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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아닌 꿈을 꾸는 사람부활의 아침에(창세기 50,15-21; 마가복음 16,1-8)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3.04.13 01:44
▲ 요셉은 형제들을 두려움을 안심시키고 그들을 돌보다가 야곱이 죽은 후 그를 장사하기 위해 가나안으로 올라가고 있다. ⓒWikimediaCommons

모든 생명의 공통된 특징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비켜갈 생명은 없는데, 죽음 또한 생명의 끈을 끊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죽음과 생명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생명을 삼키는 죽음은 최종 승리자가 되지 못하고 죽음에 삼켜지는 생명도 최종 패배자가 되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계속되는 생명은 아름다움과 찬란함을 잃지 않는 신비입니다.

생명의 흐름은 분명 이런데, 개별적인 생명은 죽음 속에 피어났다가 죽음에 묻히는 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생명의 흐름을 계속 이어가는 개별적인 생명은 사람이 오랫동안 이야기해온 꿈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것은 꿈 아닌 꿈임을 우리는 믿음으로 압니다.

죽음의 죽음과 죽음을 이긴 생명을 오래 전 이사야가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죽음을 영원히 삼키실 것이다”(사 25,8).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음의 마지막을 선포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생명 안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영원한 생명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잇댄 생명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그 삶의 모습은 공감과 연대, 연민과 공정, 인내와 일관성 등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영원에 잇댄 삶은 사람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하지만 그 선물이 우리에게 오게 되기 까지는 긴 역사가 필요했고 또 하나님의 인내와 희생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에게 십자가를 지게 했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부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그의 아들이 스스로 일어난 것이라면, 그의 부활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에게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부활이 하나님의 사건이기에 우리는 예수에게서 나타난 부활 사건이 사람에게서 다시 일어날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의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듯 우리를 또한 일으키실 것입니다. 죽음을 넘어선 부활의 희망이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에게서 부활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되기를 빕니다.

부활의 새벽!

예수의 제자들, 특히 몇몇 여인들이 그 새벽을 기다렸지만 그들은 부활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무덤으로 일찍 달려간 까닭은 그의 시신이 썩지 않도록 보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심어준 그에게 자신들이 해드릴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경비병들도 있고 무덤을 막고 서있는 큰 바위도 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데도 그들은 무덤으로 갔습니다. 무모했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만큼 예수를 향한 그들의 마음이 컸습니다.

복음서마다 세부적인 묘사가 달라서 그때의 상황을 정확히 재구성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천사’를 만났고 빈무덤을 확인했으며 무서움에 떨었다는 것은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부활의 증인은 될 수 있지만 부활의 목격자는 아닙니다. 시작도 끝도 하니님에게 속한 신비의 사건입니다.

천사의 역할 역시 제한적일 것입니다. 부활의 최초 증인이지만 부활 사건에 관여한 흔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사람들은 돕는 자였습니다. 예수의 말을 기억하게 하고 예수를 만날 수 있게 안내를 해줍니다. 이처럼 부활 사건은 예수에게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를 찾은 사람들에게도 천사를 통해 일어나 사건이기도 합니다.

본래 마가복음은 여인들이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하는 말로 끝납니다. 뒤에 이어지는 늦은 본문들은 예수의 부활을 예수께서 직접 알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언제까지나 아무 말도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무서움은 환희로 바뀌고 침욱은 증언으로 바뀝니다. 부활의 예수에게서 시작되는 새시대를 처음 알게 되고 이를 알리는 첫사람이 되었습니다. 에덴 동산 밖에서의 삶을 여는 것도 여인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여인들의 증언은 참으로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여인들의 증언에 따라 깊은 좌절에 빠졌던 제자들은 갈릴리로 갈 수 있었고 거기서 예수를 뵙고 그의 말씀에 따라 새시대를 열어갔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열린 부활의 새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삶이 어떤 것인지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으나 오늘 우리는 요셉에게서 그 가능성을 찾고자 합니다.

요셉은 별로 좋다고 할 수 없는 행동으로 형제들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고, 형제들은 그를 편하게 대할 수 없었습니다. 요셉의 꿈으로 형제들과의 갈등은 더 깊어졌고 형제들이 그에게 살의를 품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형제들이 그를 실제로 죽이려고도 했지만 죽이는 것만은 겨우 피하게 되었고 대신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타국으로 팔려온 것도 서러운데 이집트에서도 한동안 순탄치 못한 생활을 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꿈을 해석해준 사건 때문에 풀려나고 권력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외국인이지만 이집트 파라오가 그를 가뭄 예상으로 인한 난국을 해결할 사람으로 인정하고 등용한 것을 보면 이집트가 상당한 정도로 외국인에게 개방적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훗날 히브리인의 세력이 커졌을 때 다른 태도를 보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가뭄은 요셉의 등용 계기였을 뿐만 아니라 형제들과의 재회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가나안도 가뭄을 피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식량을 구입하러 온 형제들 발견하고 짖궂은 행동을 합니다. 형제들을 붙잡아 두기 위한 것이었지만, 보기에 따라 형제들에게 맺힌 한을 푸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마침내 형제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공개하자 형제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못하지만 과거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며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자 요셉이 먼저 그들을 안심시키는 말을 합니다. 이때 그의 말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가뭄과 그로 인한 재회가 모두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달은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당신들의 후손을 이 세상에 남기시고 당신들을 살게 하셔서 큰 구원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나를 이곳에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세우시고 그 온 집의 주가 되게 하식ㆍ 온 이집트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습니다(창 45,7-8)

개인적인 한과 아픔을 잊게 하는 깨달음입니다. 요셉은 야곱을 비롯해 그의 조상들과 달리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된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깨달을 수 있었고 그 결과 이처럼 놀라운 고백에 이르렀습니다. 형제들은 가뭄 위기를 극복하고 야곱과 함께 정착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야곱의 죽음으로 또 한차례의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아버지라는 방패가 사라지자 잊었던 두려움과 공포가 되살아났습니다. 스스로는 느끼는 두려움이고 공포입니다. 형제들이 이러한 심정을 요셉에게 털어놓았을 때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러한 형제들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다시 안타까움 섞인 오늘 본문의 말로 형제들을 위로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악행을 선으로 바꿔 오늘이 있게 했는데, 자신이 이를 어떻게 바꿀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기를 인식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는 형제들의 아이들을 돌보기로 약속함으로써 자신이 예전의 사건을 완전히 극복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로써 모든 사건의 근원이었던 처음의 불편한 관계가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창 37,4 참조).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구원받은 요셉은 권좌에 올라 원망과 복수에 불타는 대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섭리를 깨닫고 넓은 마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부활을 간직한 사람의 한가지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이같은 모습은 그가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이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든 부활의 도장이 찍힌 삶의 모습이 우리에게 드러나기를 빕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부활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시기를 빕니다. 그 모습들이 합하여 평화를 이루어내기를 빕니다. 우리의 큰 구원을 준비하시며 우리들 가운데서 역사하시고 우리들 앞에 가시는 부활의 주님을 따라 가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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