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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위의 감정, 감정을 넘어선 감정항상 기뻐하라(살전5:16-18)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5.16 00:36
▲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기도는 닥쳐올 죽음 앞에 두렵고 떨리는 감정을 넘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던 염원은 우리 삶 속에서도 실천해야 할 모습니다. ⓒGetty Images

1.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감정을 느낍니다. 기쁨과 슬픔을 가장 중요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즐거움, 분노, 화, 사랑, 우울, 아픔, 모욕감, 자긍심, 자존심 등등 수많은 감정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긍정적인 감정들도 있고, 좋아하지 않는 부정적인 감정들도 있지만, 실로 우리의 삶은 이런 모든 감정들을 통해서 풍요로워집니다.

기쁜 일이 있을 때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또한 슬픈 일이 생겼을 때, 울며 슬퍼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런 감정들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무척이나 밋밋하고 무미건조할 것입니다. 기쁜 일에 기뻐하지 못하고, 슬픈 일에 슬퍼하지 못하고 즐거운 일에 즐거워하지 못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그저 먹고 자고 일하고 살다가 기한이 다 되면 죽는, 로봇과 같은 인생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 감성을 지니고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감정이 있음으로 인해서 인간은 다른 어떤 생명체도 지니지 못한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문화는 문명과 다릅니다. 문명이 물질적이고 기술적인 발전, 사회 구조적인 발전의 총체를 의미한다면, 문화는 정신적이고 가치적인 소산을 칭합니다.

동물들에게도 문명은 있습니다. 단어나 용어는 다를지 모르지만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동물들만의 발전된 체계를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정신적인 가치를 소유하지는 못합니다. 기쁨과 슬픔, 안타까움과 아쉬움, 보람과 희열 이런 가치들을 느끼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정신적인 유산을 세워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찾고 살아가는 이유를 얻게 되는 것은, 그래서 우리가 우리 삶을 가치 있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삶 안에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인류에게 우리 개개인에게 문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삶 속에서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는 감정이 우리에게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정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최고의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가 받은 은사를 최고라고 자랑하면서 ‘네가 받은 것보다 내가 받은 것이 낫다. 아니다. 이렇다 저렇다’ 분란을 만들고 있을 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 모든 논란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바울이 말한 최고의 은사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은 ‘사랑’을 최고의 은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많고 많지만, 그 모든 것 위에 있는 것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고 방언을 통역하고 영을 분별하고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는 수많은 은사들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한 은사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노래로도 만들어 부르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내용입니다.

바울은 그저 애매모호하게 ‘서로들 사랑하는 것이 제일 좋으니 사랑합시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란이 일어나고 분열이 생기고 다툼이 있다고 하니, ‘서로들 미워하지 말고 사랑으로 하나 되십시오’ 하는 권면의 말씀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그리고 매우 논리적으로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은사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지식과 지혜, 예언과 능력 그 모든 것이 충만할지라도 사랑이 결여되어 있으면 모든 것이 허사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다른 은사들은, 사랑이라고 하는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은사가 밑바탕에 깔려 있을 때에야 비로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은사들이 그 기능을 다하고 사라져 갈 때에도 사랑이라는 은사는 끝까지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멋모르고 방언이 최고네 예언이 최고네 기적이 최고네 떠들고들 있지만, 그런 얕은 지식을 넘어서서 신앙이 자라고 숭고한 신비를 깨닫고 맛볼 줄 알게 되면 그제서야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거울로 보듯이 희미하게 보여서 방언이 최고인 것 같고 기적이 최고인 것 같고 병 고치는 것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는 그 날에 비로소 올바르게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모든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3.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여러 가지 감정 중의 한 가지 감정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이 무엇일까요? 미움의 반대말일까요? 증오의 반대말일까요? 미워죽겠는데 증오심이 솟아나는데 사랑하라고 권면하는 것일까요? 짜증이 나고 답답한데 억지로 허허 웃어보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그 모든 감정들을 통틀어 그 모든 감정들을 포함하고 포괄하고 초월하는 으뜸 감정으로서의 사랑입니다. 슬픔과 기쁨, 사랑과 미움, 증오와 분노, 쾌락과 즐거움 그러한 감정들과 동일선상에 있는 사랑이 아니라, 그러한 모든 감정들을 포함하는 한 차원 높은 단계에서의 사랑입니다.

감정을 넘어선 감정입니다. 감정에 대한 감정입니다. 감정을 초월하는 감정입니다. 슬픔을 사랑해내는 사랑입니다. 기쁨을 사랑해내는 사랑입니다. 미움과 증오와 분노와 쾌락까지도 사랑해내는 사랑입니다. 미움을 억지로 참고 꾸역꾸역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미움을 사랑해내는 사랑입니다. 분노를 억누르고 화나지 않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솟아나는 것까지도 사랑해내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에 대한 감정, 감정을 넘어선 감정, 초(超)감정, 메타감정(meta-emo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초감정, 메타감정이라는 말은 감정에 대한 감정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내가 이러이러한 일로 짜증이 났는데, 내 안에 화가 나는 것이 슬프다. 짜증이라는 1차 감정에 대해서 슬픔이라는 2차적인 감정으로 반응하는 것. 그것을 메타감정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이런 일이 있어서 즐거웠는데, 그걸로 즐거워했다는 것이 부끄럽다. 이 이차적인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메타감정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바울의 메타감정은 심리학에서의 메타감정과는 다릅니다. 심리학의 메타감정은 단순히 이차적인 감정, 감정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또 다른 감정을 말하는데 그치고 있지만, 바울의 메타감정은 인간의 반응으로서의 감정을 넘어선 영적인 영역, 하나님의 영역, 하나님의 반응으로서의 감정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감정을,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이 수용해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인간의 모든 삶을 주장하고 관할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인간이 표출하는 사소한 감정 하나하나에 휘둘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인간의 감정들을 모두 포용하시고 받아들이시고 어루만지시고 위로하시고 함께하십니다. 인간과 동일한 수준에서 인간의 감정에 반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수준을 넘어선 곳에서 인간의 감정들을 돌봐주시고 다루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슬퍼하고 눈물을 흘릴 때 그런 우리를 보시고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네가 슬퍼하니까 부끄럽다. 네가 슬퍼하니까 화가난다. 네가 슬퍼하니까 고소하다. 하나님은 이런 단순한 감정으로 반응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의 슬픔을 넘어서 있습니다. 그래? 네가 슬프구나? 무엇이 너를 슬프게 했니? 그 슬픔을 내가 위로해 줄게. 내가 함께 슬퍼해 줄게. 네 아픔을 내가 알아줄게. 그 슬픔이 걷히고 나면, 네가 느꼈던 슬픔이 사실은 기쁨이요 감사라는 것을 알게 해 줄게.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을 넘어선 곳에서, 슬픔 자체를 초월한 곳에서, 슬픔에 반응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감정이 바울이 말하는 초감정, 메타감정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로하고 인간을 감싸안고 인간을 구원하는 그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을 넘어선 저 멀리 초월적인 우주공간에 까마득한 하늘나라에 하나님의 보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 하나님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귀한 은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말한 사랑이요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한 기쁨인 것입니다.

5.

오늘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는 ‘사랑’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오늘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기쁨’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교회는 ‘기쁨’으로 대표되는 교회였던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힌 일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 속에서도 한밤중에 찬양을 합니다. 그러자 옥문이 열리고 수갑과 차꼬가 풀립니다. 간수장과 그의 가족이 이 일로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바로 그 일이 있은 후에 빌립보를 떠나 들른 동네가 데살로니가입니다.

데살로니가는 주전 315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 중 한 사람인 카산더에 의해 건설된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마케도니아 지역의 중심지였고 많은 유대인이 거주하는 방대한 크기의 도시였습니다. 헬라 제국의 찬란한 전통을 자랑하던 데살로니가는 주전 168년에 로마에 합병되었고 주전 42년부터 로마에 의해 자유도시(civitas libera)의 지위를 부여 받았습니다.

로마에서 총독이 파견되었지만 실질적인 관리는 로마 황제에게 충성맹세를 한 지방토착유지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유지들은 로마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황제숭배를 정책적으로 지원했고, 경제적인 발전과 함께 온갖 이방 제의들이 넘쳐났습니다. 카비루스 제의, 디오니소스 제의, 아프로디테 제의 같은 성적인 방종과 음란한 종교문화들이 항구도시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데살로니가에 와서 회당에서 강론하며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많은 경건한 헬라인들이 바울을 따랐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탄압과 박해가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의 시기와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불량배들을 고용해서 바울을 잡으려고 했고, 바울을 잡지 못하자, 바울을 따르던 신도들을 몇 명 붙잡아서 관청에 넘기기도 합니다.

바울은 결국 이들을 피해서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라는 도시로 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이번에는 바울이 베뢰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베뢰아까지 쫒아 와서 바울을 핍박합니다. 바울은 베뢰아에서도 도망쳐서 아테네로 넘어가게 됩니다. 사도행전 17장에 기록된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데살로니가의 이야기를 보면 과연 이곳에 교회가 세워질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고 서둘러 길을 떠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엄청난 핍박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은 그런 분위기의 도시에서 지배체제의 적으로 공격당하면서도, 우상을 버리고 그동안 방탕했던 삶을 정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결단했던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따라 신앙을 지켜왔던 것입니다.

그런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바울은 편지를 써서 권면의 말씀을 지금 남기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상숭배와 방탕함으로 가득한 도시 한복판에서, 모진 핍박과 환난을 겪고 있는 교회. 그럼에도 신앙을 꿋꿋이 지키며 오히려 다른 교회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는 교회. 바울은 그런 교회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뻐할래야 기뻐할 것 없는 이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감사할래야 감사할 것 없는 이들에게 감사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생각조차 나지 않을 만큼 지키고 힘든 이들에게 기도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권면은 그래서. 억지로 참고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참고 감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기도하라고 종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라는 명령은 다른 모든 감정을 억제하고 억지로 기뻐하기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모든 감정들에 속박되지 않고, 다른 감정들에게 사로잡히지 말고, 그 모든 것의 근본에 놓여있는 기쁨을 발견하라는 명령입니다.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물질에 사로잡히지 말고, 이성에 사로잡히지 말고, 지혜에 지식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우리를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기쁨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핍박과 환난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거나, 분노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핍박과 환난 속에 임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십자가를 싫어하고 외면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 속에 깊이 감추어진 기쁨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거절하고 싶고 피하고 싶고 비켜가고 싶은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감정들이 있지만, 그런 인간적인 것에 사로잡혀버리지 말고, 그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에 사로잡히라는 것입니다.

초월하지 못하면, 사로잡혀 버리면 우리는 인간의 차원이라는 영원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매우 적절한 상황판단을 할 줄 안다고 생각합니다. ‘기쁘지 않다. 왜? 이러이러하니까.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 왜? 이러저러하니까. 감사할 수 없다. 왜? … 하니까.’ 그 모든 이유와 근거들이 인간적으로는 매우 적절하고 당연하고 올바른 판단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차원을 초월해서, 그 이유들의 이면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안에 인간의 욕심이 도사리고 있고, 인간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고 인간의 헛된 야욕이 교만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이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판단이라는 가면을 쓰고, 상식으로, 당연한 것으로, 올바른 것으로 위장하고 우리를 인간차원에 매몰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가 바로 그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 인간의 판단, 인간의 상황에 따르면, 인간 예수로 십자가를 바라보면, 두렵고 무섭고 원망스럽고 피하고만 싶은 길일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니, 그 안에 구원이 있고 그 안에 그리스도로서의 자기 자신이 있는 것을 발견해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그리스도 된 모습을 발견해 냈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6.

바울이 말하는 기쁨의 정체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감사의 정체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적인 지평을 초월해서 세상을 감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것,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고 나의 삶을 바라보게 되는 것, 그렇게 나의 삶을 대하고 세상을 대할 때, 느껴지는 기쁨과 감사와 사랑. 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바로 그 신앙의 높은 경지에까지 올라오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과 핍박을 이겨내고 단순히 신앙을 지켜오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모든 교회에 모범이 되고 소문이 나고 칭송을 받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6-8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신도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으로부터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만 울려 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각처에 두루 퍼졌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변의 모든 믿는 자들의 모범이 되었고, 그 믿음의 소문이 널리 퍼졌던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편지를 쓰면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권고하고 권면하고 가르칠 것이 없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칭찬을 넘어서 교만에 처하지 않고, 오히려 신앙의 차원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높은 단계로 올라와서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 신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단순히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기뻐할 수 있는 신앙.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의 길을 순종하며 따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할 수 있는 신앙. 그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끊임없는 간구의 신앙.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7.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εν Χριστο)라는 표현은 바울의 특별하게 사용하는, 특히 데살로니가에 보낸 편지에 독특하게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 살아간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임마누엘 하셔서 함께 하시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삶의 모습을 그대로 우리도 살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 예수와 똑같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믿음의 분량에까지 이르고, 그리스도의 신앙의 결단에까지 이르고, 그리스도가 살아가신 삶의 모습과 동일하게 살아가고 있을 때에, 그런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런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와 동일한 마음으로 동일한 심정으로 동일한 신앙으로 동일한 차원의 경지에서 살아갈 때에 우리가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똑같이 기뻐하는 우리, 하나님의 감사함을 똑같이 감사하는 우리,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기도로 소통하는 우리가 되기를 하나님이 고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외우며 묵상할 때마다, 인간으로서 지음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입혀주시고, 그 형상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를 수 있게 능력과 은혜를 한없이 베풀어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과 동일한 마음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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