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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할 수 있는 용기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역대하 32,1-8; 마가복음 12,13-17)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3.05.18 01:00
▲ 가치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신앙의 첫 번째 걸음이다. ⓒGetty Images

우리는 동행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편입니다. 서로 길동무가 되어 길을 함께 가고 길 위에서 크고 작은 일들을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의 것을 나누며 목적지에 이릅니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물론 억지로 그리 하는 경우 동행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역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서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는 대목들이 매우 많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그 약속이 그와 같은 말로 주어진 것은 아니나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동행, 우리가 간구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많은 경우 개인적으로는 안전이나 성취를 기대하고 사회적으로는 정의와 평화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길을 가려하고 또 가고 있는지요? 함께 간다고 할 때에도 때로는 힘들어서 때로는 다른 이익을 구하는 마음이 들어서 멈추고 싶어하지는 않는지요? 우리는 우리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과의 동행을 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약하기도 하지만 영악한 존재이기도 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어도 괜찮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히스기야 시대는 앗시리아의 팽창 정책 때문에 팔레스틴과 레바논 지역 전체가 불안정해지던 때였습니다. 히스기야의 남유다도 예외가 아닙니다. 얼마전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패망했습니다. 여기에는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에게 맞서기 위해 그의 아버지 아하스가 채택했던 친앗시리아 정책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후에도 앗시리아의 야망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앗시리아군은 남유다를 향했고 예루살렘 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성읍들이 앗시리아군에게 점령당했습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되고 함락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 정해진 일처럼 보입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관료들과 백성의 지원을 받아 철저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적에게 물이 흘러가지 않도록 물길을 모두 차단했습니다. 이제 그가 앗시리아군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백성과 관료들을 모으고 연설을 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담대하게 하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 할 수 있는지요? 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일깨워 줍니다. 적들도 신을 의지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신은 우리와 함께 하는 야훼 하나님에 비하면 육신의 팔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싸우실 것이라는 말에 백성들은 위로를 얻고 안심합니다.

히스기야의 이 말은 단순한 연설이라기 보다는 기도라고 해야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일의 과정을 laborare(일하다) et orare(기도하다)의 관점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와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일 없는 기도가 아니고 기도가 없는 일도 아닙니다. 양자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도 양자를 일치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흔히 하는 말대로 양자는 구분되지만 분리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양자는 함께 전체를 이룹니다. 기도가 앞에 있는가 하면 일이 곧 뒤따르고 일이 앞에 있는가 하면 기도가 어느새 뒤따릅니다. 어느 하나를 취사선택하고 강조하는 우를 범해선 안될 것입니다.

기도 후 앗시리아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를 선택했기 때문에 성밖으로 나갈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습니다. 앗시리아군은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기 보다는 일종의 심리전을 폅니다. 하나님을 폄훼하고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을 비난합니다. 너희 하나님은 앗시리아군으로부터 너희를 결코 구해낼 수 없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그러니 쓸데없이 고통당하지 말고 항복하라입니다.

이 말을 한달 두달 계속 듣는다면 사람들은 의심하기 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력공격 못지 않게 언어공격도 위력적입니다. 이스라엘은 히스기야의 명에 따라 한 마디도 반박하지 않지만 각자의 내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것만 같습니다. 포위시간이 길어지면서 위기는 더 심각해져 갑니다. 히스기야가 할 수 있는 것이 아직 하나 남아있습니다. 기도입니다. 이사야를 찾아가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호소합니다.

준비하고 기도하고 위기를 맞고 기도합니다. 우리의 언어적 한계 때문에 일과 기도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의 병렬에 가까울 것입니다. 위기 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이 사람에게는 비교적 쉬운 일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앗시리아의 선동대로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때에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위기의 마지막 순간에도 히스기야처럼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선택하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전쟁을 선동하는 세력의 달콤한 말장난에 하나님과 함께 평화를 버리는 일이 없기를 빕니다.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고 일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를 칭찬하는 말로 속내를 드러내도록 덫을 놓고 질문을 던집니다. 가이사에게 인두세(켄소스)를 내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느냐? 어느 것을 선택하든 함정에 빠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 맞겠지만, 그럴 수 없으므로 제3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는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 하시고 동전에 새겨진 글과 형상이 누구의 것이냐고 되묻습니다. 데나리온은 인두세를 내는 동전입니다. 그리고 데나리온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가이사라는 문구와 대제사장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신격화된 황제입니다. 풀이하자면 인두세는 신의 아들이고 대제사장인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 형상과 글이 가이사의 것이라는 답변에 예수는 예상치 못했던 저 유명한 답을 끌어내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이 모호한 답변은 저들의 물음에 대한 답변 이상의 것입니다.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이 말씀에 대해 최소한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지 말고 가이사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구별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에는 그것을 원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한다면, 우상의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것을 우상에게 바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은 하나님 편에 서고 하나님의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때로는 불이익이나 괴로움을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고 지키며 하나님과 함께 가시기를 빕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가십니다. 그분과 함께 가며 그 길 위에서 춤출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의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지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기까지 하나님의 것을 지키며 다른 것과 혼합는 일 없이 갈 수 있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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