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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가 당연한 사회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나?왜 보복해주지 않습니까? (요나 4:1-4)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3.04.30 04:14
▲ Pierre-Paul Prud'hon, 「정의롭고 신성한 복수는 죄인을 추적한다」 (1808) ⓒWikipedia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들어가는 말

부활절 넷째 주일입니다. 부활절 절기 중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주제의 말씀을 드리겠다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최근 꼭 함께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기에, 오늘은 그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최근 여러 언론에서는 통해 표예림이라는 여성이 12년간 당해왔던 학교 폭력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본래 자신의 유튜브를 통해 이 사실을 폭로했고, MBC 실화탐사대에서 이를 다루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언론들은 이에 대한 후속 보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표예림 씨 스스로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를 본 후 학교폭력을 폭로했다고 밝혔기 때문에 이 폭로에는 ‘더 글로리 실화판’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습니다. 이후 표예림 씨의 동창이라는 사람이 학교폭력 가해자들의 신상을 공개하기에 이르렀고, 신상 공개 이후 가해자 중 한 명은 자신이 일하던 미용실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피해자나 가해자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미 이들의 실명과 얼굴이 다 공개된 상태이기 때문에 어떠한 개인적 판단은 그들을 향한 또다른 가해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오늘 저희가 생각해보고자 하는 문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학교폭력의 문제와 그 이후에 행해지는 보복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어야 할지의 문제입니다. 어쩌면 어떤 분들은 쉽게 답을 내리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복수를 꿈꿀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더 나아가 마태복음 5장은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이 첨가되었기 때문에 복수가 아니라 기도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의 마음은 그렇습니까? 이런 대답은 내 일이 아닐 때 가능합니다. 폭력의 피해를 입은 타인을 향해서 우리는 이런 말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떨어질대로 떨어진 지금 기독교의 이미지를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내가 폭력의 피해자가 된다면, 우리는 내 원수를 사랑하겠다고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자신의 원수를 용서하고 그들을 받아들인 훌륭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일반화하고 모두가 실천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요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은 보복 또는 복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떠한 신앙생활로 이어갈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대신 복수하시는 하나님

성경을 읽다보면 복수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시편을 읽다보면 원수 또는 대적에 관한 탄원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 탄원들에는 대전제가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사람이고 내 원수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 심판을 내리신다는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따른 내가 구원을 받는 사실과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던 대적이 심판을 받는다는 생각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복수의 개념 이전에 하나님을 따르는 선인과 선인을 괴롭히는 악인의 구도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심판과 구원의 문제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지적할 수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나의 대적은 정말로 악인인가의 문제입니다. 대적자가 악인이 아니라면 이것은 심판의 영역이 아니라 복수의 영역이 됩니다.

다윗도 포함되어 있는 시편의 시인들이 복수를 바라며 꿈꾸는 일은 정당한가의 질문을 던지며 탄원시를 읽었을 때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들은 스스로 복수를 감행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복수를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그 대적들을 무찌르시고 그들에게 보복하신다는 이야기는 성경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도 35장 4절에서 하나님께서 오셔서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국가간의 문제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대제국을 심판하시리라는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자신들은 실제로 이들에게 복수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편의 탄원시와 같은 경우는 개인의 영역이기에 국가의 문제와는 또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자신의 원수를 향해 복수심을 불태우는 일은 잘못되어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시편의 탄원들은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을 향한 울부짖음으로 바꾸었고, 복수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며 시를 남겼습니다. 이는 신약성경으로 넘어와 로마서 12장 19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도 연결됩니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우리는 시편의 시인들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힌 원수, 대적을 심판해주시길 바라며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하나님께서 대신 갚아 주실 것을 바라며 간구하게 됩니다.

꼭 보복해야겠니?

이런 우리의 생각에 허탈감만을 남겨주는 말씀이 오늘 요나서의 본문입니다. 요나에 관한 이야기는 다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로 요나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요나는 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스로 도망칩니다. 다시스는 지금의 스페인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풍랑을 일으키셨고 요나는 결국 바다에 빠져 큰 물고기 속에 갇히게 됩니다.

큰 물고기 안에서 요나가 드린 기도, 2장에 나타나는 기도는 아마 후대의 첨가로 보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 점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안에서 어떤 기도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요나는 사흘 만에 물고기에서 나와 육지에 이르게 됩니다.

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요나는 결국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합니다. 3장을 보면 니느웨는 사흘을 걸어야 할 만큼 큰 성읍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루 동안 돌아다니면서 회개를 선포합니다. 이런 표현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는 하지만 제대로 행할 마음은 없었던 요나의 심경을 드러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거두어들이신 이후 요나의 반응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실 줄 알고 다시스로 도망쳤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크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나는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아시리아가 구원받게 된 사실에 대한 요나의 분노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과 다른 분임을 알았기에 삶의 가치를 잃었다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아시리아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나라입니다. 요나에게 있어서 이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타이르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꼭 그들을 향해 보복해야겠니? 나는 그들 또한 너희처럼 아낀다.”

본래 요나서가 바벨론 포로 후기, 유대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사상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기 때문에 온 민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요나서는 복수해주시는 하나님의 개념조차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복수가 아니라 용서이고 구원이라는 이야기를 요나는 전합니다. 그리고 요나서가 끝나는 순간까지 요나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는 언급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2장에 나타난 기도문 역시도 자신을 향한 구원의 간구이지 아시리아의 구원을 말하지 않습니다.

복수가 필요 없는 사회를 향해

성경은 분명 우리가 누군가를 향해 폭력을 휘두르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폭력은 하나님께서 대신 행하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한 켠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폭력도 원치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원칙대로 성경의 말씀을 이야기하자면, 지금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더 글로리’와 같은 보복은 성경 말씀과는 어긋난 일이 됩니다. ‘더 글로리’의 한 장면을 통해 얘기하자면, 교회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문동은(송혜교)이 이사라(김히어라)의 교회에 찾아가서 했던 말, “어떡해? 너네 주님 개빡쳤어. 너 지옥행이래” 정도의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에 그를 심판하실 것이기에 당신의 트라우마는 신앙 안에서 극복해나가고, 당신에게 폭력을 휘두른 이는 그저 용서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피해 당사자에게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사회에서 ‘복수는 나쁜 일입니다’라고 외치는 것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외침은 아닐거라 판단합니다. 오히려 지금 사회는 고대 함무라비 법전과 같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옳고 정의롭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송혜교가 바란 복수는 가해자들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결국은 자신이 평생 그들을 떠올리며 고통받아온 것처럼 그들도 자신을 기억하며 고통받도록 만든 것이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철저하게 실현한 것입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우리의 외침은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교회를 다니는 우리들 역시도 이러한 일을 당한다면 똑같이 되갚아 주리라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 속에서 ‘복수하지 말아라’ 또는 ‘복수해도 된다’의 이야기를 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사회가 복수할 이유가 없는 사회로 만들어가는 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자 황금율이라 부릅니다.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나에게 당한 만큼 돌려주려는 사람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가 황금율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세상에 이 가치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우리 역시도 그 가치를 실현하며 살지 못했기에, 이 사회가 끊임없이 복수를 꿈꾸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우린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참된 가치를 쫓아나가며 그것을 세상에 전할 때, 세상은 더 이상 복수를 꿈꾸는 사회가 아닌, 서로 사랑을 나누는 사회가 되어갈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를 실천하며 전하는 일이야말로 밑바닥까지 떨어진 개신교의 입지를 다시금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작은 노력과 실천이 점차 폭력의 연쇄로 이어져가는 세상에서 폭력의 고리를 끊는 계기가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셨던 나라, 복수와 심판이 이어지는 세상이 아닌 회개와 구원, 기쁨이 넘치는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신 바를 지키며 살아가기에 그 안에서 복을 누리며 세상을 변화시켜가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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