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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과 세월호 운동,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위한 여정김은호 안산희망교회 목사가 말하는 지역에 희망이 되는 교회
정리연 | 승인 2023.04.19 01:08
▲ 첫 담임목사가 된 안산희망교회에서 김은호 목사가 만난 장애인으로 인해 그의 목회철학이 바뀌었다고 한다. 장애인이 불편한 교회가 잘못되었다는 깨달음이었다. ⓒ정리연
“아! 이렇게 불편한 게 맞는 거구나. 불편해야 하는 게 정상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면서 한 대 맞은 것 같았어요.”

비장애인이 불편한 게 정상인 사회

교회에서 어떤 프로그램을 하려고 할 때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단다. 장애인 교우가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별도의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따로 예배를 드리잖아요. 장애인들이 불편할까 봐요.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다는 거죠. 비장애인이 불편하니까 구별을 해왔던 거예요. 진심으로 장애인을 위한다면 함께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동안 따로 뭔가를 만들어서 장애인들을 위한다고 해왔던 게 거짓말이었다는 생각이 확! 들더라고요.”

장애인 목회를 시작한 지 한참 후에서야 깨달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늘 고민했던, 사회가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배제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두게 되었다. 그전에는 희망교회가 장애인 사역을 하는 교회는 아니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장애인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연고도 없던 첫 목회지인 곳에서 말이다.

“2008년도에 안산으로 내려왔어요. 교회는 지역과 함께할 수밖에 없겠다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어린이를 위한 작은 도서관 만들기 준비 모임을 시작했어요. 4년의 준비 끝에, 비록 컨테이너이지만, ‘와리마루’라는 도서관을 개관했어요. 또한 엄마들이 ‘와리맘스’ 팀을 꾸려서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고요. 이런 게 모두 마을 공동체를 형성해가는 하나의 단초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안산노동인권센터를 찾아갔어요. 교회 집사님이 그 기관의 운영위원이었거든요. 거기에서 장애인이면서 장애인 운동을 하시는 분을 알게 되면서 가깝게 지냈어요. 어느 날 그분이 저에게 ‘상록구에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이하 자립센터)를 만들려고 하는데 목사님이 좀 도와주시면 좋겠어요’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장애인들을 만나기 시작했죠.”

안산에는 두 개의 구가 있는데(단원구와 상록구) 행정 상, 각 하나씩의 자립센터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단원구에는 이미 센터가 있었다. 그런데 지원금을 받기 시작하면서 처음의 기조에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고, 이에 실망한 이들이 힘을 합쳐 상록구에 온전한 (장차연 계열의) 자립센터를 만들게 된 것이었다. 모든 과정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바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채워주시는 시간이었다.

굳이, 먼 거리를 찾아온 장애인 한명으로부터

어느 주일, 김 목사의 소문을 듣고 교회로 한 장애인이 예배를 드리러 왔다.

“평택에서 2시간 걸려서 장애인 한 분이 오셨어요. 휠체어로 지하철 타고. 지금은 엘리베이터 있는 건물로 옮겨왔지만, 그때는 예배당이 상가 3층에 있었는데 계단만 있었어요. 주일마다 제가 그분을 업고 올라가서 함께 예배를 드렸죠. 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이 평택에서 장애인 자립생활센터와 야학을 하고 있었어요. 그냥, 혼자서 조그맣게 차려 놓고 장애인들하고 같이 해왔던 거죠. 그런데 그 지역에 큰 규모의 장애인 야학이 생기면서 그분이 운영하던 야학이 문을 닫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저한테 제안을 하셨어요. 안산에서 장애인 야학을 함께 하자고요.”

김 목사는 가진 건 없었지만 자립센터 기획을 시작했다. 민중교회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안산에 첫발을 디딘 순간을 되돌아보면, 자연스러운 발걸음이었다. 언제나 사회에서 배제되고 약한 자들에게 눈을 돌리고 손을 내미셨던 예수님처럼 말이다. 1년여를 준비한 마침내, 문을 닫게 된 노동센터가 가지고 있던 보증금 3백만원으로 야학, ‘나무를 심는 학교’가 문을 열게 되었다. 처음엔 10평에서 6명의 장애인으로 시작했는데 소문이 나면서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나무로 자라날 씨앗을 품는 심정으로

“지금이야 장애인들이 공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좀 나아졌지만, 옛날에는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한글을 읽고 쓰는 것만 가르치는 건 원하지 않았어요. 제가 주안점을 뒀던 건 인문학이에요. 의식이 중요하잖아요.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저희에게 오는 장애인들은 다 자립해서 사는 성인이었는데, 대부분 피해의식이 많았어요. 무의식적으로 의존하려는 것도 크고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시민의식, 주인의식 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야학이 그냥 단순하게 글자를 가르치는 기관으로 남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우리는 복지 기관이 아니라, 학교다. 학교가 가지는 교육의 목적과 가치, 지향이 있다는 걸 늘 강조했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복지시설로 여기면서 자꾸 뭔가를 요구하기도 했고,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면 정치 지향적이라면서 불쾌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세월호 사건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 목사는 그들에게 계속 말했다.

“뭘 하지 말라고 하지 말고 뭔가 하자고 얘기해라. 그리고 여기는 학교다. 학교는 학교 나름의 가치와 방향이 있다. 나무 학교가 가지는 가치와 핵심적인 의미는 가난한 자,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지역 사회에서 가장 큰 아픔과 고통을 당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그게 학교의 가치이자 목적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후 지금껏 그 자리에서 함께 할 수 있었던 것도 김 목사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방향 때문이었을 거다.

4월 16일, 나를 변화시킨 그날

올해는 내가 민중교회에 대한 비전을 품고 신학대학원에 들어간 지 20년째 되는 해다. 내가 고백하는 예수, 내가 함께하고 싶은 교회는 늘 민중 곁에서, 그들과 함께 삶의 자리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신앙고백이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신앙고백의 탈을 쓴 내가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나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민중교회에 대한 열정만으로 무작정 안산으로 내려왔다. 성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회사의 신입사원처럼 나는 교회라는 외투를 걸치고 늘 일과 관계 속에 지쳐갔다. 그 과정에 ‘나’라는 존재는 없었고 민중교회를 꿈꾸는 이름도 없는 아무개 목사가 있었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웠고, 늘 무엇이든 잘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에 괴로웠다. 그렇게 패배 의식에 갇혀 안산을 떠나야 할 대가 왔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일로 떠남을 유보하게 되었을 때, 4.16은 낯선 손님으로 찾아왔다.(김은호, “봄 그리고 만남[春, 416, 나]”, 416생명안전공원 예배팀 엮음, 『포기할 수 없는 약속』 [서울: 새물결플러스, 2023] 中에서)

“그전까지는 어떻게 살았냐면, 워크홀릭이었어요. 내 몸을 완전히 혹사하면서 거기에서 희열 같은 걸 느꼈어요. 내가 없었죠. 나의 존재가 아니라 일이 있었던 거죠. 일을 통해서 인정받고 만들어진 성과를 통해서 흐뭇해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416을 겪고, 아프면서 바뀌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사는 지역의 사건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김 목사처럼 하지는 않는다. 그 사건으로 인해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장기간 정신 상담을 받았다는 그. 9주기가 되기까지 그를 세월호에 묶어둔 끈은 뭘까?

▲ 김은호 목사의 목회철학을 바꾼 두 번째 사건은 세월호 참사와 만남이었다. 자신이 목회하는 지역의 학생들 69명이 희생되면서 이웃을 만나야 하는 자리로 이끌어졌다고 한다.
“제가 사는 와동에서만 69명의 학생이 하늘의 별이 되었어요. 사람들이 가끔 제게 물어봐요. 어떻게 9년 동안 416과 함께할 수 있었는지요. 그건 누구를 위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저를 위한 거였거든요. 유가족을 위한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했다면 못 했을 거예요. 416과 관련된 재난 피해자들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도리어 나를 위한 운동이라는, 사회 운동에 대한 새로운 게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제가 해올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환대-돌봄-연결, 이 주제는 사회 운동을 통해서 배운 건데 여전히 제 목회와 삶에 굉장히 중요한 지표예요. 416 운동도 이런 주제와 더불어서 함께 해오고 있는 거고요.”

지난 9년 동안 20명 되던 교인이 다 떠나기도 했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우유 배달, 아파트 건설 현장 일도 했다고 한다. 서울의 큰 교회에서 청빙이 오기도 했지만, 거절했다는 김 목사는 자신이 가장 힘들었을 때 416 활동을 가장 열심히 했다고 회고했다. 

세월호 참사가 누군가의 아픔이 아니라, 우리 마을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의 아픔이자,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라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위의 책, 186쪽)

“제가 기장 목사이지만, 원래는 예장 통합 출신이에요.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외삼촌이 장신대 교수님이셨는데 목회상담학에서 한국의 거의 대부 같은 분이셨어요. 어릴 때부터 그런 외삼촌을 보면서 나중에 커서 ‘나도 저런 목회를 해야지’ 생각했지요. 그런데 대학교 가서 학생 운동하고, 졸업 후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바뀌기 시작했어요. 서강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스님 밑에 2년 정도 있다가 한신대 신대원을 갔는데, 거기를 가게 된 동기가 있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제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는 제가 너무 오만방자한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나는 그냥 그저 그릇이구나’라는 고백을 하게 됐어요. 그릇이 잘 쓰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신대원을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는데, 민중 교회를 하고 싶어서 예장으로 안 가고 기장으로 갔어요.”

희생자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를 찾다

워커홀릭, 나는 없고 일만 있었다는 김 목사는 416 사건을 겪으면서 ‘나’라는 존재를 찾게 되었다. 민중 교회를 하겠다며 안산에 온 지 16년, 그중의 절반 이상을 416과 함께 했다. 그것은 어딜 가든지 세월호 목사로 알아보는 그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상징이 되었다.

416은 그렇게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봄날에, 새로운 생명의 가르침과 새롭게 태어남의 의미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모든 생명을 향한 ‘환대’의 의미와 모든 생명의 ‘연결’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불특정 다수가 아닌 자신만의 꿈과 삶의 자리를 지닌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함을 새롭게 알아차린 것이다. 그 결과 나 역시 불특정 다수가 아닌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위의 책, 182쪽)

“416이 한국 사회에 준 선물이 있어요. 하나는, ‘넌 누구니?’라고 물어봐 준 거예요. 전에는 참사가 일어나면 그냥, 뭉뚱그려서 ‘피해자들’이었어요. 누군지 궁금해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416이 그걸 찾아냈어요. 피해자들이 아니라 ‘호성’이 ‘예은’이 ‘영만’이... 그들의 이름을 다 찾아낸 거예요. 얘는 꿈이 뭐였고, 얘는 어떻게 태어났고, 얘는 뭘 잘했고 취미가 뭐였고 장기가 뭐였고.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다 찾아준 거죠. 그냥 피해자들이 아니라.
이태원 참사 때 이름 공개와 관련돼서 논란이 있었는데, 그건 4.16 운동을 모르는 사람들인 거죠. 사회적 참사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000가 죽었어’가 굉장히 중요해요. ‘너 이름 뭐니? 너의 이름이 밝혀져야 네가 죽은 거야. 그래야 우리가 너를 기억할 수 있어’ 거든요. 그래서 이름 공개가 그만큼 중요했던 거예요. 이름 공개되면 공격당한다? 그런 차원이 아니었던 거예요.”

피해자들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김 목사는 스스로에게도 묻게 되었다. 넌 누구니? 이름이 뭐야? “내 이름은 김은호야.” 은호는 어떤 사람이야? “응, 나는 욱! 하는 사람이고 이걸 좋아하고 저걸 싫어해.” 넌 지금 괜찮아? 라고. 세월호 사건은 일상과 목회, 가치관 등 모든 것을 흔들었고, 또 다른 무엇인가를 찾을 수밖에 없었던 몸짓에 새순을 돋게 해주었다. 자신의 이름을 찾아주었으며, 막연하게 꿈꾸던 민중 교회를 만나게 해주었다.

함께 울다, 서로의 몸과 마음에 기대어

“또 하나는 416 참사를 경험하고 나서 지역 사회에서 어려움이 있었어요. 지역의 많은 주민이 상처받은 피해자들인데, 어떻게 만나야 하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지? 고민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만들어낸 게 이웃대화 모임이었어요. 전문가들을 초청해서 마을 주민들을 위로하고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그 당시 한국폭력대화센터 대표님이 캐서린이라는, 널리 알려지신 분이었는데 모든 일정을 조정하고 직접 오시기도 했어요.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마을 주민을 모아놓고 서클을 만드시더니, ‘울어도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아직도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 다 같이 울었어요. 그렇게 대화 모임을 시작했고 성과가 너무 좋았어요. 왔던 전문가들이 저한테 ‘목사님 저희가 계속 올 수 없으니까 강사 양성 과정을 만드시면 어떨까요?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2015년도에 이웃 대화모임 진행자 양성 과정을 시작했다. 지금은 이웃대화 진행자 양성과정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 모임을 하고 있다. 매주 화요일 오전마다 모인다. 자신도 이 모임으로 인해 살아났다고 한다. 그 안에서 지지받고 위로받고 공감 되어지는,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말이다.

대화 모임 참여자들은 강의하러 학교도 나가기도 하고, 회복적 경찰활동을 하고 있는데, 사소한 갈등이 생기면 조정을 해달라고 경찰서에서 요청이 온다고 한다. 지역 사회가 좀 더 안전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환대하고 연결된 공동체로 만들어 가기 위해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이제는 ‘주민 갈등 자율 조정 센터’라는 걸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416 피해 당사자들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2차 피해자들인 마을 주민들과 어떤 접점을 만들어야 하는지, 이들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해야 하는지에 대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런 나의 고민들이 마을에서 “치유와 회복을 위한 이웃대화 모임”을 열게 하였고, 이후 지난 9년 동안 지속적 활동을 통해 “돌봄과 성장 이웃대화 모임”이 되었다. ··· 이 친구들을 우리의 개별적 기억만이 아닌 마을교육공동체를 통해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6년이 지난 2020년 와동에 작은 공간을 얻어 “별들과 함께하는 와동 온마을 학교”를 열었고, 이곳에서 다양한 416 사업 및 마을교육공동체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위의 책, 187쪽)

그렇다면, 김 목사가 바라는 교회의 참모습은 어떤 걸까?

▲ 김은호 목사는 또 다시 10.29참사를 만나며 새로운 목회철학을 가다듬고 있다. ⓒ정리연

“교회가 방주의 역할을 내려놨으면 좋겠어요. 나만 살려고 하지 말라는 거죠. 저희 교회에 10명이 모이는데 늘 얘기해요. 우리 교회에 온 사람만 교인이 아니다. 안산에 63만, 와동에만 4만명 정도 되는데, 모두가 교인이다. 교회의 역할이 점점 중요하게 되는 시대가 될 거예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의 교회 구조나 모습으로는 불가능해요. 지금 교회는 다 방주가 되어 있으니까요. 구원받고 싶으면 다 일단 교회로 오라고 하잖아요.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에요. 어디, 교회에 구원이 있어요? 구원은 예수님께 있지 교회에 있지 않잖아요. 얼마 전 부활절 설교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무덤에 있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주님은 하늘에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나눴어요. 예수님은 우리 삶의 현장에, 우리 이웃들의 모습으로 그들 곁에 계신다, 그게 주님이시다 라고요. 똑같아요. 예수는 교회에 있지 않아요. 현장에 계시니 우리도 현장으로 가야죠. 그래서 교회가 구원의 방주 역할을 좀 내려놨으면 좋겠어요.”

희망교회 교인은 열 명 남짓. 교회가 운영될 수 있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보내주는 헌금이다. 교회에 나오지는 않지만, 희망교회는 우리 지역 사회에 꼭 필요한 교회라면서 416가족 중 9분과 다른 교회 권사님이신 빈대떡 가게 사장님이 십일조를 보내주신다. 이게 바로 지역 교회, 민중 교회의 모습 아닐까?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마을의 가난한 자들, 이름도 없이 소외받던 여성들, 어린아이가 가진 것을 드려서 함께 나누고 먹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루하루 일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해가 떴네? 바람이 부네? 아, 시원해. 감사해라.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꽃이 피는 것처럼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에 대한 경이로움, 신비로움을 발견하는 게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해요. 일상의 삶도 뭔가 대개 특별한 게 아니라 순간순간 그 속에서 내가 감탄할 수 있는 것, 그게 하나님 나라의 신비이지 않을까요? 생활 속에서 그런 체험들이 늘 있었으면 하고요, 바로 그게 기쁨이고, 황홀함이고, 아름다움이지 않겠어요?”

이제 김 목사는 하나의 교회를 넘어 많은 교회가 함께 하는, 교회연합 운동을 꿈꾼다.

“교회가 목사를 닮는 게 아니라, 목사가 교회를 닮아가고 있어요. 교회는 하나이고, 목사는 수만 명이잖아요. 하나의 교회를 목사가 닮아가야 하는데, 교회가 수많은 목사를 닮아가려니 교회 연합운동이 되겠어요? 교단 내에서도 지역에서도 힘들어요. 모든 교회가 세월호 같은 사회적 참사에 매달려야 한다는 건 아니에요. 사회에 얼마나 이슈가 많아요. 모든 교회에게 그런 걸 요구할 수는 없어요. 교회마다 자기 특성에 맞게 주제를 잡고 사회적 이슈와 현장에 대한 사역을 하니까요. 통일, 생태, 이주민, 노동자, 농업 등 다양해요. 그게 무엇이든지, 우선은 교회들이 교회로서의 역할을 잘해나가면 좋겠어요.”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약속

세월호 참사 이후 9년이 지났지만 제대로 된 진상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책임자들에게 어떠한 처벌도 없다. “진실이 묻혀버린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는 416 사건을 경험한 증언자이자 ‘416 이후’를 함께 만들어가야 할 변혁의 주체”임을 강조하는 김 목사님의 눈에서 맑은 방울이 맺혔다. 그건 지금껏 장애인들과 함께, 416가족과 함께, 시대와 함께, 별이 된 아이들과 함께 해 온 아픔의 눈물이자, 자신을 정화시키는 치료제가 아닐까?

‘재난 유토피아’라는 말이 있다. 어떻게 ‘재난’과 ‘유토피아’라는 말을 같이 쓸 수 있을까? 재난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난 과거이지만 유토피아는 현실이고, 희망이자 미래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재난이 사건이 되었을 때, 그 사건은 우리에게 새로운 유토피아를 선물로 줄 수 있다. 한 마을이 온통 정전이 일어나는 사건이 있었다. 마을 전체의 정전을 겪고 나서 사람들이 자신이 머물렀던 공간에서 광장으로 나와 함께 하늘의 별을 보게 되었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도 함께 광장에 모여 별을 보고, 별이 주는 빛을 통해 정전되어버린 이 사회를 밝혀갈 수 있기를 마음 모아 빌어본다.(위의 책,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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