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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민중신학’이기 위해민중 메시아론에서 농민의 위치 (7)
안재학 목사(석천교회, 연세대 박사과정) | 승인 2023.07.06 00:11
▲ 거대 다국적 농산기업체들과 금융 자본과 남반구 농민들의 고통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Getty Images

민중신학이 태동한 지도 반세기가 지났다. 민중신학은 당시 한국적인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이 군부 독재의 엄혹한 현실 속에서 발생했다. 민중신학은 처음부터 민중 선교라는 과제와 한 몸이었다. 안병무의 입장에서 민중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 서구 중심의 기독교 선교는 서구의 근대성이 주체가 되어 피식민지 사람들을 대상화하고 객체화시킨 것과 동일한 모습으로 선교의 대상을 철저히 타자화시켰다. 민중신학은 이러한 민중들 앞에 민중이 역사의 주체임을 당당히 선언하고 민중으로부터 선교가 시작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예수도 민중들과 함께 갈릴리로부터 해방 운동을 시작했다. 도시 예루살렘을 향한 진격은 갈릴리 민중들의 급진적 저항으로서 예루살렘을 향한 선교라고 볼 수 있다.

아래로의 민중신학을 위해

한국에서 태동한 민중신학은 이제 한국만의 고유한 민중신학이 아니다. 오늘날 논의되는 한국에서의 민중신학은 현장을 잃어버리고 무수한 담론들만 양산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안병무가 민중을 정의할 수 없는 실체로 남겨둔 것이 화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늘날 한국의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한국은 더 이상 민중신학의 현장일 수 없다.

물론 아직도 비정규직 문제 등 노동자의 권리가 모두 해결되었다던가 농민과 농촌의 소외 문제, 또한 내부 식민지적인 상황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 등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민중신학이 현장 속에서 민중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꿈꾸기에는 민중도 변했고 사회도 너무나 자본주의 체제와 너무나 공고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민중신학은 마가 공동체가 예수와 더불어 순례를 하며 민중들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갔듯이 이제 남반구에 고통받고 있는 농민, 여성, 아동, 난민들 속으로 스며들어 가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오클로스는 전 지구적인 현상이다.(1) 이런 측면에서 민중신학을 아래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 강단 신학에서 벗어나 현재적으로 계속 일어나는 예수의 민중 사건으로 들어가야 한다.

아래로부터 민중신학이라는 말은 담론에서 현장으로 Top-Down의 방식이 아니라 민중으로부터, 민중 사건으로 Bottom-Up 하는 방식을 일컬음과 동시에 고통받고 착취당하고 있는 남반구(Global South) 농촌과 농민, 농업의 현장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의 행진이다. 민중이 꿈꾸는 새로운 사회, 즉 하나님 나라의 민중 사건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생명이 싹트고 약동하며 서로가 서로를 위해 내어주고 서로를 먹이는 삶의 공동체를 다시 일구어내는 일에 힘을 내어서 가담하고 참여하고 연대하는 일속에서 우리를 스스로 자기를 초월하는 민중의 사건, 예수의 사건을 경험할 것이다. 민중신학은 민중의 내부와 외부에서 민중사건 안에서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대한 확신과 실천을 이끌어 내어야 한다.(2) 민중을 향한 선교가 아니라 민중이 주체가 되어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하나님의 선교방식이다.

안병무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사회참여를 하는 방식이라고 보고 있으며 없는 자에게 뺏을 것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자에게 나눠 줄 수 있도록 호소하고 모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3) 이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 경제 공동체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며 하나님 나라 운동의 선교적 방향일 것이다.

예수가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는 배고픈 자들이 가진 자들의 부를 함께 나눠 갖는 것이었고 모두가 기쁨의 잔치에 참여해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나라였다. 배고픈 자에게 평화롭고 행복한 사회는 나누어 먹는다는 것, 잔치이며 다른 것이 아니라고 안병무는 말한다.(4) 이러한 안병무의 민중신학적 성서해석은 성서를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정한 실천(orthpraxis)을 통해 민중의 현실과 사회적 운명을 변혁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는 데 궁극적 목표가 있다고 할 것이다.(5)

아래로부터의 민중신학은 민중의 현장과는 동떨어질 수 없으며 민중신학은 민중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 기반한 선교신학적 관점 또한 함께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장 없는 민중신학은 말 잔치일 뿐이다. 예수의 민중은 그 누구보다도 농민들이었다.

근대 주체성에 기반한 선교는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향하는 민중을 위한 서구 중심의 선교였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선교는 민중을 향한 선교가 아니라 민중과 더불어, 민중과 함께 하는 선교이다. 더 나아가 민중으로부터 시작하는 선교이다. 그 해답에 대한 열쇠가 바로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써 당당히 역할을 감당하는 민중 메시아론이다.

다시 말해서 농민을 위한 선교가 아니라 농민으로부터 시작하는 선교이다. 왜냐하면, 수탈당하고 착취당하고 있는 남반구 농민들과 농촌 공동체야말로 민중 사건의 현장이면서 여전히 생명이 숨을 쉬고 약동하는 역사의 주체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농민이 아니고서야 어느 누가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인가? 농민이야말로 세계를 먹이고 입히는 집단적 메시아의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이러한 측면에서 민중신학은 이제 새로운 남반구 소농들의 사건, 농민 사건에 대한 민중신학적 새로운 선교적 과제에 책임 있는 타자와의 연대가 절실히 필요하다.

오늘의 민중신학이기 위해

오늘의 세계는 예수 당시와 민중신학이 태동했을 당시와 비교했을 때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컴퓨터와 인공지능(AI)의 발달로 모든 정보가 빅 데이터(big data)로 모여서 4차 산업의 최선두에서 인간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인간만의 고유 영역이라고 여겼던 상상력과 창의력, 학습 능력마저도 딥 러닝(deep learning)을 통해 이제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능가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농업의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첨단화된 시설 재배와 로봇과 자율주행 트랙터 등이 선진국의 대단위 농지에서 운영 중이다. 농민이 필요 없는 세상이 도래한 것일까? 이 첨단화되고 복잡한 세계 속에는 아직도 현대 문명의 편리와 첨단의 혜택과는 거리가 먼 남반구를 중심으로 전 세계 인구의 12%, 9억 5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아직도 낮은 수준의 주거 형태와 영양 섭취, 취약한 위생 상태에 노출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오늘을 살아가는 데 세계 농촌과 농업, 그리고 남반구 농민의 문제는 고통 받고 있는 민중사건의 현장임과 동시에 부활 사건의 현장인 갈릴리 농촌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 농업을 통한 새로운 농촌 공동체, 그리고 새로운 농민이야말로 농부이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직접적으로 생명을 심고, 경작하고 먹이는 하나님의 일과 섭리에 관여하는 새로운 역사적 주체로서의 위치와 자격이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 글들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농민, 농업의 문제 해결이 최우선이라는 말이 아니라 오늘의 세계가 얽혀 있는 복잡한 구조적 모순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농촌 공동체와 지속 가능한 새로운 농업을 통한 지역 공동체의 부활 사건에 있다고 필자는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해방 운동의 역사적 주체는 분명 민중이다. 그리고 지금도 세계를 먹여 살리고 있는 농민들이다. 민중인 씨앗은 딱딱한 현실을 삶을 뚫고서라도 생명을 길러내고 열매를 맺어 다시 민중을 먹인다. 민중이 민중을 먹인다.

이에 반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도 30배, 60배, 100배의 수익을 올리고 있는 저 거대 다국적 농산기업체들과 금융 자본에 맞서서 하나님 나라의 ‘자비의 경제학’을 세워나가는 것이다. 그 현장이 바로 갈릴리라는 농촌이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 고통 받고 있는 남반구 농촌 공동체와 농민의 삶의 현장이 바로 그곳이다.

오늘의 우리들의 신학이 생태 위기를 이야기하고 기후 위기를 논할 수는 있으나 남반구 농민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라면 이는 거짓이다. 민중신학은 이러한 측면에서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세계의 민중 사건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참여하고 연대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미주

(1) 김진호, 김영석 편저, 『21세기 민중신학, 세계신학자들 안병무를 말하다』, 257.
(2) 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1), 185.
(3) 안병무, 『생명을 살리는 신앙』(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7), 103.
(4) 안병무, 『갈릴래아 예수』(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20), 141.
(5) 김명수. “안병무의 탈 부르주아 신학적 성서해석학.” 『신학사상』 제96집 (1997년 3월), 141.

안재학 목사(석천교회, 연세대 박사과정)  jagafoc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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