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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이 생각하는 ‘보이지 않는 손’은 틀렸다애덤 스미스 『국부론』에서 시작하는 하청노동의 문제 (1)
이정훈 | 승인 2023.06.03 15:28
▲ 지난해 7월 22일 오전 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 파업 51일째인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1독의 가로, 세로, 높이 각 1m 철 구조물에서 31일째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이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경제학에서 자주 회자되는 문구 중의 하나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다.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12년 간의 노력을 쏟아부어 저술한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 등장하는 문구이다. 이기적인 개인의 사사로운 영리활동이 사회 전체의 공적 이익을 증진시킨다는 의미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이 책에서 스미스는 이런 말도 했다.

“그러나 모든 사회의 연간 수입은 언제나 그 사회의 산업에서 생산하는 연간 총 생산량의 교환 가치와 정확히 같다. 또는 차라리 교환가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이 자신의 자본을 국내 산업의 지원에 사용하고, 또 그 산업에서 최대의 이윤을 산출하고자 한다면, 모든 개인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연간 수입을 만들려 노력하게 되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분명히 개인은 공공의 이익을 의도적으로 증진시키려고 하지는 않으며, 얼마나 증진시키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다. 외국 산업보다 국내 산업에 대한 지원을 선호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안위만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며, 그 산업을 운영하는 것도 자기 자신만의 이득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많은 경우와 같이, 개인은 바로 그때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자신이 의도치 않았던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의도치 않았다고 해서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아니다. 사회의 이익을 의도적으로 증진시키려 할 때 보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함으로써 개인은 더 자주, 더 효율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다. 나는 공공 이익을 위해 거래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진짜로 크게 이익이 되는 경우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는 상인들 사이에선 흔치 않다. 그리고 그러지 말라고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국부론』, 제4편)

즉 인간의 이기심과 경쟁으로 모든 시장 참가자가 열심히 일하고, 자원이 효율적으로 거래되는 시장에서, 가격 결정권이 소수가 아닌 시장 참가자 전원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시장이었다. 이렇게 되면 생산자는 최적의 가격으로 최적의 이윤을, 소비자는 최적의 가격으로 최대의 만족을 이루는 서로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유지하는 힘이 바로 시장 속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보았다.

하지만 스미스가 가장 부정적으로 생각한 “보이는 손”은 정부와 같은 특정의 집단 혹은 소수의 이익집단이 시장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의지대로 가격이 임의로 조절되거나, 독과점 현상으로 자원의 자유로운 유통을 막아, 시장의 순기능을 막아버리는 현상이 발생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국방, 사법, 공공 토목사업 같이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이나 개인이 하려고 하지 않을 일만을 해야 하며, ‘길드’같은 특정 집단이 법을 등에 업고 자원을 독점해(chartered monopoly) 시장 유통을 통제하는 일이 발생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 가지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은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지 말고 기업들의 담합과 독점을 장려하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독점을 억제하기 방편이었다. 왜냐하면 이 당시의 독점은 중상주의에 의한 독점이었으므로 국가의 개입은 오히려 독점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애덤 스미스가 이런 주장을 한 것은 그가 살던 시대의 현상 때문이었다. 거대 상인 등이 정부와 결탁해 중상주의 정책을 밀어붙이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였으니 애덤 스미스가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은 “정부는 거대 상인들과의 결탁해 그들의 독과점을 정당화 하지 말라”라는 뜻에 더 부합한다.

이를 현재로 옮겨보면 대기업들이 로비를 하고 국가를 움직여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 역시 애덤 스미스 관점에서는 잘못된 것이다. 이 현상은 거대 기업과 정부가 유착한 셈이기 때문이다. 국부론에선 이런 거대 상인의 독점과 유착,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법률 제정 등의 활동을 비판하는 내용도 즐비하다.

원청기업과 하청기업의 구조, 애덤 스미스를 오독한 것

이러한 시장의 원리는 1903년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에 경제학과가 처음 설치된 이후부터 현재까지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스미스가 생각했던 거대한 시장 자체 뿐만 아니라 현대에 들어서는 세분화된 각 시장 분야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노동자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구입하는 노동시장에서도 예외가 없다.

하지만 현대의 노동시장은 18세기 애덤 스미스가 생각했던 노동시장과는 그 양상이 많이 달라졌다. 이미 제국주의 시대가 시작되고 시장이 식민지까지 확대되고, 원료 공급과 생산이라는 구조까지 달성되었던 시대를 기반으로 현대의 시장은 전 지구적인 성격이 되었다. 일례로 시총이 300조 원에 달하는 어떤 거대기업은 오로지 제품의 설계만을 담당하고 물품 생산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다른 나라에 맡긴다.

이러한 초거대기업이 물품 생산을 그저 맡겨놓는 것은 아니다. 물품 생산을 담당한 기업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까다로운 품질관리를 진행한다. 초거대기업이 원하는 품질 수준을 유지하지 못하면 가차없이 물품 생산기업은 잘려나가게 된다.

이렇게 원청기업과 하청기업이 생겨나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원청기업과 하청기업의 상황을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전 지구적 상황에서 이런 형태를 비일비재 하다. 조금 더 작은 수준의 한국 노동계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를 것이 없다.

거대 원청기업은 비용절감을 위해 중소기업으로 하청을 주고, 또 이 중소기업은 더 작은 기업으로 하청을 주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쇄작용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저 ‘비용절감’이라는 부분이다.

따라서 하청업체는 대개 인건비 절감, 안전 비용 절감처럼 하청업체 노동자에게는 지옥과 같은 고통이 더해지는 것이다. 원청기업은 하청기업 노동자가 어떤 고통을 받는지 관심사가 전햐 아니다. 그저 품질 좋은 물품을 생산해 내느냐 마느냐가 관심일 뿐이다.

이런 상황을 가정해, 사실 가정이 아니라 사실인 부분인데, 볼 수 있다. 원청기업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원청기업의 CEO가 폭언 등 지속적으로 학대를 자행하고 안전 장구, 야근, 특근 수당 미지급, 4대 보험 미가입, 퇴직금 없이 낮은 임금을 주며, 임금을 체불하며, 산재가 발생해도 보상을 해주지 않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전화 한 통으로 해고해 버린다면 엄청난 규모의 소비자 불만에 시달릴 것이다. 이는 곧바로 전국 노동조합의 지원을 받는 파업일 발생하게 될 것이고, 원청기업은 막대한 경제적 손해를 입게 된다.

하지만 하청기업 소속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청기업 사장이 위에 언급된 모든 불법행위를 자행해도 원청기업은 사실상 아무런 경제적 손해를 입지 않는다. 하청기업의 행위 때문에 원청기업이 손해를 입게 된다면 원청기업은 그냥 하청기업을 버리고 다른 하청기업에게 일을 맡기면 끝이다. 원청기업은 고품질의 생산품과 비용절감을 이루면 그만인 것이다.

국가의 개입만이 시장의 원리를 실현하는 것

이러한 비용절감을 위해 하청기업을 탄생시키는 것이 애덤 스미스가 생각했던 시장의 원리의 ‘보이지 않는 손’이었을까. 이러한 구조 속에서 하청기업의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도 조금만 더 참으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해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을 넘어서 서로 윈-윈 하는 상생의 구조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일까. 한국 노동계의 역사는 이런 기적을 한 번도 창출한적이 없었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틀린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거대 원청기업의 독과점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개입하지 않는 국가의 방치가 일을 키운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시장의 원리를 완전히 오독한 것이다. 오히려 국가의 적극적인 노동시장 개입이 애덤 스미스의 시장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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