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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의미2: 세상의 미련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것들을 택하사!(창 27:38-45; 고전 1:26-31; 막 13:1-8)부활절 둘째 주일/장애인주일/4・19혁명기념주일(4월16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4.14 13:51

1. 혐오의 바다를 건너 평등의 들판으로!

오늘은 부활절 둘째주일이자 장애인주일입니다. 또한 4・19혁명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올 2023년 장애인주일을 맞이하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 장애인소위원회의 입장문이 발표되었습니다. ‘혐오의 바다를 건너 평등의 들판으로’라는 제목으로 요한복음의 말씀을 인용하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요한복음 9:2)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장애인과 그 가족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대해 단호하게 “그들은 죄인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장애인과 그 가족을 죄인으로 몰아가려는 모든 생각을 거부하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품어 안으셨습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장애인과 그 가족을 향한 차별과 혐오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지난 대선에서 정치인들은 기본 권리를 요구하는 장애인들의 행동을 폭력으로 치부하고 무리한 요구를 일삼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규정함으로 장애인에 대한 혐오를 부추긴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들은 자신의 권리를 외쳐서도 안 되고 시위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하며 그저 국가와 지자체가 베풀어 주는 시혜를 얌전히 기다려야 하는 존재로 낙인을 찍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차별과 혐오입니다.

작년 2022년 4월과 5월에 JTBC ‘썰전라이브’ 토론회에 참석해 이준석 전 대표와 장애인 이동권과 탈시설을 주제로 토론했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박경석 상임공동대표는 이렇게 토로합니다.

“이동할 자유조차 없어 시설에 갇혀 교육조차 못 받는 차별의 세월을 (제가) 암에 비유했는데, 지금 이준석 대표는 소독약 들고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암에 걸린 우리는 암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이 대표 때문에 화병으로 죽을 것 같다.”

20여 년 전인 지난 2001년 1월 22일,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 장애인 리프트에서 장애인이 추락사한 이후, 장애인들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 22년간이나 투쟁하고 외쳐왔습니다. 그러나 장애인들이 안전하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권리는 여전히 요원하기만 합니다. 2022년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저상버스 도입률은 전국 평균 27.8%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저 장애인들은 집 안이나 시설에서 꼼짝 말고 있으라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장애인 활동가들이 나섰습니다.

▲ 왼쪽 위로부터 박경석 대표와 2022년 5월 장애인 활동가 세 사람의 지하철 오체투지

사진은 작년 2022년 5월 장애인 활동가 세 명이 4호선 삼각지역에서 혜화역까지 기획재정부에 장애인권리예산을 촉구하며 지하철 오체투지를 벌인 모습입니다. 이날 오체투지에는 이선희 충북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회장, 문경희 세종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장, 배재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의원이 나섰습니다. 이선희 회장은 앞서 이날 아침 삭발투쟁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올해 2023년 3월에도 투쟁이 이어져, 3월 17일 박경석 전장연 대표가 서울교통공사의 업무방해, 기차 등 교통방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조사를 거부했다고(장애인편의시설이 설치되지 않아 조사실까지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체포영장을 발부해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32시간 만에 석방했습니다.

결국 전장연은 우리가 불법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가 불법”, “불법을 저지른 대상은 경찰”이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이것은 타당합니다. ‘장애인등편의법 6조’에 따르면 국가는 장애인편의시설을 의무적으로 마련해야 합니다. 또한 같은 법 ‘시행령 별표 2’에는 편의시설 의무설치 대상시설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청사, 파출소, 지구대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 같은 대상시설에 “장애인이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 승강기 설치는 의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조사실까지 갈 수 없는데도 오지 않았다고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입니다.

결국 정의·평화위원회 장애인소위원회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국가와 지자체의 예산 수립 과정에서 중증장애인을 위한 활동지원서비스를 포함한 장애인 사회복지 예산이 당연하다는 듯이 삭감되거나 기껏해야 동결되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 가운데 장애인들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권리를 빼앗긴 채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와 정치인들은 여전히 “우리가 해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라.”라고 겁박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한국 사회는 기다리라는 말 때문에 ‘세월호 참사’와 ‘10.29 이태원 참사’ 등 대형 참사를 겪었던 것 아닌가요? 기다리다 말라 죽습니다. 따라서 장애인들에게 이러한 참사는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조용히 기다리라는 말로 장애인을 향한 차별과 혐오를 포장하는 유무형의 폭력은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장애인을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여기는 풍조도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장애인은 우리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이자 삶의 주체이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정의·평화위원회 장애인소위원회는 이렇게 한국교회에 요구합니다.

“한국교회는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차별과 혐오의 바다를 건너 평등의 들판을 향해 나아가는 구원의 방주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당당한 삶의 주체로 살아가는 사회를 이루어 가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펼쳐 가시는 구원과 해방의 역사라 고백한다.”

2. 세상의 미련 한 것, 천한 것, 멸시받는 것, 없는 것들을 택하사!

지난주 부활주일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권위주의와 자기애의 동굴에서 나와 갈릴리로 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그 갈릴리 길에 동행하는 이들은 패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참된 의미는 ‘동굴 밖으로’와 ‘패자부활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할 자로 곧, 동굴에서 나와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날 이들을 세상의 미련한 것과 천한 것, 멸시받는 것, 없는 것들에 관해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있는 것들(유력한 자들)을 폐하지(힘없게) 못하고 없는 것들(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차별하고 있습니다. 4・19혁명과 같은 변혁이 계속 요청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 말씀은 이삭과 리브가, 곧 부모의 자식 편애, 곧 차별이 비극의 씨앗이며 복음서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차별과 분란이 종말의 시작임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서신서 말씀부터 볼까요? 뜻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고전 1:26-29)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고린도에 1년 반 이상 머물며 개척한 교회입니다. 이후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뜻밖에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고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바울과 아볼로, 베드로와 예수님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 이름의 권위를 빌려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 고린도교회 파벌

​아마도 지도자의 출신 배경을 따라 바울파는 로마시민, 아볼로파는 헬라인, 베드로파는 유대인, 그리스도파는 출신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파는 유대교 율법주의에 편향된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지금의 근본주의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바울파는 바울의 복음을 따랐던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며 아볼로파는 초기 영지주의 운동에 편향된 헬라인 그리스도인들로 진보적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파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아무튼 이들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예수교-기독교, 보수-진보, 근본주의-복음주의, 혹은 출신 지역으로 나눠 싸우듯이, 파를 나눠 싸웁니다. 자기 자랑하며 다른 파를 몰아붙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자기 자랑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실 너희가 지혜로운 자도 많지 않고, 또 문벌 좋은 자도 아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자도, 또 문벌 좋은 자도 자랑하지 않는데, 하물며 너희가 도대체 무엇을 자랑하며 싸우고 그러느냐고 책망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천하고 없는 것들을 택하사 지혜롭고 문벌 좋은 자들을 부끄럽게 하실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자랑질하지 말라. 차라리 자랑하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라고 합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예수 안에서 자랑하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십자가의 도(고전 1:18)’입니다.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지 못하고 미련하여 멸망하는 자처럼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된 화평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련하여 차별과 혐오에 앞장서기 때문입니다.

앞서 장애인 차별에 관해 말씀드렸지만, 오늘 구약 말씀은 에서와 야곱 쌍둥이의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의 자식 차별을 보여줍니다. 또한 복음서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이 사람을 차별하는 종교적 독선과 교만이 되었고,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가 차별과 분쟁으로 종말의 문을 열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참된 부활의 의미는 세상의 미련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것들을 통하여 그 의미가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약 말씀을 볼까요?

3.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창 27:38-40)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 형제입니다. 형인 에서는 살이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사냥을 좋아하는 들 사람으로 자랐으며, 동생 야곱은 조용하여 장막에 거주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매우 좋아해서 에서를 야곱보다 더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장막에 거주하는 야곱을 에서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이렇게 부모의 편애(偏愛), 곧 차별이 비극의 씨앗이 됩니다.

▲ 이삭과 리브가의 자년 편애

창세기 27장을 보면 나이가 많이 눈이 어두운 이삭이 아들 에서를 불러 장자 축복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창 27:4).”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야곱을 편애한 리브가가 이 이야기를 듣고, 야곱이 축복을 얻도록 속임수를 쓰게 됩니다. 야곱에게 에서처럼 변장해서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삭이 속아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게 됩니다. 이후에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에서가 야곱에게 속은 것을 알고 난 후의 이야기입니다. 에서는 이삭에게 자신에게도 축복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죽기 전에 내 마음껏(창 27:4), 곧 아낌없이 다 축복해 버려 남은 축복이 없는 이삭이 어쩔 수 없이 에서에게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에서가 분노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창 27:41)” 난리가 났습니다. 부모의 차별이 이제 형제간 살인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리브가가 지혜롭게 처신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창 27:42-45)

이삭과 리브가의 비뚤어진 자식 사랑의 결과, 에서와 야곱 사이엔 돌이킬 수 없는 갈등과 분열이 발생하여 결국 야곱은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하란의 외삼촌 댁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물론 리브가의 지혜로 형제간의 싸움은 없었지만, 아무튼 인생 말년에 갈등 관계로 원수 사이가 된 자녀를 바라보는 이삭과 리브가는 고통스러운 노후를 보냈을 것입니다.

이렇게 형제간의 다툼은 물론, 이제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자연과 인간의 분열로도 이어집니다. 곳곳에 지진과 기근이 생깁니다. 재난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교회가, 종교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무너질 것이라 합니다. 곧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참된 부활 신앙으로 살지 못하면 결국 심판의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복음서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4.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막 13:1-2)

잘 아시다시피, 예루살렘 성전은 세 차례 지어졌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솔로몬에 의해서, 두 번째는 스룹바벨에 의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롯에 의해서 지어졌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으면서 감사함으로 지었습니다. 아버지 다윗에게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성전 건축을 자기가 완성할 수 있었기에 감사의 맘으로 건축한 것입니다. 스룹바벨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거의 난민과 다름없는 백성들의 힘을 모아서 빈약한 재정과 노동력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지극한 정성으로 성전을 지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은 초라하기는 했지만, 뜨거운 신앙의 결정체였습니다.

그러나 헤롯의 성전은 이 두 성전과 달랐습니다. 비록 역대 성전 중 가장 잘 지은 성전이었지만, 하나님의 성전이 불신자에 의해서도 세워질 수 있다는 상징적 건물이 된 것입니다. 이방인인 에돔(이두매) 출신의 헤롯은 유대인들에 대한 유화 정책으로 헤롯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이두매는 앞서 구약에 나오는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성전에서 나가실 때,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른 다음,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놀라움과 감탄을 짓습니다. 고대 세계 건축물 가운데 뛰어난 건축물이었습니다. 크고 흰 돌들과 광택이 있는 풍부한 금으로 장식하여 지은 것으로 옛 예루살렘 땅의 약 6분의 1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성전만큼 장엄하고 웅장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엄청난 건물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성전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데 대한 예수님의 심판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대로 A.D. 70년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고 전 도시를 파괴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직 성전 서쪽 외벽만 역사를 위해 남겨 두었는데, 이 벽은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의 회한을 불러일으키는 ‘통곡의 벽’이라고 불립니다.

▲ 헤롯 성전 모형도(위)와 통곡의 벽(아래)

교회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이러한 성전 파괴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통곡의 벽이 지금 한국교회, 아니 우리 교회 벽의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종교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세상의 멸망도 늦출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오늘 마가복음 본문 말씀은 세상의 종말에 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막 13:3-4)

제자들이 종말의 때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막 13:5-8)

먼저 적 그리스도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가 대적합니다. 지진과 기근이 있을 것이나, 이것은 재난의 시작, 종말의 시작일 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부활 신앙으로 제대로 살지 못하면 종말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사실 종말은 ‘세상의 끝’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역설적으로 ‘지금-여기의 모순’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지금 장애인 차별과 혐오, 민족 간의 차별과 투쟁, 나라 간의 전쟁과 폭력은 물론, 기후변화와 자원 고갈, 핵전쟁의 위험과 바이러스의 창궐 등은 현재의 불의한 모순으로 다가 올 종말을 서둘러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끝에 관한 서사를 ‘아포칼립스’(apocalypse)라고 부릅니다. 아포칼립스라는 말은 희랍어로 ‘숨겨진 것을 드러낸다’라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이것을 종말론(Eschatology)으로 수용하여 이 ‘숨겨진 것’을 ‘진리와 심판’으로 보았고, 이것은 곧 ‘세상의 악을 심판하는 예수의 재림’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세계의 끝에 오는 ‘최후의 심판’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오히려 기다려야 할 구원의 사건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은 판타지가 아니라, 지금-여기서 새로운 사건이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부활 신앙도 어쩌면 종말 신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가령, 중세 말기 유럽의 ‘천년왕국운동’은 현실의 모순에 고통받던 농민들이 이 아포칼립스 서사를 통해 실제 권력을 무너뜨리려 했던 혁명운동으로 종말론이란 단지 판타지가 아니라, 세상을 변혁시키는 힘이었습니다. 4・19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장애인들의 인권투쟁도 같은 의미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끝이라는 서사는 역설적으로 ‘지금-여기의 모순’을 직시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이 4・19혁명기념주일인데, 지금 차별과 혐오가 난무하는 한국교회와 정치에, 세상의 미련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것들을 택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의 참된 의미입니다. 이렇게 부활의 아침에, 새로운 역사를 위해 기도하고 힘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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