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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만이 살아남는 운동장을 버리자공정의 규칙을 새롭게(창세기 32:22~32)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04.19 00:12

성서에서 야곱은 많은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고 있듯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이름이 그로부터 유래하니 성서의 전승에서 그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큽니다. 그 야곱은 대개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요? 기존의 가치관을 뒤집는 방식으로보다는 기존의 가치관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성서의 주인공 야곱은 기억되고 있습니다.

교인들 사이에는 사람에 대한 한 가지 평가 기준이 있습니다. 소위 ‘믿음 좋은’ 사람과 ‘사람 좋은’ 사람 가운데 ‘믿음 좋은’ 사람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 충직한 사람이라면 사람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에서 다소 흠이 있더라도 상관없다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이 야곱과 에서 이야기입니다. ‘축복 받은’ 야곱, ‘최종적 승자’가 된 야곱에 초점을 맞춰,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읽고 해석합니다.

통념으로 보면 야곱은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수없이 위배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목을 붙잡았는가 하면, 속임수를 써서 장자권을 가로챕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일로 형의 분노를 사 외삼촌 집으로 도망쳐 더부살이하는 동안에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축재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야곱은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의 정통 계보를 잇는 적자가 됩니다.

사람들은 그가 최종적으로 승자가 된 사실을 주목합니다.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는 야곱은 결과적으로 일등으로서의 야곱입니다. 그와 같은 평가 기준은 결과주의에 집착하는 통념적 가치관이 그대로 신앙 논리 안에서 재현된 것입니다. 이것은 승자의 논리만이 정당화되는 우리 사회의 윤리 부재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태도입니다.

야곱은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어기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승리했기 때문에 주목해야 할 인물이 아닙니다. 야곱은 다들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게임의 규칙 자체를 뒤집어버렸다는 점에서 주목받아야 할 인물입니다. 야곱은 정해진 소수만이 일등의 대열에 낄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규칙 자체를 파기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그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규칙을 어겼으면서도 승자가 된 사실이 아니라 그 공정치 못한 규칙을 어떻게 파기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가는가 하는 점입니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적으로 인정받는 존재, 악전고투 끝에 원하는 목표를 이루어낸 입지전적 인물로서의 야곱이 아니라, 경쟁을 해야만 살아남는 삶의 법칙을 부정해버리고 새로운 윤리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한 인물로서의 야곱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말씀은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결정적 계기를 매우 극적으로 전합니다. 장자권을 빼앗아 형의 노여움을 산 야곱은 한 동안 피신해 있던 외삼촌 집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형과의 화해를 위해 고향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하루 전 얍복강 나루에 이르러 먼저 가족과 일행을 건너보낸 다음 혼자 뒤에 남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한 사람이 나타나 야곱과 힘을 겨루게 되었습니다. 밤새도록 힘을 겨뤘는데, 그 사람은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편법으로 엉덩이뼈를 쳐 야곱이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밤새 그 사람과 힘겨루기를 하였던 야곱은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차렸는지, 이제 그를 붙잡고 축복해달라고 졸라댑니다. 여기에서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다’ 곧 ‘속이다’는 뜻의 이름 대신 새로운 이름을 얻습니다.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겨루다’ 또는 ‘하나님 통치하소서’라는 뜻을 지닌 이름입니다.

이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은 야곱은 이제 자신과 힘을 겨룬 신적 존재의 이름을 묻지만, 그분은 이름을 밝히는 대신 야곱을 축복합니다. 이 일을 겪은 야곱은 자기가 하느님을 직접 뵙고도 살아났음을 경이롭게 여깁니다. 그리고 그 사건의 장소를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의 ‘브니엘’이라 이름 붙입니다.

이 이야기는 야곱이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극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야곱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을 뜻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야곱의 ‘어떤 삶’을 하나님이 승인했을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바로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야곱의 삶과 달리 새롭게 조명해야 할 야곱의 삶입니다.

우리는 우선, 야곱이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가 아니라, ‘둘째’라는 이야기입니다. 쌍둥이라고는 하지만, 단 한순간 늦게 나와도 아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결정된 운명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맏아들을 중심으로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가족관계, 사회관계 안에서 그것은 결정적 차이를 나타냅니다.

‘맏아들’은 ‘기득권’을 의미한다면, ‘둘째’는 ‘상실’을 의미합니다. 맏아들은 어떤 경우에나 당연하게 우선시 됩니다. 그러나 둘째는 저절로 인정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스로 피나는 요구와 주장을 펼쳐야 하고 또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 이야기에서, 야곱이 취하는 행동방식은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야곱은 그 성격 면에서도 에서와는 대조를 이룹니다. 에서는 날쌘 사냥꾼이 되어 들에서 살고, 야곱은 성격이 차분한 사람이어서 주로 집에서 살았습니다. 형 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아우 야곱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형 에서는 근육질의 남성적 힘을 상징한다면 아우 야곱은 여성의 섬세함을 상징합니다.

▲ Illustrators of the 1897 Bible Pictures and What They Teach Us by Charles Foster ⓒPublic Domain

남성과 여성의 차이,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 역시 첫째와 둘째와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결정적 의미를 갖습니다. ‘남성’은 ‘기득권’을 나타냄과 동시에 이른바 ‘정상의 질서’, ‘정상의 방법’을 나타내는 반면, ‘여성’은 ‘상실’ 또는 ‘결여’를 나타냄과 동시에 소위 ‘정상 사회’로부터의 ‘일탈’을 나타냅니다. 더욱이 남성인 야곱이 여성적 특성을 가졌다면 통념상 상황은 더욱 심각합니다.

‘발뒤꿈치를 붙잡고 매달릴’ 수밖에 없고, 정상적인 안목에서는 ‘속이는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이후의 야곱의 행동은 계속 그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집니다. 형 에서는 정주한 채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야곱은 그 고향을 벗어나 객지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탈’입니다.

객지의 외삼촌 집에서도 비슷한 상황은 계속됩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하는 동안 야곱은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 라헬을 얻기 위해 야곱은 7년간 열심히 일하지만, 결과는 원하는 대로가 아니었습니다. 둘째가 첫째보다 먼저 결혼할 수 없다는 관습 때문에 먼저 첫째 딸 레아와 동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안 야곱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 다시 7년간 일을 더해야 했습니다. 첫째를 사랑했더라면 7년으로 족했을 것을, 둘째를 사랑한 죄로 7년을 더 일해야 했습니다.

두 아내를 얻고 자식을 낳은 후에도 야곱이 통과해야 할 관문은 또 남아 있었습니다. 이제 그만하면 그 동안 수고한 대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야곱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외삼촌 라반은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다가, 그 대가를 받는 방법을 야곱이 결정하도록 하되, 이제부터 그 방법을 취하도록 하자는 교묘한 제안을 합니다. 어떻게 하든 호락호락 내보고 싶어하지 않는 기성의 정상사회 기득권자의 ‘현명한’ 제안입니다. 하는 수 없이 야곱은 그 제안을 따릅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습니다. 얼룩무늬 양만을 자신의 몫으로 챙기겠다고 해놓고, 일종의 고대판 ‘유전자공학’을 동원해 튼튼한 얼룩무늬 양들을 양산합니다. 튼튼한 암컷들이 교미할 때에는 얼룩무늬 나뭇가지를 보여 주어 얼룩무늬 양을 낳게 하고, 약한 암컷들이 교미할 때에는 그 가지들을 보여주지 않아 무늬가 없는 양들을 낳게 합니다. 과학적으로 입증하기는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자신에게 정상적으로 합당한 대가를 치르기를 주저하는 외삼촌의 의도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비정상적인’ 방법입니다.

기존의 질서에서는 당할 수밖에 없는 약한 자가 발휘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마치 형에게서 장자권을 빼앗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득권자의 의도를 역으로 이용하는 교묘한 지혜입니다. 야곱은, 장자는 근육질의 야성적 남성이어야 한다는 관념을 그대로 올무 삼아 뒤집어엎었으며, 이렇게 하면 네가 빠져나갈 길이 없으리라는 외삼촌의 생각을 역시 그대로 올무 삼아 상황을 역전시켜버립니다. 야곱은 그 지혜로 승리를 거둡니다. 야곱은 이렇게 일관되게 이른바 정상사회의 뒷다리를 붙잡는 전략을 택합니다.

그 야곱이 하나님과 맞대결을 하고 게다가 한술 더 떠 힘으로 이겨내기까지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축복의 확약까지 받아냅니다. 그 사건은, 지금까지 야곱이 살아온 삶에 대한 항변이요 그 항변이 정당하다고 인정받는 과정을 극적으로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씨름을 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은 정녕 첫째들의 하나님일 뿐입니까?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 그들에게만 계속 복을 내리는 분입니까?’ ‘나 같이 둘째로 태어나 약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당해야만 한단 말입니까?’ 이렇게 항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야곱에게 축복을 내리는 하나님의 태도는 어떤 의미일까요? ‘네가 옳다! 너야말로 진실로 강한 자다! 나는 바로 너의 하나님이다!’ 이를 선언한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운명적으로 약한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이 태어난 것이 둘째 아들 야곱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빼앗긴 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기존의 사회에서 힘으로 지배하는 방식을 답습하지 않고 약한 자가 발휘할 수 있는 지혜를 통해 운명을 타파해나갔습니다. 진정으로 약한 자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야곱의 이야기는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약한 사람들의 힘, 그것은 강한 사람들의 힘을 그대로 이어받는 데서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 힘은 ‘근육질’의 힘, 완력을 무력화시키고 균열시키는 지혜에서 생겨납니다. ‘운명’을 타개하려는 노력과 ‘진실’을 향한 대결, 씨름을 통해 터득되는 지혜입니다. 이는 성서가 끊임이 없이 환기하고 있는 진실입니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 한 때 모든 매체를 뒤덮은 적이 있던 광고 문구입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상식에 기댄 문구였던 것만큼 그 광고 효과가 컸을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그 상식에 반합니다. 성서의 진실은 그 상식에 반합니다. 이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공정과 정의의 규칙을 전혀 새롭게 세우도록 요구합니다.

부활절 둘째 주일에 새기는 본문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야곱이 항변한 진실이 통하는 것이야말로 부활사건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때마침 4.16 9주기를 맞이합니다. 그 진상이 규명되지도 않고 책임소재도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지난 해 10.29 참사를 또 겪어야 했습니다. 공적인 책임이 있는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사태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평범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안전하지 않은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눈부신 경제적 성장을 이룬 사회가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질서와 가치관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력한 자에게는 관심을 집중하지만 무력한 자는 내팽개쳐버리는 사회가 문제입니다. 둘째를 기억하는 사회, 아니 꼴지의 형편을 헤아리는 사회가 될 때 우리는 다른 삶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뜻을 되새기며 부단히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헌신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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