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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안정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틀렸다평화로운 삶의 요체, 경건과 위엄(디모데전서 2:1~6)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05.17 01:01
▲ 로마 제국의 몰락(1836) ⓒGetty Images

디모데전·후서는 초기 교회의 신앙생활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헤아려 보기에 아주 적절한 책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장 아끼는 제자 디모데에게 주는 교훈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바울의 친서라기보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계승한 후대 교회의 교훈을 담고 있는 서신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에게 전해진 서신이라기보다는 공동체에 전하는 교훈으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수요성서연구 시간에 “한국교회 신앙의 역사와 유산”을 주제로 다양한 신앙전통의 역사와 유산을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다양한 신앙의 양태는 이미 초기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국면에 따라, 또는 공동체의 특성에 따라 그 신앙 양태는 달랐습니다.

디모데서는 특별히 교회가 조직화되어 가는 국면에서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관심을 밑바탕으로 합니다. 그러기에 급진적인 복음의 의미를 설파한 바울의 입장과는 분명히 그 성격을 달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신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을 가르친 것은 아니고 그 핵심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디모데서는 전반적으로 종말론적 급진성을 띠기보다는 세상 안에서 모범적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윤리를 가르치는 것을 그 주요내용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외부세계를 향한 비판과 공격보다는 내향적인 공동체의 질서와 유대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비판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언어로 삶의 연대성과 공동체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맹목적인 현실 순응을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눈에 띄게 급격한 변화가 이뤄지지 않지만 지속되는 삶의 과정에서 주어진 삶의 조건이 어떻게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분명한 신앙적 근거에 따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교회공동체에 주는 구체적인 교훈의 사실상 첫머리에 해당합니다. 그 내용은 기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먼저 본문말씀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합니다. 그야말로 모든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이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불어 감사하라는 권면까지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마다의 삶이 각자만의 존재로 가능하지 않은 삶의 연대성을 일깨웁니다.

그 기도의 권면은 더욱 구체화됩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앞에서 말한 ‘모든 사람’이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과 동일시되는지, 그 가운데 특별히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한정되는지 굳이 논란을 삼을 까닭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고, 특별히 그 모든 사람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와 더불어 위정자를 위한 기도를 빠트리지 않듯이, 당시 신앙과 관념으로 볼 때 그 기도의 권면은 특별할 것 없습니다. 심지어 당대 이방종교에서는 물론 세계 공통적으로 왕을 위한 기도는 필수적이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기도제목이었습니다. 대체로 왕조의 번영과 안정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따라서 이 권면 자체로는 특별히 그리스도교적인 특징이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굳이 말한다면 ‘우리도 나라를 위해서, 통치자를 위해서 기도한다. 그러니 우리를 별난 사람들로 보지 말라.’ 하는 정도의 의미를 지닐까요?

그러나 그렇게 통치자를 위해 기도하는 뜻이 무엇인지 그 까닭을 밝히는 대목에서 명백하게 그리스도교적인 특징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우리 구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이며, 기쁘게 받으실 만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통치자들을 위한 기도의 목적은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을 보장받기 위해서이며, 나아가 그 삶 가운데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도록 이끄는 보편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뜻입니다. 그저 왕조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그 초점이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에 있습니다.

여기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무엇일까요? 경건과 품위입니다. 경건과 위엄 또는 존엄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마음가짐과 행동을 뜻합니다. 당대의 헬라어 용법을 보면, 이 경건은 곧 ‘선’, ‘의’, ‘양심’을 뜻하기도 합니다.

새번역이 ‘품위’로 번역한 ‘위엄’ 또는 ‘존엄’은 거룩한 것에 대한 존경을 뜻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갈망입니다. 그 삶이 경건하고 존엄하게 지속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목적으로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은, 그들이 우리를 탄압하고 박해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디모데서의 본문말씀이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종말론적 이상으로서 그리스도의 주권에 의한 세상의 통치를 주장하였지만(고전 15:24; 골로 2:10,15 등) 또 다른 한편 권위에 대한 복종을 주장하였습니다(로마 13:1~7). 이로부터 로마의 ‘황제숭배’는 거부하지만 제국 내의 ‘공공질서’를 용인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태도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국가권력 자체의 절대성은 용인할 수 없지만, 그것이 보호하고자 하는 공동선 또는 공공성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공동선 또는 공공성을 구현하는 한 국가권력의 정당성이 인정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취지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는 평화로운 삶의 요체로서 경건과 위엄은 오늘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요? 신앙양심의 자유이며 인격의 존엄입니다. 종교개혁 이래 인류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데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입니다.

“인간의 존엄은 침해될 수 없다. 이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의무이다.” 오늘날 독일의 기본법 제1조 제1항은 그 정신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은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경우는 나치정권의 구체적인 비인간성에 대응한 역사적 정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말씀은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경건과 위엄을 핵심으로 하는 평화로운 삶은 보다 근본적인 목적을 지향합니다. “이것은 우리 구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이며, 기쁘게 받으실 만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평화로운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내미는 구원의 손길을 느끼며 진리에 따라 살기를 바라는 것이 궁극적 목적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이 권면은 또 다른 언어로 종말론적 신앙을 공유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원대한 꿈을 품고 사는 사람들인지 본문말씀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주어진 삶의 환경에 대해 매우 타협적인 권고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올곧은 신앙을 지키고 구현하기 위해 오히려 비타협적으로 분투한 초기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음미하는데 수요성서연구 중에 공부하는 내용의 한 대목이 겹쳤습니다.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여러 신앙전통이 있고, 그 전통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와 민족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성서의 정신에 입각해 보다 근원적인 인간 삶 자체의 변화를 추구한 그리스도인들을 새삼 주목합니다. 『성서조선』 그룹 또는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진 신앙전통입니다. 김교신, 함석헌, 류달영, 이찬갑, 장기려 등으로 이어진 신앙전통입니다.

『성서조선』 그룹은 일본인 형사로부터 “독립운동하는 놈들보다 더한 최악질들”이라고 평을 받았을 만큼, 근본적이고 철저한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 요체는 일체의 국가주의와 제도주의를 따르지 않고 오롯이 삶 한 가운데서 신앙을 구현하고자 하는 태도였습니다. 오늘날 자율적인 조합운동과 대안적 삶의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신앙의 전통입니다. 무교회주의를 교회 없이 혼자서 신앙생활 하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철저한 삶의 연대성, 자율적 공동체성을 바탕으로 하는 신앙입니다.

“무교회주의자는 건드리지만 않으면 아주 무난한 존재자이다. 그러므로 제발 우리를 건드리지 말라.” 김교신은 이렇게 호기 있게 외쳤습니다. 본문말씀의 기도와 그대로 통합니다. “이 순간 내가 주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가? 이것이 현재의 나를 삼켜버린다.”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 신자보다 조선혼을 소지한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에 나무꾼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 그 견결한 의지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참으로 고상하고 아름다운 삶, 경건하고 위엄 있는 삶의 희구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광주민중항쟁 기념주일입니다. 교회에서 그 뜻을 기리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저마다의 양심과 인격이 침해당하지 않고 존엄한 삶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가장 천대받던 사람들이 가장 끝까지 저항했던 사건, 포기할 수 없는 삶을 지켜내고자 한 항거를 교회에서 기리는 까닭입니다.

더불어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역시 이를 교회에서 기리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단지 자기만의 육신의 부모에게 감사하는 의미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으로서 진정한 삶의 유대를 기리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출애 20:12) 어째서 약속이 딸린 첫 계명(에베 6:2)이 되었을까요? 부모를 기억하고 공경하는 것은 삶의 연대성을 환기합니다. 그것을 기억할 때 인간이 지속적인 평화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뜻을 새기고, 역사를 환기하고, 특별한 기념일의 의미를 새기는 것은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 삶의 의미를 생각할 때 너무나도 평범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대하는 삶에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아하, 이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요체구나!’ 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바입니다.

무교회주의 계승자들이 말하는 ‘위대한 평민’의 소망, 오늘 본문말씀이 말하는 ‘진리를 알게 될 모든 사람’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의 후예들입니다. 그 믿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며, 저마다 일상의 영역에서 삶을 당당하게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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