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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아는 여성이고,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머니였다!(잠 27:1-11 계 4:1-11 막 7:24-30)부활절 여섯째 주일/어버이주일/5・18민주화운동기념주일(5월14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5.12 14:52

1. 그리스-로마 여성들의 거룩한 분노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또한 5・18민주화운동 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최근 5・18을 깎아내리는 발언이 나오고 있는데, 43년 전 광주에서 아들과 남편을 잃은 어머니들의 슬픔이 다시 분노로 변하지 않게 역사 바로 세우기가 제대로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조금 독특합니다. ‘메데이아는 여성이고,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머니였다!’ 뒤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잘 아실 텐데, 앞에 나오는 메데이아는 누구일까요? 부활절 넷째주일에 소개한 그리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메데이아』의 주인공입니다. 생각나시는지요? 자신의 두 아들을 남편에 대한 질투의 감정으로 죽였던 콜키스 출신의 공주입니다.

▲ 카를 반 로오의 <메데이아와 이아손>(1759)와 <아르고호 원정대 모집>(기원전 460년)

다시 반복해보자면, 메데이아는 아버지의 황금 양피를 찾으러 온, 아르고 원정대 50명의 영웅 가운데 선장인 이아손(1)과의 사랑에 눈이 멀어 아버지를 배반하고 그를 도왔던 여인입니다. 그러나 이후 이아손은 조강지처인 메데이아를 버리고 고린도 공주와 새장가를 들게 됩니다. 그러자 자신과의 사랑을 배신한 이아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메데이아는 공주를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두 아들까지 죽입니다. 질투의 화신이 된 것입니다.

사실 이 비극에서 에우리피데스는 전반부에서는 메데이아를 동정적인 인물로 그려줍니다. 그러나 극이 진행될수록 메데이아에 대한 동정심은 사라져 버립니다. 결국 메데이아의 격정과 격렬한 분노는 도를 넘게 되었고, 마침내 자식을 살해하는 그녀의 행동은 질투에 의한 폭력성의 끝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에우리피데스는 메데이아의 폭력을 “피압제자에게서 나오는 형언할 수 없이 무도한 폭력”이라고 요약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질투에 근거한 잔인한 폭력이었습니다.

사실 에우리피데스는 이 작품을 통해 이아손과 메데이아 ‘가족의 분란’뿐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우주의 혼란’을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에우리피데스는 ‘깨어진 도덕적 질서’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메데이아』를 끝맺음으로, 인간의 삶에 무심한 신들의 세계와 배신과 분노가 극단적인 폭력으로 이어지는 인간 세상의 어두움을 냉정하게 비춰줍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있게 살펴보면, 당시 그리스 여성들은 분노를 합법적으로 표출할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인들은 여성이 화를 내면, 메데이아처럼 자제력이 모자라, 격정적인 감정 주의에 빠진 것이라고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근거로, 그리스 사람들은 공적인 일에서 여성을 배제합니다. 게다가 그리스인들은 분노라는 감정은 남성의 권리이자 전유물이지, 여성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메데이아』를 통해 우리는 그 당시 그리스 사회가 분노에도 차별을 둔 남성 가부장제 사회였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메데이아』를 읽으며 우리 사회에 숨겨진 ‘여성의 분노’를 살펴보고 그 분노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분노를 양산한 사회적 시스템을 고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가 건강해질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오늘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주일인데, 43년 전 광주에서 아들과 남편을 잃은 어머니들의 분노가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아픔과 분노가 속히 해결될 수 있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늘 5・18민주화운동 기념주일을 지키며 함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머니였다!

오늘 세본문 말씀은 이렇게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혹은 고통에 빠진 여성들, 아니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더 나아가 이 여성들을 통해 그리스 문화와 사상, 그리고 성경의 말씀이 어떻게 다른지를 잘 보여줍니다. 곧 그리스에는 분노를 표출하는 메데이아라는 여성이 있었다면, 성경에는 분노를 겸손으로 극복한 수로보니게 여인이라는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메데이아는 여성이고,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머니였다!’라고 한 것입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은 사회적 시스템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귀신 들렸다는 것의 의미) 딸을 둔 어머니에 대한 말씀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자존심 상하는 말’로 시험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겸손한 믿음이 귀신 들린 딸 아이를 낫게 합니다. 잠언 말씀처럼 “분은 잔인하고 노는 잔혹하지만, 친구의 아픈 책망과 권고는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깨닫는 자는 하늘 보좌에서 십자가 사랑을 완성합니다. 대속의 죽음으로 구원을 성취하고 승리한 어린양을 따르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럼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그리스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막 7:24-26)

▲ 루이 르 브루통 <지옥의 여신 아스다롯>(1818년)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을 떠나 두로 지방에 가셔서 한 집에 들어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두로는 이스라엘 북방의 해변에 있는 이방지역으로, 무역의 중심지여서 경제적으로 아주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다산의 여신인 ‘아스다롯’을 숭배하던 우상의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달려온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들린 딸을 가진 어머니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녀의 딸은 귀신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귀신들렸다는 말은 경쟁과 시기, 탐욕과 전쟁이 끊임이 없어 제정신으로는 살 수 없는 그런 사회에서 지치고 병들었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러한 귀신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가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었습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서 말씀을 보니, 마가는 그 여인이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합니다. 헬라인, 곧 그리스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녀가 상당히 지성을 갖춘 교육받은 여인임을 뜻합니다. 수로보니게는 ‘수로 지방의 보니게’라는 뜻으로, 시리아(Syria)에 속한 페니키아(보니게) 지방, 곧 이방지역을 뜻합니다. 여인에 대한 이런 소개는 이방인으로 지성을 갖추었다는 말입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태복음은 이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고 함으로서 이방 여인임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더러운 귀신 들려 고통스러워하는 딸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 수로보니게 여인과 예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간구를 거절합니다. 참 놀랍습니다. 이전에는 예수님께서 찾아온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도움을 구하러 온 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인이 이렇게 답합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8).” 이 말씀을 조금 쉽게 풀어 볼까요?

“주여,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는 이방 여인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받기에 합당치 못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저와 우리 민족은 대대로 아스다롯을 섬겼던 개와 같은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상아래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님! 저와 제 딸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막 7:29-30).”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만약 이 수로보니게 여인이, 지식 있는 헬라인으로, 곧 배운 여성으로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딸 아이는 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 앞에,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진정한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런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보고자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잠언은 이것을 ‘친구의 충성된 권고’로 설명합니다. 잠언 말씀을 볼까요?

3.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 앞에야 누가 서리요?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 앞에야 누가 서리요?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잠 27:4-6)

오늘 잠언 말씀은 공동체 생활에서 충고의 귀중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서로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친구, 혹은 친구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친구는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친구의 책망과 원수의 입맞춤을 비교합니다. 거짓된 입맞춤은 사람을 속이고 죽이나 아픈 책망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친구의 아픈 책망에 걸려 넘어집니다. 분노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노함은 잔인하고 분노는 잔혹하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화가 나면 사나워지고 분이 터지면 막을 수 없겠지만, 사람이 질투를 부리면 누가 당해 내랴?”라고 번역합니다. 서두에 소개한 메데이아의 분노입니다. 질투의 감정에 사로잡혀 그 분노를 남편이 아니라, 자식에게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 여인은 알았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저리 말씀하셔도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알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닐까?” 지난 두 주간 계속 이어온 욥기 말씀처럼,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의 한계성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 사상과 성경의 큰 차이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제한하지 않고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긍정하는 그리스 사상과 인간의 한계를 제한하고 인간의 죄성과 피조물을 인정하는 것! 그 차이입니다. 따라서 잠언 말씀도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잠 27:1-3)

오늘 수로보니게 여인, 곧 어머니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만하고 교만한 자는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잠언은 이런 이를 ‘배부른 자’라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같이 아름다우니라.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으리라.”(잠 27:7-11)

이렇게 참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앞서 그리스 사상과 성경의 큰 차이를 말씀드렸죠? 그리스 사상은 인간의 한계를 제한하지 않고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긍정하는 것이지만, 성경은 인간의 한계를 제한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로 그 차이를 정확하게 구분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존재로, 곧 성경은 인간을 철저히 피조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 사상과 성경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예가 오늘 요한계시록 본문 말씀입니다. 먼저 요한계시록 말씀을 보고 이 말씀과 관련된 그리스 문화와 사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4.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 보석 같더라.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 4:1-5)

▲ 랭브르형제, 밧모섬의 성 요한(1411-16) 하늘 보좌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이 요한 사도에게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하늘 보좌와 그 보좌에 앉으신 이를 경배하는 ‘보좌 경배’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늘 보좌 위에 앉으신 이를 이십사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과 하나님의 일곱 영이 경배하는 것입니다. 또한 각각 ‘사자’, ‘송아지’, ‘얼굴이 사람 같고’, ‘독수리’와 같은 네 생물도 보좌에 앉으신 이를 경배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6-11)

▲ 밤베르크 묵시록의 <하늘보좌>(1000-20)와 파쿤도 베아투스의 <하늘보좌>(1047)

이렇게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는 이를 모든 이가 찬양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말씀인 4장 ‘보좌를 중심으로 한 경배(보좌경배)’와 이어지는 5장 ‘어린양이 중심인 경배(어린양 경배)’는 ‘천상의 경배’로 기독교 초기 경배의 모범이 됩니다. 1세기 원시 교회의 실제 예전 의식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리스 문화에는 요한계시록의 보좌 경배와 어린양 경배와 비슷한 디오니소스 축제가 있습니다. 부활절 넷째주일 설교에 그리스 비극과 디오니소스 축제 이야기를 했었는데, 기억나시죠?

5. 천상의 경배와 디오니소스 제의 비교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비극을 탄생시킨 신입니다. 사실 비극(tragedy)을 뜻하는 그리스어 트라고디아’(τραγῳδία)는 염소(τράγος)의 노래(ᾠδή)’라는 의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전성기인 기원전 6세기 초부터 매년 3월에 디오니소스 축제가 개최되었습니다(우리나라의 춘분제, 혹은 기독교의 부활절기와 같은). 이 축제 때, 그리스 비극이 경연방식으로 공연됩니다. 초창기에는 배우와 합창단이 무대에서 염소의 탈을 쓰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형식이으나 이후에는 비극 공연 전후에, 또는 공연 중 무대에서 디오니소스에게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행해졌습니다. 이때 부른 합창곡을 ‘디티람보스(Dithyrambos)’라고 하는데, 이것은 디오니소스 신을 향한 찬미의 노래로, 고대 그리스 비극의 원형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축제의 핵심은 비극 공연이고, 비극의 초점은 디오니소스 신을 위한 종교적 제의입니다. 사실 그리스 비극은 그리스 문학을 넘어, 서양 문학의 금자탑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탐구 정신을 바탕으로 시와 노래, 춤과 웅변술 등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이 융합된 종합 예술로서 고대 그리스인들의 종교관과 인생관 그리고 철학을 반영합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시학』에서 비극의 목적이 카타르시스, 곧 쾌감 산출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비극 공연을 보는 관객들이 비극 주인공의 고통과 몰락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통해 격정이 분출되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 비극의 카타르시스 기능은 결국 삶의 긍정에 있습니다. 삶의 고통을 극복하는 긍정의 힘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철학자 니체에 따르면, 비극은 염세주의의 발로가 아니라, 고뇌와 모순으로 가득 찬 삶을 긍정하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명랑성의 발현’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관객은 비극 주인공의 고통과 몰락을 보고 실존적 공포를 인지하는데, 그 순간 자기 실존의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타인의 불행에서 맛보는 사디스트(sadist)로서의 쾌감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긍정하는 희열입니다. 따라서 니체는 이것을 “고통이 낳은 희열”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쾌감 산출과 삶의 긍정이란 측면에서 디오니소스 제의는 여러 면에서 요한계시록 4장의 ‘천상의 경배’와 5장의 ‘어린양 경배’와 유사합니다. 특히 경배의 중심 캐릭터인 디오니소스 신과 어린양이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유사점을 공유합니다. 이를 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경배의 대상인 디오니소스와 어린양은 대중보다 우월한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로, 행복에서 불행으로 그 운명이 전환됩니다. 그리고 이 전환이 자신이 아닌 타자로 인한 것이라는 점과 불행의 종착점인 죽음의 양상이 참살이라는 점에서 디오니소스와 어린양은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부활에 이르기까지 어린양과 디오니소스는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특징을 함께 합니다.

그러나 죄 없는 죽음이란 측면에서 어린양의 죽음은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유사하지만, 타자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복수의 화신인 디오니소스와 차이가 납니다. 이것이 그리스 사상과 성경의 차이입니다. 성경의 어린양은 무저항의 화신입니다. 또 성경은, 참살당한 어린양은 그 고통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어린양 경배의 본질은 어린양과의 합일, 곧 그의 고통과 죽음에의 동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보좌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보좌경배), 어린양 예수를 통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 앞에서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어린양 경배)입니다. 이렇게 자기 비움을 결단하고 대속의 죽음으로 구원을 성취하고 승리한 어린양을 따르는 삶이 기독교 예배의 원형이며 본질입니다. 그러나 디오니소스 축제는 제의에서 공연된 비극을 통해, 주인공의 고통과 몰락에 대한 공감과 연민 속에서 분출되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하는 예술적 기제로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통해 생의 고통과 몰락을 간접 체험하고 새로운 창조의 원천으로 긍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 문화와 성경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인간의 분노를 표출하고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철저한 인간중심주의인 그리스 사상은 일류 문화에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으며 인권 신장에 이바지했습니다. 반면 성경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창조주 앞에서 겸손하여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것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 인류 문화와 영성에 새로운 가치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에 나오는 그리스 여인 메데이아는 여성이고, 또 다른 그리스 여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은 어머니였다는 말은 여성의 거룩한 분노와 어머니의 겸손이 만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 문화의 좋은 점과 성경의 영성이 만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물론, 초대 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리스 문화와 다른 성경의 어린양의 죽음과 대속으로 이뤄지는 기독교 구원의 독특성은 디오니소스 축제와 다르게 시대가 변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부모님의 끝없는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겸손에서 시작되어 창조주 하나님 앞에 피조물 된 인간을 고백하는 인간 이해로까지 확장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미주

(1) 이아손은 그리스 북부 텟살리아 이올코스의 왕 아에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에손 왕의 동생인 펠리에스가 왕위를 빼앗자, 장성한 이아손은 빼앗긴 왕위를 되찾기 위해 펠리에스를 찾아간다. 그러나 펠리에스 왕은 신의 선물인 황금 양피를 가져오면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말한다. 이후 이아손은 아르고호를 타고 황금 양피를 찾으러 모험을 떠나게 된다. 이아손은 아르고호를 만들고, 함께 모험하게 될 선원들을 모으는데, 리라의 달인인 오르페우스, 북풍의 신 보레아스의 두 아들 칼라이스와 제테스, 헤라클레스 등. 그리스 최고의 영웅 55명과 함께하였다. 결국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도움으로 황금 양피를 얻고 그녀와 결혼한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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