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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역에서 외쳤던 민주주의의 함성, 잊혀지지 말기를 바랍니다”한봉철 목포동원교회 담임목사, 목포 등 전라남도 지역 내 5월 민중항쟁 기억·계승 호소
이정훈·임석규 | 승인 2023.05.21 04:40
▲ 전남5.18민중항쟁 43주년 기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는 한봉철 목사 ⓒ한봉철 목사 페이스북

“많은 사람들이 5·18 민중항쟁(민주화운동)을 기억한다면 광주광역시를 먼저 떠올립니다. 헌데 목포에서도 항쟁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지역에서 목회하는 저로선 가장 가슴이 아픕니다. 이제라도 목포역에서 울려 퍼졌던 독재 타도와 민주주의 쟁취의 함성을 한국 현대사에 제대로 기록이 되어야 하며, 그 역사를 민중이 함께 배우고 이어가야 한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한봉철 목포동원교회 목사(5·18민중항쟁 목포행사위원회 위원장, 공법단체 5·18부상자회 목포지회장)가 밝힌 목포에서 들불처럼 번져갔던 민주화운동에 대한 소회였다. 오늘날 ‘5·18 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전남 지역에서 일어났던 민주화운동은 그만큼 규명되지 못했다. 한 목사가 지적한 부분은 바로 이점이었다.

한국 현대 민주주의사에서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곳이 바로 ‘목포’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진행됐던 시기 목포에서도 전두환 신군부의 독재 타도와 민주주의 쟁취를 부르짖던 민주항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에 에큐메니안은 목포민중항쟁의 역사를 돌아보기 위해 한봉철 목포동원교회 담임목사와 전화 인터뷰를 나눈 것이다.

한 목사는 1980년 당시 목포공업전문대학(이하 목포공전)에 재학중이었다. 3년 전 아버지의 소원대로 조선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긴급조치 9호 때문에 입학한 지 1년 후에 제적당했다. 이후 목포로 내려와 목포공전에 재입학했고 목포중앙교회(한국기독교장로회 목포노회 목포서시찰) 청년회 소속으로 목포지역 기독청년회장을 역임했다. 이때 한 목사는 청년회를 중심으로 풍물을 배우고, ‘서양경제사’,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강독하며 세상을 보는 눈을 길렀으며, 교회 청년회를 중심으로 시국과 관련한 담론들이 공유되었다.

▲ 민주화를 외치며 80년 당시 목포역광장에 모인 목포 시민들 ⓒ한봉철 목사 페이스북

1980년 5월 17일 한 목사는 자신이 예비검속 대상자임을 담당 형사로부터 알게 된 후 나흘간 진도로 대피했으며, 21일 다시 목포로 돌아와 ‘목포민주시민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목포 시민들에게 광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운동과 군인들의 진압 등 소식을 알렸다. 이 기간에 목포역 광장은 수만 인파로 가득 메워졌고 연일 집회와 횃불 시위 행렬이 목포여자고등학교에까지 이어졌다. 당시 경찰과 시민들의 추산으로 보면 6~7만 명이 모였으니 그 열기는 광주의 함성과 능히 비견될 정도였다.

그러나 27일 구 전남도청을 유혈로 진압한 진압군은 목포로 이동해 28일부터 헬기를 동원하며 선무(宣撫) 공작을 펼쳤다.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군인들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목포지역 건달들은 고향 시민들의 목숨을 지키겠다는 일념(一念)으로 지도부·학생들을 피신시켰으며, 이때 한 목사도 인천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한 목사의 피신을 도왔던 이욱성 인천 동인교회 목사가 연행되면서 경찰에 검거당했고 505보안대의 모진 고문을 받고 계엄포고령 위반 및 내란주요임무종사자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해 연말(12월 31일)에서야 석방됐지만, 이미 목포공전으로부터 제적당한 상태였다. 이후 광주에서 생활하던 한 목사는 1982년 고재식 박사(당시 한국신학대학 총장) 도움으로 한국신학대학(이후 한신대학교)에 편입학해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목회자의 삶을 살게 된 한 목사는 이후 진도지역에서 농산물 직거래 운동, 농민상담소 운영, 추곡수매 투쟁 등 농촌목회 활동을 전개했으며, 민주화 이후에는 목포지역에서 민주화운동 계승 활동을 이어갔다.

현재 한 목사는 목포지역에서 5·18민중항쟁 목포행사위원회와 공법단체 5·18부상자회 목포지회의 대표를 겸하고 있다. 매년 5월마다 목포에서 민중항쟁 기념행사를 준비할 때마다 몸이 하나뿐인 것이 원망스럽다고 멋쩍게 웃었지만, 9년 넘도록 매번 시민들이 오월의 함성을 기억하고 후세(後世)들에게 민중항쟁의 가치가 온전히 전해질 수 있도록 기도하며 분주히 동분서주(東奔西走)해 온 것이 그의 주름진 웃음 속에 녹아있었다.

무엇보다 한 목사에게 5월의 항쟁이 주는 무게감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힘들었다. 진압군이 목포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먼저 알게 된 한 목사의 아버지(당시 예비군 중대장)는 아들이었던 한 목사에게 목숨을 지키기 위해 피신하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한 목사는 차마 함께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하기로 한 시민들을 버릴 수 없어 아버지의 피신을 거절했고, 그 충격에 쓰러진 부친(父親)은 그날 별세(別世)하였다. 목숨 걸고 시민과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하겠다며 다짐하고 헌신했지만, 한 목사는 지금도 그날 자신이 아버지께 불효(不孝)를 저질렀다는 죄책감에 신도들과 시민들 몰래 숨죽이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한봉철 목사

인터뷰의 끝자락에서 한 목사는 2011년 유네스코에서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광주와 목포 등 전라남도 지역에서의 5·18 민주화운동이 전 세계 민주주의의 요체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하며, 시민들이 광주뿐만 아니라 목포·나주·화순·강진·해남·영암·무안 등 도시에서의 민주화 요구 함성을 함께 기억하고 계승해주기를 바란다고 소원했다. 그러나 현재 윤석열 정부의 5·18 민주화운동 정신 헌법 전문 수록는 공약이 이행되지 않았으며, 수십 년 지나도록 진상규명·책임자 처벌·집단 배상·명예 회복 및 기념사업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문제들이 한 목사의 염원을 가리고 있었다.

이어 과거 적지 않은 개신교계 인사들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점을 상기시키며,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 역사 복원·계승 사업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의 전국화·세계화에 발맞춰 한국기독교장로회 등 진보·에큐메니컬 교계뿐만 아니라 중도-보수성향 교계들도 보수-극우 정치진영의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각종 거짓 선전의 현혹에서 벗어나, 국내·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크게 이바지를 한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함께 기리고 5·18 민주화운동 역사 복원 및 계승 사업에도 함께 참여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정훈·임석규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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