바는 ‘일곱 우물’, ‘언약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이삭은 아비멜렉 왕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맹세한 후, 평안히 보냅니다. 이전에는 아비멜렉이 아삭을 꾸짖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동굴 밖에 나온 사람, 자기 죄를 자복하고 새롭게 변한 사람, 곧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이렇게 이방인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패자부활전이며 부활의 힘입니다.

이렇게 부활의 의미는 동굴 밖을 나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굴 밖을 나섰을 때, 놀라운 언약을 체결합니다. 그 언약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삭과 아비멜렉의 언약에서 보듯이 역전된 상황입니다. 패자부활전인 것입니다.

앞서 복음서 말씀인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갈릴리의 부활로 이야기합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활동을 하셨던 지역입니다. 예루살렘과 달리 유대의 중심이 아닙니다. 늘 항상 예루살렘과 갈릴리는 중심과 주변의 도식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렇게 중심이 아닌 주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그리고 이삭처럼 실수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다시 새로워지려고 하는 이들에게 패자부활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서는 항상 패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에게 패자부활의 기회를 줍니다. 그리고 그 모범은 가장 큰 패자인 예수의 죽음이 부활을 통한 패자부활전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중심이 아닌 주변, 승자가 아닌 패자, 실수하지만 그 실수를 인정하는 나약한 이들에게 부활의 예수는 경험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올해 부활절 말씀의 핵심, 곧 부활의 참된 의미는 동굴 밖으로 나온 이들의 패자부활전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패자들, 곧 동굴 밖을 나온 이들과 하나님은 계약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복을 주십니다. 사망 권세에 갇혀 있지 않고, 부활 승리하는 것입니다.

5. 패자부활전

서양 최고의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감명을 받아 이탈리아로 건너가 로마사를 독학으로 공부한 일본의 소설가 시오노 나나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15년 동안 15권으로 집필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로마인 이야기』(한길사, 1995)를 쓰면서 로마가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에 걸쳐 지중해 지역의 패권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소개합니다. 그것은 능력이 있는데도 불운하게 패장이 된 사람에게 설욕의 기회를 주는 제도, 곧 패자부활전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령 로마의 이웃 나라인 카르타고나 그리스는 전쟁에서 패했을 때, 이유를 불문하고 패장을 처형했다고 합니다. 이들 국가는 전쟁에서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는 비록 전쟁에서 패했지만, 그 패장이 능력이 있다고 인정되면 군사를 이끌고 다시 전쟁터에 나갈 수 있었고, 당시 로마의 최고 권력인 집정관에도 선출될 수 있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 예로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불리는 스키피오 부자를 소개합니다. 아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기원전 235년~183년)는 포에니 전쟁에서 그 유명한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Hannibal Barca, 기원전 247년~183년)을 자마전투에서 무찌르고 로마를 구합니다(기원전 202년 10월 19일).

▲ 자마 전투

그러나 그 이전에 그의 아버지 스키피오가 한니발과 전쟁에서 패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로마 시민은 아버지 스키피오의 능력을 인정해서 그에게 다시 군사를 주어 전쟁을 치르게 한 것입니다.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리고 후일 그의 아들 스키피오가 제2차 포에니 전투에서 한니발을 무찌르고 쓰러져 가던 로마를 구한 것입니다. 결국 패자부활전이 로마를 구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다시 패자부활전이 필요합니다. 청년들에게 실수나, 실패가 끝이 아니고, 성공의 밑거름과 기반이라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한번 땅에 넘어졌다고 그냥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땅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패자부활전입니다, 그리고 참된 부활 신앙의 의미입니다.

빈곤의 대물림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는 부산대 사회복지학과 박병현 교수는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20-25% 정도는 성인이 되어서도 빈곤한 상태에 놓여 있다.”라고 분석합니다. 이것은 외국의 경우와 비교해도 매우 높은 수치입니다. 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상당수가 성인이 되어서도 가난한가요? 이유는 그 빈곤 가구가 빈곤에서 탈피할 기회를 적게 얻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박병현 교수는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진 기회보다 더 많은 여분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즉, 그들에게 빈곤에서 탈피할 수 있는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여분으로 주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저와 여러분들에게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주십니다. 권위주의와 자기애의 동굴에서 나와 아집과 교만을 벗어버리고 주님이 건네시는 손을 맞잡고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갈릴리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 역시 패자부활전이 당연한 곳이 되어, 좌절한 사람, 실패한 사람들이 다시 소생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사람 사는 곳곳에 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는 부활의 증인으로 가득 차, 동굴 안이 아닌, 동굴 밖에서 참 평안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 부활의 증언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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