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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그게 왜 궁금해요?(성)소수자와 그리스도교 16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 승인 2023.04.14 14:25
▲ ‘동성애’가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따져 묻는 것 자체가 폭력의 일종이다. ⓒGetty Image

1.

성소수자보다는 사실 동성애자, 아니 “자”자도 빼고 “동성애”라고 해서 “동성애가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 이런 말이 더 자연스러우신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런 말이 나올 때는 대체로 선천적/후천적이라는 말과 “동성애”에 대한 소위 “찬성/반대”라는 말이 겹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렇게 태어났다는 데 어쩔 거냐라는 말이 선천적-“찬성” 여기서 나오는 말이라면, 그렇게 태어났다는 건 근거 없는 말이다, 그러니 고칠 수 있다는 말이고 고쳐야 한다는 말이 후천적-“반대” 여기서 나오는 말이겠습니다. 사실 “반대”하기로 마음 먹으면야 선천적이라고 해도 그래도 고쳐야 한다고 말 못 할 것도 아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일단 성소수자를 두고 찬성이니 반대니 말하는 것 자체가 지난 달 칼럼에서 이야기한 평등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은 이 칼럼에서도 여러 번 말씀드렸었지요. 이성애자에 대해 찬성과 반대를 논하는 것이 말도 안 된다면 평등의 원칙에 따른다면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찬성과 반대를 논하는 것이 말이 안 될 테니까요.

그런데 찬성/반대 이야기를 접어둔다 해도 선천적/후천적 여기에 대해서는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싶습니다.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 이 질문에 정답을 찾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렇게 선천적/후천적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 것은 성소수자를 비롯한 ‘낯설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프레임의 문제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2.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일단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 운운에 대한 ‘드라이한’ 답을 드리자면 현재로서는 어느 쪽이라고 결론이 확실하게 난 게 없습니다. 동성애 유전자가 있다더라 하는 말을 들으신 분들이 있으실 것 같은데 그것도 그 연구 자체가 원래 이 유전자가 있으면 확실히 동성애자가 된다는 말이다 이런 결론을 낸 연구가 아닌 걸로 압니다.

다만 성소수자들의 자기 이야기를 읽어 보면 어느 때부터인가, 주로 10대 초반을 전후하여 자신이 이성애자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을 공통적으로 하고 있지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분들 중의 상당수가 그렇다면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났다는 말이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이렇게 이해를 하는 것이겠구요.

선천적으로 태어났다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 만하다 생각하기 때문인지 선천적이 아니고 후천적이다라는 말을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반대” 진영에서 꽤 많이 하죠. 여기서 짚고 갈 것이 후천적이라는 말 다음에 선택/취향 이런 말들이 어이어진다는 점인데요. 후천적이니까 취향에 따라 선택한 거 아니냐 이런 말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말에 담긴 뉘앙스는 이런 것이겠죠. 취향이고 선택이니 그만큼 가벼운 것이고 그러기에 잘못된 것이기도 하다는 뉘앙스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성소수자의 삶에 대해 선택이니 취향이니 가벼우니 잘못했니 이런 말을 함부로 해 대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은 선천적으로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걸까요.

3.

장애인 김원영 변호사는 그의 저서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사람을 존엄하게 대우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자기 인생의 자율적인 형성 주체, 즉 자기 인생의 작가/저자로서 대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때 저자라는 의미는 삶에서의 자율적인 선택만이 아니라 그 선택에 대해서 성찰적으로 하는 반응까지를 포함합니다.

특히 정신장애나 발달장애 등으로 지칭되는 장애를 겪는 사람들은 이 저자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겠고요.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장애인의 삶의 선택 중에 각자의 장애 조건에 대한 최소한의 보완 말고 다른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김원영 저자의 관찰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김원영은 장애인이든 아니든 자기 삶의 서사를 추상화/복잡화하는 능력의 차이가 존재할 수는 있더라도 그것이 각자가 구성한 삶의 서사의 고유성과 유효함을 부정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상당수의 중증 발달장애인도 각각의 사안들, 사물들을 특정한 의미를 중심으로 통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능력을 의심받을 정도로 중증인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 장애인 당사자의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공동 저자로서 상정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의 삶의 저자성에 대한 의심이 제기될 때 그 자리에 필요한 것은 김원영에 의하면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입니다. 소수자의 삶의 저자성에 대한 의심이 제기될 때는, 그 의심의 근거는 의심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의 예로 김원영은 이런 예를 듭니다. 어떤 장애인이 밥을 먹거나 용변을 처리할 정도로 팔과 다리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넥타이와 수트를 입고 외출하고 싶은데 그걸 할 정도는 안 되어서 활동지원사를 신청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런 활동까지 지원하기 위해 활동지원사를 써야 한다는 건 안 된다”라는 반응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의 방법이 적용되면 “왜 그런 활동에 활동지원사를 지원할 수 없는가”에 대해서 활동지원사 보조를 담당하는 기관들이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에는 또다른 측면도 있는데요. 밥과 용변 등 생명유지에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한 후 어떤 활동을 하느냐가 바로 삶의 고유성과 저자성의 차원인데 “넥타이와 수트”는 그런 저자성의 차원에서 필요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방금까지 이야기한 삶의 저자성이라는 차원을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이 성소수자로 살아가게 되는 이유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또한 설령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들, 그래서 그것이 가벼움 운운하는 뉘앙스로 해석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간에 성소수자들은 성소수자라는 요인을 자신들의 삶에 중요한 한 요인으로 하여 삶을 써 가고 있을 뿐인데 말입니다.

그것에 행여나 의심을 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대로 자신들의 의심을 정당화할 근거는 자신들이 가져와야겠지요. 물론 “성경에 동성애는 안 된다고 나와 있어”라는, 자기들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체 통하지도 않을 말을 근거랍시고 들고 오지는 말고 말입니다.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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