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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유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광야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민수기 10,29-32; 갈라디아서 5,16-17)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 승인 2023.05.25 02:06
▲ 모세에게 불평하는 아론과 미리암 ⓒWikipedia

사람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경험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경험이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됩니다. 이스라엘은 신명기 이후 느헤미야에 이르기까지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해왔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에는 이방인 아내들을 내보내는 강수를 두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이방인과의 결혼이 멈춰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한 까닭은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거나 아니면 혼합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려가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니어도 그 때문에 혼인을 금지하거나 파혼시키는 것은 지나쳐 보입니다. 그런 일이 오래 전부터 지켜져 왔다면 이스라엘 역사에 그토록 중요했던 룻이나 라합 같은 여인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던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사위였고, 지금 그의 상태는 독신인지 아닌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에티오피아 여인을 아마도 아내로 맞은 것 같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이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무엇에 근거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다음에 한 말의 내용이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오직 모세하고만 말씀하시고 우리하고는 안하시냐고 그들이 모세에게 따져 묻습니다. 양자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는지요? 직접적인 관련은 없을 것입니다. 말싸움이란게 늘 그렇듯이 다툼은 그렇게 시작되었겠지만 말이 오가면서 그 끝에 이런 말까지 나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평소 맘속에 쌓아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해도 좋은 말이 있고 해선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이들이 이렇게 말하게 되기까지 모세가 어떤 역할을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말에 모세가 무어라고 반응할 자리에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라는 말이 대신 나오는걸 보면 모세는 적어도 그 말에는 별로 내색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들으셨습니다. 사적인 일일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그 일에 개입하셨으니 모세와 달리 이 일을 매우 중대하게 여기신 듯합니다. 이스라엘을 이끌어가는 이 사람들이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이스라엘 해방 사역에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긴급 개입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세가 왜 모세인지, 모세가 그들과 무엇이 다른지 짧막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일러주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시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이때문에 그는 어떤 예언자들과도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 대한 그들의 비방을 마치 자신에 대한 비방인 양 진노하시고 그들을 떠나셨는데, 그때 장막 위에 있던 구름도 떠나갔다고 하니 그 진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노는 미리암에게 문둥병으로 남았습니다.

왜 미리암에게만이라는 물음이 생길 수 있겠지만, 예언자와 모세가 비교되었기 때문이라는 정도로 정리하는게 좋을 듯합니다. 그를 위해 아론이 모세에게 부탁하고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하여 일주일 격리하는 것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모세의 간구가 당연해 보일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 징계받은 사람을 위해 간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이제 이들은 다시 하나님과 이스라엘 앞에서 하나가 되어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을 함께 이끌어갈 것입니다.

이 사건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특별히 총애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안 일)을 충성스럽게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그는 그 일을 맡지 않으려고 하나님께 여러 핑계를 댔었지만, 하나님의 강권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일을 하게 된 다음에는 지금까지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하나님의 신뢰를 얻을 만큼 했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에 순종하는 삶을 배우고 그 깊이를 더해 왔습니다. 그는 오늘의 신약본문을 따라 말하면 하나님의 영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훗날 가데스 바위 사건에서 그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고 들어가게 해달라는 그의 간구를 끝내 거절하셨습니다. 이것은 나중 일이고 지금까지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자로 성실하게 그 일을 하나도 소홀함 없이 온 힘을 다해 해왔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그리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에게 온갖 이유로 시달리면서 그 일을 지금까지 해왔습니다. 그에 대해 온유하다고 하는 평은 공연한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그가 그 고된 일을 어떻게 해왔는지 짐작케 합니다.

갈라디아서 본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 성령과 함께 살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육체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까닭은 갈라디아 교회가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는 것으로 비쳐졌기 때문입니다. 할례파와 무할례파로 나뉜 교회는 서로를 부정하며 교회를 정체성 상실의 위기에 처하게 했습니다.

혹시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와 다투던 모습이 여기서 보이지는 않는지요? 바울의 말은 전적으로 할례파 사람들을 향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자신들의 삶을 지배했던 법과 그 체제로부터 자유로와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유를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고 이방 기독교인들에 대한 지배권을 얻으려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갖게 된 것이 무엇인지 몰랐거나 잊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5,5에서 밝히는 대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해 믿음으로 의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립니다.

의의 소망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으로 축소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의에는 의와 관련된 모든 내용들이 담겨있습니다. 바른 소망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삶,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바른 세상 등 모든 것들을 포괄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면, 그리고 성령을 통해 그 희망을 따라 산다면, 물고 뜯는 모습이 연출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른 소망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헛된 영광입니다(5,26). 이것을 구하는 것이 서로 다투게 만들고 서로를 죽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론과 미리암과 모세 사이의 다툼에 개입하신 것도 그들을 살리고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들이기 위해서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자기를 세우고 지배하고 군림하는 헛된 영광을 향합니다. 이는 자신을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공동체를 그릇된 길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반면에 성령을 따른 의의 삶은 자신과 공동체에 생명과 자유와 기쁨과 감사의 열매들이 가득차게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정의와 평화를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의의 소망 곧 바른 소망이 우리 속에 자라기를 원합니다. 그 소망이 우리 인생의 광야에서 성령을 따라 가는 이정표가 되기를 빕니다. 헛된 영광이 우리 삶의 목표가 되어 우리 삶이 파멸로 치닫지 않기를 빕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자유로와진 우리의 삶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삶이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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