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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과 서광선 그리고 한경직, 같지만 다른 점6.25전쟁과 체험적 반공주의의 치유와 극복
허호익(전 대전신대 교수) | 승인 2023.06.05 14:21
▲ 왼쪽부터 손양원 목사님, 서광선 교수님, 한경직 목사

6.25 전쟁 전후 공산당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기독교인들 중에는 서로 반대의 길을 간 지도자들이 있었다. 한경직 목사와 손양원 및 서광선 목사가 바로 고통스러운 개인적인 체험을 서로 다르게 대응한 사례이다.

한경직 목사(1903-2000)는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한 후 1933년 신의주 제2교회 담임교역자로 청빙되었으나, 1942년 일제에 의해 당회장직에서 강제 사임당했다. 1945년 9월 2일 소련군과 함께 한반도에 들어 온 김일성은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한 목사는 친미 반동 기독교인으로 몰릴 위기에서 일부 교인들과 함께 월남했으며, 12월에 서울 명동에서 오늘날 영락교회의 세웠다.

자연스럽게 영락교회는 서북지방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집결지가 되었다. 다음 해인 1946년 11월 교회에 속한 청년들이 중심이 된 서북청년회가 출범했으며, 이들이 바로 서북청년단의 모체였다. 서북청년단은 잔혹하리만큼 철저한 멸공(滅共)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그 배후에는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살리는 길은 멸공’이라고 강조한 한경직 목사의 영향이 컸다. 그는 훗날 다음과 술회하였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이후 서북청년단은 전향한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한 ‘보도연맹’이 6.25 전쟁 중에 북한군에 협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고 예비검속 차원에서 관련자들을 대량 학살에 나섰다. 6.25전쟁 전후 이승만 정권 하에서 최소한 50만 명의 양민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6.25 직전 남로당 활동을 한 바 있는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 후 자신을 공산당원 의심하는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한경직 목사를 미국에 보냈다. 한 목사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박정희의 혁명공약에 공감해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미국 측에 설파했다.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가 방북하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비롯한 진보진영에서는 ‘조국통일운동의 새로운 전기’라고 환영하였고 적극 지지하였다. 보수 진영에서는 한국교회의 한 축이 무너졌다며,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총연합을 창립하여 뉴라이트 운동에 앞장섰고, 이로 인해 한국 교회의 좌우 이념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손양원 목사(1902-1950)는 3.1운동 이후 부친이 고향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이 되었고  중동학교(현 중동고등학교)를 중퇴할 수 밖에 없었다. 1938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뒤 전도사가 되어서 1939년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애양원 교회에 재직했다. 환자 중 하나가 불만을 품고 “우리가 짐승이냐? 우리도 똑같은 사람이다”라고 외치면서 간호사들 중 하나를 목침으로 때려죽이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에 손양원 목사는 맨발로 그 방에 들어가 간호사를 죽인 그 환자에게 다가갔다. 잠시 기도를 올리던 손 목사는 상처를 직접 입으로 빨아 고름을 빼냈다.

손양원 목사는 주기철 목사처럼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1940년 체포되어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수감 생활을 하였다. 1948년 발생한 여순사건 와중에서 우익 학생 단체 활동을 하던 두 아들이 좌익에 의해 살해되었다. 손 목사는 두 아들의 장례 예배 때 감사 기도를 올려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이후 안재선이란 좌익학생이 두 형제를 살해했다고 자백하자, 그를 용서하고 자신의 양자로 삼아 ‘원수 사랑’의 귀감이 되었다. 그리고 1950년 6.25 전쟁 초기 여수로 진격한 북한군에게 체포된 손 목사는 1950년 9월 28일 향년 49세에 총살당했다.

서광선 목사(1931-2022)는 목사였던 아버지가 6.25 전쟁 초에 다른 목사들과 함께 밧줄로 묶여서 총살당했다. 대동강 기슭에 떠있는 부친의 시신을 확인한 10대 소년은 동생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내려와 복수심을 품고 해군에 입대했다. 1962년 뉴욕의 유니언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그는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해 듣고, 신학생 친구들이 시민권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는 자신의 원수에 대한 태도와 복수에 대한 열망에 대해 신학적으로 성찰하면서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

1964년부터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박정희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서광선은 1980년 해직된 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공산정권에 저항했고 인권과 민주주의, 자유를 위해서 북에서 순교했는데 여기[남한]에는 소위 민주적 독재자가 있다. 공산주의 독재자나 자본주의 독재자나 무슨 차이가 있나”고 밝혔다. 1988년에는 ‘88선언’으로도 불리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에 주필로 참여하는 등 기독교 통일운동에 앞장섰다.

한경직 목사는 성서비평학의 수용한 <아빙돈 주석>(1935)의 번역에 참여하는 등 그의 신학의 상대적 진보성에도 불구하고, 냉전 시대의 이념 대결의 한 축에만 함몰되어 철저히 ’반공의식’에 기초한 세속사적 관점에서 ‘반공투쟁’을 주도하였다.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설교에서 한경직 목사는 공산주의를 성서에 나오는 ‘붉은 용’과 동일시하면서 공산당 박멸을 기독교인들에게 촉구하였다.

반면에 손양원 목사는 그의 보수적 신학과 철저한 반공의식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상당히 객관적인 인식을 하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의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피해자인 자신의 두 아들 뿐 아니라 그 둘을 살해한 공산당원 역시 당시의 세계사적인 냉전 구도가 빚어낸 이념 대결의 피해자라는 성찰에 이르게 되자, 개인적인 비극을 구속사적 관점으로 승화시켜 가해자를 용서하고 양자로 들이는 ‘원수 사랑’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10대의 어린 나이에 공산정권에 의해 처형된 채로 버려진 부친의 시신을 목격하고 원수 갚을 길을 모색했던 서광선 목사는, 훗날 신학적 성찰을 통해 공산주의의 본질은 반민주와 독재라고 보았다. 따라서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고 독재에 항거하는 것 역시 반공의 길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개인적인 비극을 미래지향적으로 승화하여, 다시는 이념 갈등과 전쟁이 없는 나라를 이루기 위해 좌우 이념을 넘어서서 민족 통일과 남북 평화에 헌신하는 것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적극적이고 신앙적인 자세라는 것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허호익(전 대전신대 교수)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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