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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 앞두고 만신창이가 됐다”[기획특집 4] 피해자 권형택 선생을 통해 들어본 녹화사업의 모습
임석규 | 승인 2023.07.18 23:50
▲ 학생운동시절부터 녹화사업의 피해자가 되기까지 담담하게 털어놓던 권형택 선생은 회한에 잠기기도 했다. ⓒ임석규

에큐메니안은 지난 6월 21일부터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당시 기독인·청년들을 불법 강제징집·프락치 활동 강요한 ‘녹화사업(綠化事業)’을 기획특집으로 다뤄왔다.

지난 세 번째 기사는 녹화사업 공작을 직접 당했던 그리스도인 신의주 선생을 만나 그가 겪었던 참혹했던 청년 시절을 돌아봤으며, 이번에는 일반 시민이 당시 청년 시절 겪어야 했던 녹화사업의 모습을 살펴본다.

이후 녹화사업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배·보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 과정 및 기독교대책위의 활동을 다룰 예정이다. - 필자 주

3남 3녀 중 다섯째였던 권형택 선생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향인 전라북도 익산시를 떠나 전주시로 유학했다. 당시 다른 또래 학생들처럼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던 권 선생이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던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1972년 11월 22일 당시 권 선생이 다녔던 전주고등학교에서는 3학년을 중심으로 박정희 유신헌법 독재를 반대하던 시위가 열렸는데, 이때 시위에 적극 나선 소병훈·채수찬·박경희가 제적당하고 최규엽·박종영·최수열·오용석이 무기정학 처분을 당했다.

농법회, 역사와 사회현실을 가르쳐주다

박정희 유신정권에 맞선 선배들을 지켜봤던 권 선생은 한국사에 깊이 관심 두게 되었고, 열심히 학업에 정진한 결과 1974년에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에 합격했다. 서울대 특성상 1학년 때 인문계열로 배정된 뒤 2학년 때부터 전공을 배정받게 되어 있어 권 선생은 2학년 때 바랐던 국사학도가 되었다.

권 선생은 서울대 재학 당시 ‘농촌법학회(이하 농법회)’에 가입했다. 1961년에 창립된 농법회는 당시 서울대의 대표적인 이념서클이었으며, 회원들은 농촌활동(이하 농활)이란 현장체험을 통해 농촌과 사회문제에 관심을 키워나갔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 서울대 종합화를 통해 학내 전체 조직으로 규모가 커지자 유신정권 때 공안 탄압을 피하기 위해 비공식 조직으로 전환됐다.

권 선생도 농법회에서 에드워드 핼릿 카와 리영희 선생의 저서들을 공부하며 박정희 정권의 현실을 깨닫게 되었고, 농활에서 만난 농민·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을 보고 독재에 숨 막히던 사회현실을 바꿀 책임을 져야겠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오랜 도피와 제적 끝에 입대하다

권 선생이 본격적으로 독재정권에 탄압받던 당시를 되돌아본다. 1977년 11월 11일, 서울대 학생식당과 도서관에서 ‘민주구국투쟁선언문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국사학과 74학번 동기인 김경택을 중심으로 권 선생과 정기영·양기운·문성훈·연성만이 모여 박정희 유신정권 타도 및 긴급조치 해제 촉구 등을 요구한 시위를 전개한 것이다. 이때 양기운·문성훈이 경찰에 체포됐으며, 권 선생은 교직원들에게 잡혀 경비실에 갇혀있다가 학생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왔다.

교직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지만, 그것이 권 선생의 약 2년간 수배 도피 생활의 시작이었다. 길고도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보내던 중, 대한민국에 유례없던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1979년 10월 26일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을 살해한 ‘10·26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유신의 심장이 사라지고 서울은 민주주의의 봄을 맞이했다. 이때 권 선생은 1980년 3월에 수배가 해제돼 복학하게 됐다.

그러나 권 선생은 결국 졸업하지 못하게 됐다. 12·12 군사 쿠데타로 정국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의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다시 서울대로부터 제적당한 것이다. 이후 강제징집 대상이 된 권 선생은 9월 8일 군에 들어갔다. 영장을 받았던 권 선생은 처음엔 전두환 정권의 노예가 되기 싫어 입대를 거부하려 했지만, 병역은 국민의 의무였고 또 이를 거부해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 것을 원치 않아 결국 입대를 선택했다.

논산훈련소로 징집된 권 선생은 ‘특수학적 변동자’로 낙인찍혔다. 권 선생은 특수학적 변동자가 되면 군 생활이 매우 힘들어진다는 말을 얼핏 들은 적 있어 나름 걱정했지만, 생각 외로 군 생활에 큰 어려움을 당장 겪지는 않았다고 회고했다. 권 선생은 훈련병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고 군 기초훈련을 받았으며, 이때 같은 학생운동 관련 징집자들 50여 명을 만나기도 했다.

전역 후 다시 연락하자는 약속을 뒤로하고 그는 강원도 진부령 소재 12사단 52연대 65포병대 향로봉 추진포대에 105㎜ 포수로 자대배치 받았다. 보통 특수학적 변동자 대다수는 주특기를 소총수로 고정돼 최전방에 배치되는데, 권 선생의 경우는 특이하게 포수로 배속받은 것이다. 그러나 무거운 포탄을 들고 나르는 포수 업무가 고된 것은 소총수와 마찬가지였다.

▲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받아준 서울제일교회 박형규 목사와 교우들의 사랑은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임석규

전역 앞두고 들이닥친 보안사 요원들

선임들은 권 선생이 특수학적 변동자였던 걸 알았지만, 전방서 함께 동고동락했기에 전우애로 그를 잘 대해줬다. 가끔 선임하사가 심술을 부리거나 포대장이 휴가 전후 호출해 동향을 물어보는 것 외에는 여느 포병들과 다를 바 없는 군 생활을 보냈다고 권 선생은 회고했다.

무사히 병장이 되어 전역까지 4개월이 남았던 권 선생 앞에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졌다. 1983년 1월 권 선생은 갑자기 보안사령부 요원들에게 붙들렸다. 보안사 요원들은 그의 부대와 멀리 떨어진 서울 충무로에 있는 진양상가아파트, 즉 ‘진양분실’로 권 선생을 끌고 갔다.

진양분실에 도착한 권 선생에게 요원들은 그에게 시작부터 ‘사실과 다른 말을 하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과거 서울대에서 농법회 활동했던 권 선생은 보안사에서 관리대상 A급으로 분류됐기에 요원들은 조사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답을 말하지 못하는 권 선생에게 협박과 구타를 강하게 저질렀다.

수많은 협박과 고문을 당하던 권 선생에게 요원들은 그동안 접촉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전역 뒤 보고해야 할 사항을 지시했다. 그뿐만 아니라 또 다른 조사 대상자들에게 휴가를 빙자해 대학교에 방문해 운동권 선·후배 학생들을 만나 정보를 보고하고, 학생운동 조직 사건을 만들어내도록 교육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바로 ‘녹화사업’이란 이름의 공작이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만신창이가 된 권 선생은 15일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풀려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주변 인물·서신 내용 등 38건의 동향 보고가 담긴 84쪽 분량의 존안 자료가 만들어지고 난 이후였다.

제대 후 박형규 목사와 만나다

1983년 5월에서야 권 선생은 드디어 제대의 순간을 맞이했다. 제대 후 고향인 전주로 돌아왔지만, 84년 1월까지 보안사 예하 보안부대의 각종 감시와 조사를 받았다. 이후 1983년 9월 30일에 그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하 민청련) 창립회원이 되었고, 다음 해 9월에 사회부장을 역임하게 됐다.

권 선생은 민청련 활동하던 중 당시 총무였던 천영초 씨의 소개로 현재의 아내를 만났는데, 그녀의 외삼촌이 바로 박형규 서울제일교회 담임목사였다. 그 당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서울제일교회는 1984년 보안사의 교회파괴 공작으로 인해 서울중부경찰서 앞에서 노상 예배를 진행했는데, 이것이 권 선생에게 매우 큰 감동을 주었다.

1985년 10월 결혼식을 올린 권 선생은 신혼여행을 가던 길에 민청련 사태로 공안당국에 붙잡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옥초를 또 겪어야 했다. 이후 권 선생은 장모와 함께 살며 신앙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교인 전체가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했기에 서울제일교회는 권 선생을 환영했고 함께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각종 활동을 이어갔다.

민주화 정부 수립 이후 권 선생은 2005년부터 11년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기념관 건립추진단장을 역임했으며, 정년퇴직 때까지 민주화운동 구술 사료를 수집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이후 6월항쟁 계승사업회의 사무총장을 거쳐 현재 경기중부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에서 상임대표를 맡게 되었다.

아픔의 역사를 세상에 드러내다

지난해 11월 23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군사독재정권 시절 부당한 강제징집 및 프락치 강요를 당한 187명의 피해자들을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피해자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그 피해자들의 명단에 권 선생의 이름이 있었다.

진실화해위의 발표를 현장에서 들었던 권 선생은 지우고 싶었던 아픔의 역사를 세상에 드러냈던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징집 당시 논산훈련소에서 만났던 50여 명의 피해자들과 녹화사업으로 인해 의문의 죽임을 당한 6명을 위한 일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인터뷰를 마치며 권 선생은 고난을 받으며 독재정권에 싸워왔던 당시 젊은 그리스도인·시민들을 위해 지금이라도 진상규명·명예회복에 나선 NCCK인권센터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물질주의에 빠진 사회에서 억눌리고 가난하며 갇힌 자들 곁에 서신 하나님을 따르는 실천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임석규  rase21c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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