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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회복이냐, 회귀냐?(에스라 6:19-22, 요한복음 8:1-11)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5.23 01:31
▲ Cyrus the Great ⓒBritannica

1.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의 근간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그 통치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서 지키며 살아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축복하셨지만 이스라엘을 강한 민족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항상 그들보다 더 강한 민족으로 하여금 그들을 괴롭히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나는 너희와 약속을 한다. 그 약속의 내용이 뭐냐? 내가 너희를 지켜줄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를 경외하고 나를 의지하기만 하면 된다. 어떠한 일이 있든지 나의 명령을 지키고 내 말에 충실하면, 형통할 것이다. 자, 이제 너희에게 위험이 닥쳤다. 너희는 나를 의지하려느냐? 아니면 세상의 힘에 의지할 것이냐?”

이스라엘은 이 물음 앞에서 항상 스스로 결단해야 했던 것입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직접 관여하셔서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위기의 때,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힘과 자신의 지식, 자신의 지혜, 세상의 힘과 세상의 지식, 지혜를 빌어 그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하면, 하나님은 그 시도를 무너뜨리시고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의탁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상징같은 사건이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매우 약하고 간사한 것이어서 어렵고 고난을 당할 때에는 그토록 주님을 찾다가 평화롭고 행복한 시기가 오면, 바로 그것이 주님이 주신 축복임에도, 바로 주님을 외면하고 등을 돌리고 맙니다. 우리 삶을 돌아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께 매달리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께 의지했던 때를 기억해보세요.

어떨 때였죠? 그 때는 항상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쳤을 때이지요. 고난이 있고, 환란이 있고, 어려움이 있을 때였죠. 그것도 어려움이 닥치자마자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내 힘으로 해보겠다고 이런저런 방법을 다 써보고 나서야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 인해 평화가 오고, 행복이 가득하고, 즐거움으로만 넘쳐나게 되면, 어떻게 했나요? 그때에는 정작 하나님을 잊고 세상 낙에 겨워서 살아갔던 모습을 고백하게 됩니다. 복에 겨워 즐거울 때 하나님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참 좋을 텐데, 우리 인간은 그렇지 못한 존재인가 봅니다. 원래가 그렇게 모순되고 부조리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도 똑같았습니다. 평화롭고 즐거운 삶이 계속될수록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다시 고난을 주십니다. 그러면 그들은 참으로 염치없게도 다시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받아 주십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은 사람의 끊임없는 배신과 하나님의 끊임없는 포용의 역사입니다. 성경은 그 역사 안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길이 진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역사의 한 가운데에 가장 결정적인 사건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멸망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만 하면 하나님은 이를 받아주시고 용서하시고 구원을 베푸셨는데, 이스라엘이 멸망해버렸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끝내 돌이키지 않고 악한 길을 고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이스라엘에게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더라도 잠시 하나님을 의지하는 척만 하더라도 하나님이 어차피 돌봐주실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이 남아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좋을 대로, 우리 욕심대로, 우리 맘대로 살다가 힘든 일을 당하면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 말하자. 그때에도 늦지 않는다. 하나님이 어차피 구해주시겠지. 우리는 결코 멸망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악이 최고조에 달하자 이들을 깨우치도록 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멸망을 택하셨습니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최고의 심판이 결국에는 이르고야 만 것입니다. 온 땅을 잃었습니다. 온 민족이 포로로 끌려갑니다. 삶의 터전이 파괴됩니다. 완전한 멸망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자신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주님이 손수 없애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다시 이스라엘에게 묻습니다. “나는 너희와 약속을 한다. 내가 너희를 지켜줄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를 경외하고 나를 의지하기만 하면 된다. 어떠한 일이 있든지 나의 율법을 지키고 충실하면, 형통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지킬 것이다. 자, 이제 너희에게 고난이 닥쳤다. 이 고난이 어디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너희는 나를 의지하려느냐? 아니면 너희의 힘, 세상의 힘에 의지할 것이냐?”

선지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에 멸망이 닥친다. 그 멸망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음으로 인함이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옳지 않은 길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제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와라.”

3.

오늘 성경이 전하고 있는 말씀은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복의 역사입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하나님께 다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성전도 다시 짓고, 예루살렘 성벽도 다시 쌓게 됩니다. 유월절 명절도 다시 지키면서 출애굽을 기억하고 한없이 기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다시 구원이 임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하고 있던 시절, 그들이 돌이키기도 전에, 회개하기도 전에, 구원을 이미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땅, 슬픔의 땅, 형벌의 땅 바벨론에서 아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해방을 주십니다. 새로운 제국 페르시아로 하여금 바벨론을 멸망시키신 것입니다. 이 때가 주전 538년입니다.

새로운 군주가 된 페르시아 왕은 바벨론이 다스리던 식민지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바벨론과는 전혀 다른 정책을 폅니다. 바벨론은 자기가 점령한 나라 백성들을 억압하고 원래의 문화를 말살하는 정책을 폈어요. 완전히 힘으로 눌러서 꼼짝 못하고 복종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페르시아는 전혀 다른 방법을 택합니다. 식민지 백성들에게 자치권을 보장해주고 그들의 문화를 인정해준 것입니다. ‘우리는 바벨론이랑 달라요. 여러분 힘들었죠? 이제 원래처럼 여러분들 스스로 다스리고, 여러분들 신도 섬기고 다 하세요.’ 그렇게 민심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이런 정책 덕분에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유대인들도 스룹바벨이나 세스바살 같은 지도자들과 함께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에스라라는 사람을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에스라는 레위 지파 아론의 후예입니다. 민수기 18장에서 하나님은 아론에게 그 유산으로 아무것도 주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너의 유산은 바로 나다. 네가 차지할 몫은 바로 하나님이다’라고 하십니다. 모든 유산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이 이제 그 유산을 찾게 되는 바로 이 시간에, 하나님은 에스라를 통해서 레위 지파가 가지고 있던 유산인 ‘하나님’을 회복하도록 준비시켜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능통한 사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한 사람을 예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절망의 시간이라고 느낄 때에도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시간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하심과 그 사랑하심에 의한 계획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시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가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수많은 심판과 고난의 세월을 주시기도 하지만 그 목적은 우리에게 당신의 율법을 깨닫고 지키도록 인도하심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하는 것도 고난을 당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넘어지는 것도 파멸되는 것도 모두 온전히 회복되기 위함입니다. 결국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극하신 은총이 임합니다.

4.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회복의 방식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토록 회개를 촉구하시고 율법을 지키기를 요구하셨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눈물로 회개하고 뉘우치고 돌아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구원을 먼저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을 내리실 때와는 달리 이스라엘이 회개하지도 않았음에도 미리 구원을 허락하시고 구원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에게 임합니다.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믿으면 비로소 이루어지는 조건부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미리 베푸시고 하나님을 믿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을 이스라엘의 눈앞에 보여주시고, 율법을 가르치시면서 ‘자, 이것을 지키면 구원해 주겠다’ 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7장 1절을 보세요. 에스라가 도착하여 말씀을 가르치고, 율법을 지키라고 인도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완전한 구원을 이미 다 베풀어 주신 다음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7:1)’ 비로소 에스라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십니다. 모든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한 다음에(6:22)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가르치시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회복의 조건이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은 처음에는 조건부의 언약이었어요. ‘내 명령을 지키면, 이러이러한 복을 주겠다. 지키지 않으면, 이러이러한 벌을 내리겠다’ 하는 것이 언약의 공식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에게는 심판이 닥쳤고,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할 때 그들에게 복이 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새로운 언약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언약의 공식이, 완전히 새로운 언약의 논리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구원의 공식입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했다. 그러니 내 명령을 지켜라.’ 예전처럼 ‘내 명령을 지키면 구원해주겠다’가 아니라 ‘구원했으니 지켜라’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회복의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한 시험이 아니라, 구원 이후에 닥치는 시험인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의 율법을 받습니다. 다시 그들 앞에 하나님의 물음이 닥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와 약속을 한다. 내가 너희를 지켜줄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를 경외하고 나를 의지하기만 하면 된다. 어떠한 일이 있든지 나의 율법을 지키고 충실하면, 형통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지킬 것이다. 자, 이제 너희에게 평화의 시기가 왔다. 이 평화가 어디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너희는 나를 의지하려느냐? 아니면 너희의 힘, 세상의 힘에 의지할 것이냐?”

이스라엘의 회복의 완성으로써 그들에게 주시는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또 다른 시험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회복하고 그 신앙대로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삶의 방식을 지켜나갈 것인가? 외적 평화에 안주하여 다시 옛 방식으로 돌아갈 것인가? 하나님의 회복시켜주심을 완성할 것인가? 하나님의 회복시켜주심을 거슬러 죄악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법을 이루는 일을 언제나 사람들의 선택으로 남겨 놓으십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저항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서 어쩔 수 없이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외면할 수도 있는 수많은 상황들을 인간에게 제시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한 어려운 길을 통하여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은 평화를 미리 허락하시고 그 후에 율법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다시금 인간의 의지와 선택으로 남겨 놓으십니다.

음행하다 잡혀온 여인을 보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쳐라.’ 예수님은 음행한 여인의 믿음을 보신 것도 아니고, 그의 회개를 확인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새롭게 설정하신 구원의 논리를 가르쳐주십니다. 먼저 구원하십니다. 일단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무한한 사랑을 먼저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둘러싼 무리에게도 똑같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처벌하고 심판하고 정죄할 생각 말고, 뉘우치는지 반성하는지 그런 것부터 따지려고 하지 말고, 먼저 구원을 베풀어 주어라. 그런 다음에 타이르고 가르치고 사람 만들어 봐라.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그렇게 하신 것 아니냐?’

5.

오늘 우리 앞에도 하나님이 주신 평화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행복한 날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 속에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주님이 주신 율법이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모범이 있습니다. 주님을 믿으라고, 당신의 뜻하심대로 살아보라고, 당신의 뜻을 세상에 이루어보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요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 인간의 소원, 인간의 행복을 추구할 것입니까? 나의 지식, 나의 지혜, 나의 힘을 의지해서 세상을 살아갈 것입니까? 이스라엘처럼 철저한 징벌을 받으시렵니까? 지금이 평화의 때라고 주님의 율법을 혹 소홀히 하시렵니까?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시기 전 인내하고 참아주시는 시간을 참 평화라고 오해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는 않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평안한 삶을 누리려고만 하는 우를 범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주신 평안한 삶은 행복한 삶은 당신의 율법을 지킬 때에 진정으로 완성되는 것임을 깨달읍시다. 

오늘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평화의 때를 보내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의 평화가 참 평화입니까?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대를 보내고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온전한 회복은 우리의 선택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완성해가야 합니다. 죄악으로만 달음질하려는 노력을 거두고, 하나님의 온전한 회복시켜주심의 방향으로 달음질해야 합니다.

내 개인의 삶에서, 또한 함께하는 사회에서, 나라에서, 우리는 그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완성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누려야 합니다. 바로 그때,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참된 평화가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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