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가 제정한 ‘장애인의 날’을 거부하고 지역사회에서 동등한 주체로 살아가길 원하는 장애인들이 4월20일을 ‘장애인 차별철폐의 날’로 명명하고 거리로 나왔다. ⓒ정리연

꽃과 조명, 화려하게 장식된 ‘홀’의 둥근 테이블에는 단정하게 차려입은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둘러앉아 있다. 멋지게 차려입은 사회자가 낭랑한 목소리로 “우리나라는 장애인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매년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며 식을 시작했다. 관계자들이 소개되고, 그들 역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진 차림새이다.

무대 앞 양쪽에는 “제43회 장애인의 날 기념식-차별은 없이/ 기회는 같이/ 행복은 높이”라는 슬로건이 걸려있다. 여러 명의 장애인이 ‘장애인 인권헌장’을 낭독하고, ‘장애와 역경을 극복’한 장애인에게 상을 수여했다. 총리를 포함한 높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그들을 격려하고 장애인 정책의 현재와 나아갈 방향을 얘기하면서 매우 뿌듯해했다.

장애인들을 인간으로서 존귀하고 평등한 존재로 인정해주고 있음을 생방송으로 증명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장을 단속하는 경찰도 없었고, 가로막는 선도 없었다. 그곳에 있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거룩한 예배에 참석한 듯, 웃음기 없이 엄숙하고 경건해 보였다. 의자에 가만히, 조용히 앉아 있지 않으면 혼날 것 같은 분위기라고 할까.

거칠고 차가운 아스팔트를 뒤덮은 해방의 노래

1200여 명의 경찰이 둘러싸고 있는 대통령실이 있는 삼각지역 도로 위, 부드러운 조명도 잘 차려입은 사람들도 없다. 화려하게 장식한 꽃도 없고 투박하게 만들어진 무대는 ‘휑’했지만, 곧 인간 해방, 장애인 해방을 외치는 자들의 열기가 가득 채워졌다. 테이블은커녕, 플라스틱 의자와 맨땅에 앉아서, 혹은 서서 외쳤다.

‘투쟁’을 외침으로 시작해 ‘투쟁’ 결의로 마치는 사람들.

삐뚤빼뚤한 글씨로 직접 쓰고 만든 것부터 귀엽고 알록달록 다양한 피켓들, 전국에서 모인 장애인 단체들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보슬비가 내리든 말든, 어느 지역에서 왔든지 경계 없이 서로 어울려 자유롭게 움직이며 웃고 노래했다. 이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어금니 꽉 깨물면서 투쟁하는 싸움꾼(?)으로만 알았다면 큰 오해다. 얼마나 유쾌하고 끼가 많고 다양한지! 

거룩한 ‘홀’에 곱게 모셔지는 것을 거부하는, 장애인이지만 ‘장애인의 날’을 거부하는 이들은, 그렇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다. 전장연은 1981년 제정된 시혜와 동정으로 얼룩진 ‘장애인의 날’을 거부하며, 장애인의 권리가 지역사회에서 온전히 실현되는 날을 만들기 위해 2002년부터 매년 4월 20일을 ‘장애인차별철페의 날’로 명명하고 투쟁해왔다.

“다름과 편견을 넘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존재에 감사, 다름을 극복하고 조화를 이루며 화합하여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변화되는 세상을 희망한다.”

정말 아름답고 평화로운 문장이다. 얼마나 애틋한가? 그런데 이건 서울시가 발표한 올해 장애인의 날 슬로건이다. 관제의 슬로건 치고는 정말 많이 변했다고들 한다.

장애인이기 전에 사람이다

▲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이 온전한 권리를 외치며 발달장애인 권리 보장 촉구 사전대회인 ‘피플퍼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정리연

420장애인차별철폐의 날 투쟁의 사전대회로 ‘한국피플퍼스트’가 주최한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촉구대회’가 있었다. 한국피플퍼스트는 발달장애인들이 자신의 권리를 직접 표현하고 요구하기 위해 출범한 전국단체이다. 피플퍼스트 운동은 발달장애인 자기권리 옹호운동으로서 ‘우리는 장애인이기 전에 사람이다’라는 슬로건 아래 전 세계 43개국에서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

발언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동안 미처, 아니 생각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비장애인 입장에서는 너무 당연했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볼까? 요즘엔 대부분 인터넷을 하지만, 은행을 방문해야만 할 때도 있다. 자연스럽게 번호표를 뽑고 기다린다. 내 차례가 되면 직원에게 용건을 말한다. 은행 직원은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안내를 해 주거나 일을 처리해 준다.

이번엔 주민등록등본이 필요하거나 뭔가 신청을 해야 한다. 주민센터에 갔다. 각종 신청서가 있는데, 어떻게 쓰는 거지? 샘플이 있잖아! 그래도 모르겠어. 직원에게 물어보면 되지! 잠깐, 우리 시에 이렇게 다양한 정책이 있었어? 나도 해당되는 게 있을까? 이번엔 선거철이다. 후보자들은 누구지? 어떤 사람들이지? 선거 홍보물이 있잖아~

비장애인은 별 어려움 없이 팸플릿이나 샘플을 보고 정보를 얻고 양식을 작성할 수 있다. 하지만 발달장애인들은 주민센터나 은행에서 업무보기, 병원에서 문진표를 쓰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평소에 쓰지 않는 단어들을 바로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고 한다.

또한, 일이나 학교를 가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주문할 때도 마찬가지이고, 길을 찾아갈 때도 그렇다. 그림이 들어가거나 쉽고 단순한 말로 설명해 준다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발달장애인에게 “이해하기 쉬운 자료를 만들어서 정당한 정보와 편의를 제공받아야 할 권리(발달장애인법 제10조)”가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모든 날이 투쟁일 거야. 너희를 위해서라면

▲ 전국장애인부모연대는 ‘장애인 차별철폐의 날’ 전국집중결의대회를 통해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의 권리에 기반한, 전 생애 권리기반 지원체계를 구축을 촉구했다. ⓒ정리연

이어서 전국장애인부모연대(이하, 부모연대)의 ‘전국집중결의대회’가 이어졌다. 작년 4월 19일, 효자동 치안센터 앞에서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 557명의 삭발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고 먹먹하다. 그날 나는 취재를 마치면서 간절히 소망했었다. 내년 이맘 때에는 발달장애인과 가족들의 요구가 이뤄져서 그들이 새벽잠 설치면서 출발해 서울로 모이는 게 아니라, 지역 여기저기에서 화사한 봄꽃 구경하기를 말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간절한 발달장애인의 부모인 그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한자리에 모였다.

부모연대는 그동안 삭발, 삼보일배, 천막농성 등 치열한 투쟁을 하며 지역사회에서 안전하게 살 권리를 요구해 왔다. 하지만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의 참사는 반복되고 있다. 열악한 발달장애인 지원체계를 전면 재검토하고 당사자들의 권리에 기반한, 전 생애 권리기반 지원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부모연대의 요구가 더욱 절실한 때이다.

부모연대 윤종술 회장은 “국가와 지역사회가 장애인들을 체육관에 모아놓고 자신들의 동정을 포장하는, 장애인의 날에 우리는 장애인차별철폐하는 날로 모였다.”며 “더 이상 장애인 당사자와 가족의 처참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여기 모인 우리가 함께 만들자”고 외쳤다. 또한 “낮 시간에 필요한 데이 서비스, 일자리 서비스, 주거지원 서비스, 주거유지 서비스가 꼭 이뤄져서 우리 자녀들이 지역사회에서 당당하게,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함께 투쟁하겠다.”고 다짐했다.

부모연대는 결의문을 통해 ▲ 장애 영유아 조기 개입 및 지원체계 구축, ▲ 차별 없는 교육·통합 교육 보장, ▲ 발달장애인 자립·주거권 보장, ▲ 발달장애인 전 생애주기 지원체계 구축, ▲ 발달장애인 및 그 가족 삶 보장 등을 요구했다.

우리도 똑같이 열차 타는 사람들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투쟁결의대회에서 “장애인의 이동권과 교육권, 주거권, 자립할 권리 보장”을 요구하며 윤 정권을 강하게 비판했다. ⓒ정리연

계속해서 “열차가 어둠을 헤치고”라는 슬로건을 걸고 420장애인차별철폐 투쟁결의대회가 이어졌다. 권달주 전장연 상임대표는 “장애인 차별철폐, 장애인도 시민으로 함께 살자고 외치며 22년 동안 싸웠지만, 개인의 권리는 후퇴하고 있다.”며 모든 정책이 역주행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를 비판했다. 윤 대통령은 말로만 민주주의를 논하지 말라며 “국민이 느낄 수 있는 민주주의와 정책, 그런 게 진정한 정치”가 아니겠냐고 강조했다. 또한 “24년 장애인 권리예산을 분명히 확보하고 답변하라.”고 촉구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한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용혜인 기본소득당 상임대표, 윤희숙 진보당 상임대표, 나도원·이종회 노동당 공동대표, 김찬휘 녹색당 대표 등은 축전과 영상 메시지를 통해 현 정부의 장애인 정책을 큐탄하고, 전장연의 차별철폐 운동에 연대의 힘을 더했다.

연대발언에서 양동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윤 정부는 차별을 철폐하고, 장애인의 이동권과 교육권, 주거권, 자립할 권리를 보장하라”고 외쳤다. 이어 이원호 빈곤사회연대 집행위원은 윤 대통령에게 약자는 누구인가 물으며 “정작 우리의 목소리는 철저히 외면하고 약자들을 자신의 방패막이로 사용”하고 “장애인 권리 예산을 위한 요구에는 응답조차 하지 않는다”며 비판했다.

오후 5시쯤, 삼각지역에서 결의대회가 끝났다. 하지만 이들의 일정은 아직 남아 있다. 곧바로 시청까지 걸어서 행진해 그곳에서 오후 7시에 문화제를 진행한다. 그리고 21일(금) 오전 10시에는 장애인평생교육법쟁취 결의대회 및 420장애인차별철폐 투쟁결의대회 마무리 보고대회가 있을 예정이다.

철폐, 진정한 몸의 해방

▲ 민주노동 양동규 부위원장, 빈곤사회연대 이원호 집행위원과 참여연대 김은정 협동사무처장이 연대를 하고 있다.(사진 왼쪽부터) ⓒ정리연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인간다운 생활을 위해, 더불어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혐오는 멈추고 차별을 철폐해야 한다. 장애인을 집단 시설에 수용해 사회에서 지우려 하지 말고, 떳떳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체계를 만들자. 그건, 원래는 투쟁해서 얻어야 할 게 아니라, 기본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나나 당신이 지하철이나 버스 타게 해 달라고, 교육받게 해 달라고, 식당에 가서 밥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맨땅을 기고, 버스에 몸을 묶거나 그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투쟁해본 적 있는가?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제약 없이 살아오지 않았나! 그랬던 우리가 좀 불편하면 어떤가? 조금 기다렸다가 하고, 조금 천천히 가면 되지. 비장애인이 불편한 사회, 그게 정상인 사회”라고 하셨던 한 목사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죽음 후 부활한 예수님이 더는 컴컴한 동굴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듯이 비장애인 중심 사회 구조에서 어쩔 수 없이 집과 시설에 갇히고, 자유를 박탈당했던 몸들이 ‘해방’할 때이다. 그들과 함께해야만 비장애인들도 온전한 삶을 이루는 것이다. 예수님이 약자들, 소외당하는 자들 곁에서 개혁을 꿈꾸셨던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그 길을 함께 걸었으면 좋겠다.

정리연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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