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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의 의미 4: 교만의 물결이 그치고, 섬기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어라!(욥 38:1-11 빌 1:3-11 막 9:30-37)부활절 넷째 주일(4월30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4.27 23:23

1.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 <디오니소스와 두 명의 마이나데스(기원전 4세기, 꽃병 그림)>와 니콜라스 푸생의 작품

문학 작품 가운데 희극(Comedy)보다 비극(Tragedy)이 더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따라서 그리스 사람들은 매년 3월 말경, 기독교의 부활절기과 비슷한 춘분제(春分祭)인 디오니소스 축제 마지막 한 주간, 비극 공연을 보며 실컷 울고 마음을 정화시킵니다. 이것을 카타르시스라고 하죠? 그리고 대지의 여신이 깨어나는 새봄과 함께 다시 일상으로 다시 돌아갑니다.(1)

▲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와 작품

그런데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외적 비극’과 ‘내적 비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외적 비극은 비극의 요인이 인간 외부에 있고 내적 비극은 그 원인이 인간 내부, 곧 감정의 변화에 있습니다. 가령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인 아이스퀼로스(Aeschylos, B.C. 525~B.C.456)의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의 경우,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대가로 독수리에게 매일 간이 쪼이는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의 비극은 외적 비극입니다. 제우스라는 신의 형벌, 곧 외부 원인이 비극의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비극의 완성자인 소포클레스(Sophocles, B.C.497~B.C.406)의 『오이디푸스왕』 역시 신탁으로 인한 외적 비극입니다. 그 신탁의 내용은 “너는 너의 아버지를 죽이고, 너의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입니다. 결국 오이디푸스의 삶은 신탁의 내용대로 이루어집니다. 비극입니다. 따라서 신탁도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외적 비극의 요인이 됩니다.

그러나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천재적인 비극 작가인 유리피데스(Euripides, B.C.480~B.C.406)의 작품인 『메데이아』는 앞의 두 선배와 달리, 비극의 원인이 인간 외부에 있지 않고, 인간 내부에 있습니다. 잠시 내용을 말씀드리면, 황금 모피를 찾아 떠난 ‘아르고호의 영웅’인 이아손은 콜키스의 공주 메데이아를 통해 소원을 이룹니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합니다. 그러나 이후 이아손은 조강지처인 메데이아를 버리고 다시 고린도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혹은, 명예(τιμή)를 잃었다고 생각했던(2)-그러자 메데이아는 자신과 이아손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과 고린도 공주를 죽여버립니다. 질투의 감정이 복수를 실행한 것입니다. 곧 비극의 원인이 질투라는 인간 내부의 감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적 비극입니다.

▲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이들 3대 그리스 비극 작가를 이어 4대 비극 작가에 들어가는 영국의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역시 모두 내적 비극입니다. 『맥베스』 장군은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오셀로』 장군도 아내 데스데모나에 대한 질투로 -물론, 이아고의 간사한 혀가 있었지만- 『햄릿』 왕자는 아버지의 복수를 실행하고자 하나, 우유부단함으로 망치며 더 많은 비극을 양산합니다. 세 딸을 둔 『리어왕』은 자신의 편견과 독선 때문에 딸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딸들끼리 전쟁을 벌이는 비극이 일어나죠? 이렇게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의 주인공들은 모두 다 욕망, 질투, 우유부단함, 그리고 편견과 독선이라는 인간 내부에 있는 감정 때문에 비극이 생깁니다. 바로 내적 비극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주인공 두 사람의 내적인 감정이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의 가문이 사이가 좋지 않아 비극이 생깁니다. 결국 외적 비극에 해당하기에, 4대 비극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구약 본문의 주인공인 욥의 비극은 어떤 비극일까요?

2. 욥! 외적 비극과 내적 비극을 넘어 ‘존재론적 비극’의 시작을 알리다!

전 연세대 부총장이자 신약신학자인 서중석 교수는 욥기를 연구하며 “욥기는 로마서와 비교 분석하여, 책의 표면적 내용에 따라 의인의 고난으로만 비친 욥기를 ‘욥의 항거’를 통해 소급해 가는 식으로 새롭게 읽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욥의 항거 단서는 욥기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욥 42:17).’입니다. 서중석 교수는 이 부분을 이렇게 주석합니다.

“‘나이가 차서 죽었다’라는 말을 어원적으로 풀이하면 ‘세월에 흠뻑 젖어 살았다’라는 말이 된다. 이 말인즉슨, 욥이 말년에 이렇다 할, 기록할 만한 사건이 없이 그럭저럭 살다 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욥의 소극적 항거이다.”

욥은 고난 뒤에 소유의 축복을 갑절로 받고, 또한 일곱 아들과 세 딸이라는 가정의 복을 받았지만(욥 42:10, 13), 욥기 앞부분에 나온 의인으로서 욥의 경건한 행동은 욥기 후반부에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았다는 간단한 언급조차 없습니다. 그냥 기한이 차서 죽었습니다. 따라서 권능의 하나님 앞에 ‘굴복’이 아닌 ‘항거’를 하고 싶었던 욥은 그렇게 자신의 세월에 흠뻑 젖어 사는 것으로 소극적 항거를 대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이 왜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하나님께 항거하며 살았을까요? 또한 욥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이를 위해 서중석 교수는 먼저 로마서를 봐야 한다고 합니다. 사실 로마서 전체는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에 대한 전적 수용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특히 ‘토기장이의 비유(롬 9:20-23)’가 그렇습니다. 따라서 서중석 교수는 로마서의 빛에서 욥기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간파하려고 했습니다. 서중석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욥기에서 욥의 항거를 읽어내지 못하면 그 책의 표면적인 내용이 알리듯, 의인의 고난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욥기의 근본적 주제는 ‘하나님이 자유하시다’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요? 인과응보(因果應報), 곧 서양에 근거를 둔 인과율(因果律) 적인 사고방식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 준 욥기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욥기가 제시하는 인과율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하나님 상은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절망케 한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으니(내 손 안에 붙잡을 수 없으니) 좌절하며, 결국 욥은 그의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 항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서중석 교수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저자가 만일 인과율에 갇힌 하나님 상을 제시했다면 독자의 절망감을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하나님이 인과율에 따라서 심판하신다면 개인이건 그룹이건 그 어느 누구도 그 아래 남아있을 자가 없다. 인과율에선 은혜라는 개념이 와해된다. … 시인 괴테의 ‘손안에 잡힌 것은 무엇이든 다 썩는다’라는 말처럼,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의 손에 포착될 수 있겠는가! … 인간의 손에 들어온 하나님은 다만 썩어질 뿐이다. 하나님을 잡은 줄 착각하지 말라.”

여기서 서중석 교수는 지평선 비유를 시작합니다. 사실 지평선은 우리가 아무리 그곳으로 다가가도 여전히 뒤로 밀립니다. 그래서 지평선입니다. 뒤로 밀리니까 잡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지평선이 지평선답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평선에서 서중석 교수는 중요한 신앙의 비밀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에 관해 절망하면 할수록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 인식의 한계를 심각하게 자각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절망과 침묵은 더 깊어질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열망과 삶의 경건성 역시 그만큼 더 깊어질 것이다.”

결국 욥기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믿음의 인과응보’(규범적 지혜)가 아니라, 그러한 인과율을 넘어선 절대성으로써 하나님의 자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반성적 지혜).(3) 이것을 저는 ‘하나님의 절대적 자유(주권)’에 대한 ‘인간존재의 존재론적 비극(피조물성)’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노년의 욥은 그러한 하나님의 절대성 앞에 그럭저럭 살았지만, 욥기를 읽는 독자들은 이러한 인간존재의 존재론적 비극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열망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욥기를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을 버리고 섬기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부활 신앙은 자신의 피조성을 깨닫고, 은총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착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세 본문 말씀의 의미입니다. 오늘은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3.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찌니라!

▲ 욥과 대면하신 하나님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기둥 밑에 괴는 돌)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욥 38:1-7)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욥의 고난에 관한 열쇠를 쥐고 계신 하나님께서 마침내 욥이 처한 고난의 현장에 나타나 욥과 1:1로 대면(신-인 담화구조)합니다. 하나님은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하시면서 욥을 책망하십니다. 욥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질문하며 욥을 당황하게 합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욥 38:8-11)

이제는 ‘당황’을 넘어 ‘황당’합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앞서 서중석 교수가 언급한바, 로마서의 토기장이의 비유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또한 휴머니즘을 노래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존심 상하겠지만, 성경은 철저히 피조물로서 인간을 이야기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찌니라!” 그리고 여기서 모든 것들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바로 섬김의 삶입니다. 복음서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말씀을 볼까요?

4.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돼라!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막 9:30-32)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수난에 관해 세 번 정도 예고하십니다(막 8:31, 9:31, 10:34). 오늘 본문은 두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신 이유는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제자도(Discipleship)’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서로 토론하기를, “누가 크냐?”라고 논쟁하였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3-37)

“누가 크냐?”하고 쟁론하는 것에는 피조물성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교만(ὕβρις, 자기 자신을 부풀려 신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경향성)이 머리를 쳐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죄라고 합니다. 또한 헬라어로 ‘알라조네이아(ἀλαζονεία)’라는 말도 교만으로 사용되는데, 이것은 ‘우쭐대다’라는 뜻입니다. 신과 같이 되려고 우쭐대는 것이 교만이고 죄입니다.

히브리어에도 교만은 ‘가바흐(גָּבַהּ)’인데, 이 말 역시, ‘자기를 높이다, 우쭐대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교만하고 자기를 높이고, 우쭐대는 것은 피조물의 본질이 아닙니다. 아니, 복음서의 맥락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참된 제자도는 무엇인가요?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5. 참된 제자도: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3-8)

첫째는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는 것(공동번역, 복음을 전하는 데 협력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위한 일은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신다고 합니다. 말이 어려운데, 공동번역을 보면 쉽습니다. 7절만 다시 볼까요? “여러분들에게 훌륭한 일을 시작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계속하실 것이며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신념입니다.”

사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열심히 협력했을 뿐 아니라,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는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빌립보 교회에는 교만이 머리를 치켜들거나 교인들이 우쭐댈 시간이 없었습니다. 결국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감사의 제목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장(심정)으로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며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아낌없이 간구합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참된 제자도 둘째는 ‘우리의 사랑을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옆에 있는 지체와 신앙 공동체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감사입니까? 불평입니까? 또한 우리 신앙 공동체 안에서 “누가 크냐?”라고 머리를 쳐들고 교만하여 서로 다투고 있습니까? 아니면 겸손하여 고개를 숙이고 지체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참된 부활 신앙은 교만의 물결이 그치고, 섬기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 부활절 넷째주일을 맞아, 지체 간에 서로 섬기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미주

(1) 사실 디오니소스 축제는 겨울철 농한기의 무료함을 달래고 봄을 맞이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 흥을 즐기는 의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얼어붙어 잠들어 있는 땅을 깨우고(기독교식으로는 부활의 의미) 다음 농사의 풍성한 결실을 기원하기 위한 종교적 의미가 훨씬 컸습니다. 축제 기간 동안 사람들이 남근(男根)을 찬양하는 각종 의식을 벌였던 것도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자극하여 풍요로운 생산력을 발산하게 할 목적을 띠고 있었습니다. 이 제전의 주신이 술의 신 디오니소스였던 만큼 축제 기간 동안, 포도주가 빠질 리 없었습니다. 포도주로 얼큰하게 달아오른 사람들은 들뜬 분위기에 도취되어 춤추고 노래하며, 마음껏 웃고 즐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2) 그리스 사회는 기본적으로 티메(τιμή), 즉 ‘명예’를 중시(사랑)하는 ‘필로 튀모스’ 사회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남성들에게만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있다는 것이 최근 『메데이아』 재해석의 흐름입니다.
(3) 『지혜란 무엇인가: 잠언-욥기-존도서의 상호 작용』(더바이블 인사이트, 2021)에서 송민원 목사는 잠언과 욥기, 전도서를 함께 읽어야 지혜 문학이 말하는 지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를 구분하는데, 규범적 지혜는 경험에서 발견하는 삶의 패턴이며, 반성적 지혜란 패턴을 예외적으로 벗어나는 두려운 존재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규범적 지혜를 잘 보여주는 것이 잠언입니다. 그리고 반성적 지혜를 잘 보여주는 책이 바로 욥이라고 소개합니다. 결론으로 잠언과 욥기, 전도서는 서로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는 책이며 이 셋이 다루는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를 활용해야만 오늘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때때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인생의 고민에 대해 너무 쉽게 규범적 지혜의 관점에서 대답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잠언과 욥기, 전도서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전능에 관해 설명하듯이, 우리 이해의 폭을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결국 은총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신비를 이야기 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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