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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는 마치 ‘치질’과 같으니?로베르토 체 에스피노자 교수의 <신학을 정치화하기>를 듣고 - (성)소수자와 그리스도교 17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 승인 2023.05.12 15:25
▲ 하느님 나라는 끊임 없이 질서지워진 세상 속에 균열을 내는 겨자씨와 같다. ⓒGetty Images

1.

이 글의 독자분들이라면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비유 중에 겨자씨 비유를 다들 아실 겁니다. 씨앗일 때는 가장 작지만 나중에는 다른 풀들보다 커져서 새들이 깃들 정도로 커진다는 비유 말입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자인 ‘존 도미닉 크로산’이라는 학자가 이 겨자씨 비유에 대해서 흥미로운 해석을 제시한 게 있습니다. 겨자풀은 농부의 입장에서 볼 때 원하지 않는 곳을 점령하는 경향이 있는 식물이며, 또한 겨자풀에 새들이 깃든다면 그 새들도 곡식들을 쪼아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 결국 겨자씨는 통제하기 힘든 요인이고, 특히 새가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경작지 안으로 새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속성의 겨자씨를 하느님 나라에 비유한다는 건 결국 하느님의 나라도 그런 통제하기 힘든 속성+그 비유를 듣는 삶의 삶을 뒤흔들어 놓는 속성을 갖고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 아니냐는 게 크로산의 의도인 걸로 보입니다.

2.

지난 수요일 10일 저녁 새길기독사회문화원에서 듀크대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로베르토 체 에스피노자(Roberto Che Espinoza)’ 교수를 강연자로 초청한 <신학을 정치화하기: 신체들, 그리스도교, 그리고 퀴어니스> 행사가 있었습니다. 강사가 자신이 영어와 스페인어밖에 알지 못해서 청중의 언어로 직접 이야기할 수 없음을 미안해 하며 강연을 시작하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지정 성별 여성이었다가 성 재지정 수술을 받은 FTM(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이나 논바이너리, 즉 남성/여성 두 범주 중 어느 쪽으로도 자기를 정체화하지 않는 트랜스젠더라고 자신을 정의한 강연자는 퀴어란 정체성(identity)이라기보다 ‘되어감(becoming)’이라는 말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이성애자 남성/이성애자 여성이라는 ‘정상’을 벗어나고 보니, 자신의 성적 실천 양상이 자기 스스로에 대한 생각마저도 끊임없이 변화시킨다는 말로 해석이 되었습니다.

▲ ‘로베르토 체 에스피노자(Roberto Che Espinoza)’ 교수

우리가 흔히 종교적 경험이라고 부르는 경험들은 그 경험을 촉발하는 근원이 외부에서 온다고 생각되든지 아니면 내부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든지 간에 그 근원이 끊임없이 파악을 시도하다가 파악되지 않는 ‘신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마련인데요. 그렇게 보면 이성애자 남성/이성애자 여성이라는 ‘정상’을 벗어났으므로 퀴어적인 것이 되는 성적 실천의 진행 상황이 자신에게도 ‘신비’로 다가온다는, 그래서 일단 무엇인가 하고 나서도 끝없이 새로운 것이 다가온다는 말을 강연자가 한 것 아닌가 이런 해석도 해 보게 되네요. 강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에 소속된 사람이기보다 예수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하고도 상통하지 않나 싶습니다.

‘정상’을 벗어난 후에 가능한 ‘신비’는 당연히 그 ‘정상’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는 위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강연자인 에스피노자 교수는 작년 한 해에만 6번의 공격을 당했다고 합니다. 청중 중에 지금 보수 기독교의 끊임없는 공격 대상이 되는 분들도 있었는데 그분들에게는 남 이야기가 아니게 느껴졌겠지요. 그렇기 때문에라도 강연자가 강연을 할 때, 청중과 대화를 나눌 때, 끊임없이 뜻과 삶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강조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싶기도요.

여기서 청중과의 대화 중에 폭소를 불러온 장면이 하나 생각나는데요. 강연자가 자신과 청중들까리 포함한, 퀴어적 실천에 참여/동조하는 “우리”를 두고 말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적 제도는 물론 사회 일반적 제도가 ‘정상’에 사람들을 몰아넣으려는 권력을 행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제도 안에 침투해서 제도를 끊임없이 교란한다고 하면서, 마치 잘 없어지지 않는 ‘치질’ 같다고 비유를 했더랬습니다.

3.

그 ‘치질’이라는 비유에 웃고 나니 서두에 인용했던 겨자씨 비유 이야기가 생각이 나는 겁니다. 기존의 질서가 원하지 않는 곳에 어느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어 그 질서를 교란하는 존재인 겨자씨 말입니다. 그러니 치질이라는 비유와 겨자씨라는 비유를 서로 통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서두에서 이야기한 대로 예수님은 그런 겨자씨를 하느님의 나라에 비유했지요. 그러면 이제 이렇게 바꿀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나라는 마치 치질과 같다고 말입니다. 권력과 규범의 ‘정상’에서 벗어나 퀴어한 상황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끼리 함께 살아감으로써 제도를 끊임없이 교란하는 ‘치질’ 말이죠.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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