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이미 받은 은혜를 지켜나가는 길은혜 가운데 사랑함으로(갈라디아서 5:4-6)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3.04.23 02:12
▲ Valentin de Boulogne, 「Paul Writing His Epistles」 (c.1618-20) ⓒWikipedia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들어가는 말

부활절 셋째 주일입니다. 부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가장 근간이 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사순절 기간과 부활절에만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신앙의 근간을 잃어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부활절 이후 성령강림주일이 되기 전까지 우리는 부활절이라는 이름이 붙은 절기를 보내게 됩니다. 1년으로 치자면 6-7주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지만, 그래도 이 기간 동안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늘 마음에 품으셨으면 합니다.

오늘 저희가 살펴보고자 하는 갈라디아서 본문에는 부활에 관한 직접적인 표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사도 바울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펼치는 신앙의 논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어떤 이야기도 부활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 관한 말씀을 드릴 때에도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의미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을 통해 그가 전하는 부활 이후 신앙적으로 무엇이 바뀐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또한 우리가 올 한 해 동안 생각해보고자 했던 복과 은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

갈라디아 교회는 흑해와 지중해 사이에 위치한 아나톨리아 지역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의 1차 선교 여행 때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2차 선교 여행 때에 이 교회에 다시 방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작성한 이유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의 반대파로 보이는 사람들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신앙적 변화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과 대치하고 있는 이들을 ‘할례 받은 이들’이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이 대치했던 집단은 여럿 있었습니다. 유대교식 그리스도인들, 영지주의자들, 열광주의에 빠진 집단, 사도 바울은 다양한 편지 속에서 이러한 이들의 신앙에 대해 반박합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논리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합니다.

사도 바울과 대치하던 이들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나쁜 사람들이라고 판단할 이유는 없습니다. 네 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모두 다르듯이 초대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는 각각 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을 것입니다.

마치 지금 개신교의 교단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어떤 교단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교단의 신앙 자체가 잘못되었다기보다 그 구성원들이 잘못된 행실을 보였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방식이나 신앙의 형태는 조금씩 다를 수 있다고 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서 사도 바울과 대치하고 있는 이들이 정확히 어떤 이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할례 받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유대인을 뜻하는 것인지, 할례를 받고 유대교를 받아들인 이방인들을 뜻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또 이들이 율법을 어디까지 준수하라고 말했는지도 분명하진 않습니다. 사도 바울 시대에 토라를 구성하는 613개의 규정과 금지사항이 있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너무도 많은 규정이기에 유대교 내에서도 어떻게 이를 다 지킬 수 있는지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합니다.

한 가지 유명한 예로, 예수님 시대에 한 이방인이 유대교 랍비 샴마이를 찾아가서 “내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모든 율법을 가르친다면 유대교로 개종하겠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랍비 샴마이는 건축용 자로 그를 내쫓았다고 합니다. 율법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가르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후에 그 이방인이 랍비 힐렐을 찾아가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랍비 힐렐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싫은 것을 당신의 이웃에게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율법의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그에 대한 주석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당시 유대교 안에서도 율법을 대하는 입장이 달랐기 때문에 사도 바울과 대치하던 이들이 어떤 입장을 갈라디아 교회에 전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할례와 율법 준수를 강조했고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 이를 어느 정도는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그들이 말하는 할례와 율법 준수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논증하기 위한 편지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편지입니다.

율법 준수가 왜 무의미한가?

예전에 사도 바울의 로마서는 구약성경에 대한 거의 완벽한 해설서라는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치 율법의 폐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약성경과 대치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다고 사도 바울의 이야기, 그의 논리가 구약성경과 똑같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동일한 이야기를 할 수는 있지만, 그가 펼치는 논리의 기반에는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은혜가 기반에 있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말씀과는 조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구약성경이라기보다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과 달랐던 가장 큰 요인은 ‘어떻게 구원에 이르는가?’라는 문제에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인들이나 유대교 신앙을 중요하게 여겼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율법 준수는 구원으로 이르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공로사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며 공을 쌓았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은혜를 받게 된다는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 간단하게 말하자면, 어떤 행위 뒤에 결과가 온다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와 입장이 달랐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은혜의 사건이었고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데에는 우리의 어떠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율법 준수는 구원으로 이르는 길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미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건으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이미 구원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 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믿음을 잃지 않고 계속 구원을 누리는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그와 대치하던 이들 사이의 논쟁은 마치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시기 로마 가톨릭과 종교개혁자들의 논쟁과도 비슷합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은 공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를 비판하며 칭의 사상,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은 종교개혁자들을 향해 선행이 결여된 자들이라 비판하였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칼빈이나 마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믿음만 있으면 다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선행을 자랑하게 되는 행태에 대한 경고였고, 의로움과 선행은 떨어지지 않는 관계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향한 오해 역시도 이와 비슷합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가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다 폐기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도 율법에 관해서는 앞서 언급한 랍비 힐렐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믿음을 품게 됩니다. 그렇기에 믿음을 품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하며 그 사랑에도 동참하게 됩니다. 율법을 지켜야 하기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했기에 사랑하게 됩니다.

어찌보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구원이 먼저인지, 행위가 먼저인지를 따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과 행위는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구원 상태를 유지하는 삶, 믿음 안에서 사랑을 행하는 삶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이미 받은 은혜

여기에서 중요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은 존재임을 인정하도록 가르칩니다. 구원을 쫓는 이들이 아니라 구원 받은 이들입니다.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루어졌기에 우리에게는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은혜를 받은 이들이 됩니다.

구원과 은혜를 이미 받았다고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아직 우리에게 임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분명 이를 얻기 위해 공적을 쌓아가야 할 것입니다.

반면에 이미 우리가 은혜를 입었고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인정한다면, 우리의 삶은 베푸신 은혜를 전하는 데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받은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데 집중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과 행위가 서로 맞닿아 있듯이, 믿음과 사랑도 하나로 맞닿아 있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점이 이런 동시성과 지속성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믿음을 가진 이들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으며 그 사랑을 행하며 살게 됩니다. 사랑을 행하는 이들은 여전히 믿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며 이들은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은혜 속에 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면, 우리는 그만큼 은혜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랑할 수 없을 때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도 줄어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행하는 사랑은 믿음과 은혜의 지표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미움이 생겨나고 그것이 커진다면 그만큼 은혜에서 멀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복이라고 표현해도 무관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 은혜 안에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은 은혜를 지속시켜주는 유일한 행위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안에 누군가를 향한 미움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함으로 은혜 가운데 거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미 그 은혜와 복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이미 받은 은혜에서 멀어지지 않는, 사랑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