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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미래부활, 다시 시작이다!(예레미야 15,15-21; 누가복음 24,28-35)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3.04.20 14:21
▲ Robert Zund, 「The Road to Emmaus」 (1877) ⓒPublic Domain

부활은 어떤 의미에서든 우리에게 큰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영역 밖에서 다가올 미래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회의적인 눈길로 부활을 바라보고 때로는 간절히 소망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물론 부활의 과정이나 시기를 모르고 그리스도를 통해 확인된 소망을 가질 뿐입니다. 우리 앞에 있는 이 미래의 사건이 우리 역사 속에서 일어나기를 기다립니다.

4.3항쟁과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로 죽음의 늪을 지나고 있는 우리 역사에 부활의 소식이 전해지기를 빕니다. 생명과 평화의 길을 그 희생자들과 함께 다시 걷기 시작함으로써 부활을 사는 사람이 되기를 빕니다.

믿음은 미래를 살고 미래를 현재로 옮기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나 과거에 예속된 것일 수 없습니다. 땅에 발을 딛고 있어서 과거로부터 완전 자유로울 수는 없을지라도 과거는 우리의 현재에 대해 전적인 구속력을 갖지 못합니다. 우리 삶의 동력은 오로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미래로부터 옵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새피조물이란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의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하나님의 미래를 받아들인 사람을 뜻합니다. 미래는 부활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생명의 미래를 향해 자기를 여는 것이 부활입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현실을 자신의 현실 속에 심고 키웁니다. 이렇게 새로운 현실을 이 땅 위에 만들어내는 새로운 피조물이 곧 우리이기를 빕니다.

과거에서 벗어나 새미래를 향해 발길을 옮긴 이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예레미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받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왕권과 결탁한 성전 세력은 하나님 없는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대신 성전이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러한 이스라엘을 향해 성전을 믿지 말라고 되풀이 되풀이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믿던 실로를 버리신 하나님이시니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으라고 절규합니다. 이스라엘은 믿음의 상징일 수 있는 성전과 그 성전이 지시하는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정의가 세워지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예언자로 기대했던 것은 정의였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그가 아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그 땅에 마땅히 세워졌어야 할 정의를 그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질문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 있느냐?

그는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정의를 외쳐왔지만, 몸은 지치고 정의는 멀기만 했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더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위로의 말은 커녕 그를 다그치고 몰아세우는 듯 합니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은데, 겨우 이 정도 가지고 그러면 앞으로 어쩔 셈이냐고 핀잔하십니다.

외쳐도 달라지는 것이 없으니 예레미야는 더는 버틸 힘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희망마저 붙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나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끝난다면 참 허망한 결말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위해 한평생을 보냈는데,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떠나 어떻게 얼마나 지냈는지 모릅니다.

이때 하나님은 참으로 안타까우셨을 것입니다. 그가 선택한 예언자에게도 이해받지 못하셨으니 속이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돌아오기만 기다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실 수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경고하고 돌아킬 수 있기를 기대하십니다.

예레미야를 다시 부르십니다. 처음 부르실 때와는 다릅니다. 네가 만일 내게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우겠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간절함이 묻어나옵니다. 하나님 앞을 떠난 자에게 다시 돌아올 기회를 주고, 돌아오면 그에게 처음 주었던 약속을 다시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과 예레미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애정에 예레미야는 마침내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고 그 이후엔 끝까지 하나님의 길을 갑니다. 멀어졌던 예레미야를 하나님은 다시 부르시고 그의 가슴에 다시 희망을 지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다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부활의 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실망하고 힘을 잃고 물러섰던 예레미야를 하나님은 자기와 이스라엘 앞에 다시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마찬가지 경우일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사건을 이해하기 힘들었고 받아들이기는 더더욱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사건 직후 엠마오로 내려간 것은 경우는 다르지만 예레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의 죽음에 그들이 가졌던 모든 꿈을 묻고 예수 앞에서 떠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 같은 사람마저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고 허망하게 십자가에 달렸으니 무슨 희망을 어디서 찾겠습니까? 그들이 부활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나 확인할 수 없었고, 그러므로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떠남과 부활 소문.

엠마오로 내려가는 그들은 그 소문을 말하지 않고는 길을 갈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하고 또 해도 예수 사건이 그렇게 죽음으로 끝난 이유를 찾을 수 없었고 또 믿을 수는 없어도 그 소문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길 위에는 답답함과 두려움만 남아 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을 찾아오셨고 그들의 이야기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들은 예수 사건을 모르는 듯 보이는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는 그러한 그들에게 어리석고 마음이 둔하다고 책망하십니다. 매우 낯선 풍경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에게도 하나님은 그리 하셨습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고난의 의미가 부활에 있음을 일깨워주십니다.

이때 낯선 자에게서 이 말들은 듣는 그들은 어떠했을까요? 나중에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이 감동으로 뜨겁지 않았던가? 뜨거운 마음은 예수를 붙잡았고 예수와의 식사는 그들의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그 감동과 열린 눈은 엠마오 길을 바꿔 예루살렘 길로 향하게 했고 자신들의 일을 증언하게 했습니다.

두려움으로 얼어붙었던 마음이 뜨거워지고 의심으로 덮였던 눈이 깨달음으로 열리는 이것에서 부활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의 부활은 일회적 사건이지만 그 사건은 지금도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죽음의 장벽들 앞에서 두려움 가운데 죽어가지 않게 우리를 일깨우는 부활입니다. 이해의 한계에 부딪혀 의심으로 우리의 영혼이 시들어갈 때 감동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는 부활입니다. 부활은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의심에서 확신으로, 두려움에서 뜨거움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부활은 그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그 시작이 우리에게 있기를 빕니다. 예수의 부활이 우리와 우리 사회 구석구석의 절망과 어둠들을 몰아내기를 빕니다. 평화와 희망의 부활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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