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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죽으셨다평안하냐?(마태복음서 28:1-10)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4.11 01:12
▲ Peter von Cornelius, 「The Three Marys at the Tomb」 ⓒPublic Domain

1.

기쁘고 복된 부활아침입니다. 함께 부활 인사 나눌까요? “우리 주님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을 알고 기다려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 기쁨과 소망의 인사를 나눌 수 있지만, 이천 년 전 오늘 새벽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의 마음은 참담했습니다.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실 줄만 알았던 주님께서 허망하게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뒤를 이어, 따르는 사람들을 규합하고 조직을 정비하고 세력을 키워가야 할 것으로 생각되던 제자들은, 오히려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면서 ‘우리의 왕’이라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그렇게 환영하던 백성들은, 핏대를 세우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댔습니다. 그리스도가 여기 계시다고 복음을 외쳐 말하던 시절은 끝나고,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해야만 하는 시절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다만, 옛 정이 남아서, 예수의 시신이라도 돌봐줄 뿐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죽어있는 예수를 본 것이 아니라, 빈 무덤만 보게 됩니다. 그리고 천사를 만나 부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놀라서 제자들에게 뛰어가는 여인들 앞에,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평안하냐?’ 평안하냐, χαιρετε(카이레테). 이 말씀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안녕’입니다. 단순한 인사말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인사말 이상의 의미를 그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똑같은 말이 데살로니가전서에도 쓰입니다. 어딜까요? ‘항상 기뻐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할 때, ‘기뻐하십시오’라는 말이 오늘 말씀과 똑같은 ‘카이레테’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기뻐해라. 즐거워해라. 평안해져라’ 하는 명령입니다. 그리고는 또 다른 명령을 하나 더 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왜 이런 명령을 하십니까?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서 희망과 소망에 가득 찼을 텐데 뭐가 무섭다고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러고보니 8절의 말씀에도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이 엇갈렸다고 말합니다. 부활 소식에 기뻐한 것은 이해가 되는데 도대체 부활 소식이 ‘왜 무섭냐’는 겁니다.

2.

오늘 새벽, 여인들은 예수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찾아간 예수는 ‘죽어버린 예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님 시체’를 보러 간 겁니다. 이들의 마음 속에 있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가 아니라, 죽어버린 예수였던 것입니다.

부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제자들에게 죽은 지식에 불과했습니다. 여인들을 비롯한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고 있었으나, 믿지 못했습니다. 진짜로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소망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려니 했을 겁니다.

그들이 여태껏 믿은 것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었어요. 주님의 복음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자기 신념을 믿었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하는 밀알’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대로 ‘창고를 넓히고 새로 짓고 차고 넘치게 쌓아 놓을 부자’가 되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낮아지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대로 높아지고 섬김받는 삶을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길에 예수님이 도움이 될 듯 보였던 것이죠.

그들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말로는 ‘예수 부활’을 찬양하지만,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면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하는 예수’를 따라나서는 것이 아니라, ‘결코 죽지 않을 신’으로서의 예수를 따라나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조차도 ‘죽음까지 이겼으니 최고로 강하신 분이다’ 하는 그런 마음으로 부활을 받아들입니다. 부활을 찬양하고 감사한다지만, 마음속에는 부활을 가능케 하는 죽음에 대한 소망은 없습니다. 아직도 인간의 욕심과 헛된 소망이 가득할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인들이 무덤을 찾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신 소망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닙니다. ‘죽지 않았어야 할 예수’, 그런데 ‘허망하게 죽어버린 예수’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물거품이 되어버린 욕망을 들춰내고 아쉬워하는 중입니다.

3.

그러나 우리가 찾아가야 하는 예수는, 그런 예수가 아닙니다. ‘죽지 않을 예수’가 아니라, ‘죽어야만 하는 예수’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는 것이 부활인데, 우리가 부활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진짜 이유는 부활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났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 ‘사셨다’ 하고 찬양하지만, 부활에서 초점은 ‘살았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부활에서의 참된 초점은 ‘죽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주님이 살아나시는 사건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부활의 역사성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논쟁도 벌여요. ‘진짜 일어난 일이냐?’ 예수의 역사성, 기적의 진위. 이러쿵저러쿵하는데, 저는 그런 논쟁이 참 어이없게 느껴집니다. 전능하신 분이 전능한 일을 하시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고, 앉은뱅이 일으키시고, 죽은 나사로도 살리시는데,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시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오히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진짜로 대단한 사실은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 죽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죽을 리 없는 분이 죽었다는 것이고, 죽지 않아도 될 분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중심은 ‘죽었다’는 것, 그것도 ‘하나님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뒤의 일은 놀랍지 않습니다.

그럼 살아난 것은 누굽니까? 누가 살아났습니까? 살아 있는 줄 알았던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놀랍지 않습니다. 놀라운 일은, 살아 있는 줄 알았지만, 실은 죽어있던 존재들, 자기가 죽어있는 줄도 모르던 존재들, 그렇게 영원한 죽음 속으로 들어가야 할 운명의 존재들, 바로 그런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으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님이 죽고 우리가 살아난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부활사건입니다. 죽은 줄 모르고 살다가 참된 죽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그 죽음에서 건짐받는 것, 그것이 부활입니다.

4.

이제 여인들의 두려움과 무서움이 이해될 것입니다. 여인들은 두렵습니다. 무섭습니다. 왜 무섭습니까? 여태껏 살아 있는 줄로만 알았던 내가 실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무섭습니다. 내가 숨 쉬고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지 실은 내 영혼이 메말라서 죽어있었다는 것을 알았느니 무섭습니다.

왜 두렵습니까? 이제 주님의 죽으심을 따라,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두렵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주님만의 부활이 아니라, 이제 나의 부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두렵습니다. 부활하려면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두렵습니다. 그 죽음이 두렵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두렵지? 무섭지? 아니야, 너희들은 평안해야 해! 기뻐해야 해! 즐거워야 해! 나도 두렵고 무서웠어, 마지막 날까지,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까지도 두렵고 무서웠어. 그런데 아니야. 십자가에 죽어보니까, 참 평안해, 참 기뻐, 참 즐거워.”

5.

부활은 우리에게 축제입니다.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과 무서움을 깨닫고, 그 두려움과 직면하고, 그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 돌파해내고, 마침내 그 두려움을 초월하는, 그런 기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에게 참 평안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제 다시 인사합시다. ‘주님 살아나셨습니다’ 하고 인사했는데, 이제 인사말을 바꿉시다. ‘우리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인사합시다. ‘우리 평안해집시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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