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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지옥과 천국은 없다하나님, 공포와 사랑의 이중주(신명기 5:9-10 로마서 8:38-39)
홍인식 목사(새길교회) | 승인 2023.08.12 01:19
▲ Gustave Dore, 「Illustration for Dante's Purgatorio」 ⓒWikipedia

신의 존재의 증명: 존재론적 증명

“신(神, 하나님)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무신론자이건 유신론자이건 우리 모두의 관심사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분들은 “신(神, 하나님)을 보여 달라. 그러면 내가 믿겠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 신(神,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의 믿음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과연 신(神, 하나님)은 존재합니까?

신학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1. 자연신학적 증명, 2. 우주론적 증명, 3. 존재론적(본체론적) 증명, 4. 목적론적 증명, 5. 도덕적 증명, 6. 미학적 증명, 7. 믿음의 유추, 8. 지적설계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에서는 고전적으로 안셀름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방법이 가장 유명한 이론입니다. 안셀름은 하나님을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어떤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그 본성상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이것이 안셀무스의 하나님 존재증명의 대략적인 생각입니다.

이것을 단순하게 도식화한다면, “전제1: 하느님은 가장 위대한 것이다. 전제2: 가장 위대한 것은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결론: 따라서 하느님은 존재한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주요 저서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1부 2문 3항에서 〈다섯 가지 신 존재 증명〉(quinquae viae, 다섯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운동을 통한 증명(via ex motu), 능동 원인을 통한 증명(via ex causa efficientis), 우연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을 통한 증명(via ex possibilii et necessario), 사물들이 드러내는 완전함의 등급에 의한 증명(via ex gradu rei)과 목적론적 증명 혹은 사물의 지배를 통한 증명(via ex fine sive ex gubernatione rerum)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시도들은 모두 신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신의 존재가 증명이 되었습니까? 우리는 위의 증명방법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이 이론들이 무슨 말을 하는 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또 다른 방법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해보고자 합니다. 인식론적 이해가 그것입니다.

인식론적 증명: 신의 형상, 민들어진 신(God Delusion)
인간 삶의 투사와 투영으로서의 하나님 형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신(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말할 때 늘 형상과 개념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상(image)과 개념은 인간들로 그러한 형태로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만듭니다.

형상들은 하나님 경험을 하게 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매개체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하나님) 형상은 각자가 살고 있는 시대와 문화 그리고 역사의 영향 하에서 형성됩니다. 또한 성경읽기, 교회의 가르침, 일상적 종교행위와 그리고 기독교 윤리를 통하여 우리 안에 형성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형성된 형상들은 미성년자 혹은 성년의 차이 없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하나님 체험의 형태를 결정 짖습니다.

특히 형상(image)에 의해서 경험되는 하나님 존재는 우리들의 신앙양태를 결정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image)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존재를 설명할 때 어떻게 설명하고 계십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성찰해 보아야 할 부분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내용입니다. 종교와 신앙에 있어서 신(하나님)이 존재 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는 핵심적 주제가 아닙니다. 신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종교와 신앙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신(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신의 존재 여부는 존재론적인 차원보다는 인식론(형상)적인 차원에서 경험되지 않습니까?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인식되고 경험됨으로서 우리는 신의 존재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되고 또 그렇게 인식되고 경험된 신의 존재가 우리의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종교와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신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어떤 신의 개념과 형상을 갖고 있느냐 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신의 내용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느냐 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모습을 결정지을 것입니다.

메시지 전환과 하나님

저는 금년부터 신학의 전환, 메시지 전환의 차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내용에 대하여 돌아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몇 번에 걸쳐 예수는 누구인가와 그리고 구원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모두 7번에 걸쳐 말씀나누기를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약 4번의 말씀나누기를 통하여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중심으로 메시지 전환을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이 작업은 무엇보다도 위에서 말한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 가에서부터 출발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서로 다른 형상 8가지를 서로 대조해 보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찰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형상을 가지고 있느냐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왜곡된 형상은 하나님의 억압적 형상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억압적 형상으로서의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발생하는 억압과 구속이었으며 자신이 받은 교육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잘못된 개념들은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내었고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스승들로부터 제자들에게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서 전래되어 왔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개념들은 종교와 문화라는 이름으로 완벽하게 고착화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초월적 차원이라는 설명과 그리고 종교적 신비의 이름으로 우상적이며 억압적인 하나님의 형상과 개념들이 우리 모두에게 전수되고 각인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된 문제는 개념과 감정과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체험과도 깊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손쉽게 하나님의 형상, 그 신비의 형상이 우리의 개념과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그리고 아무런 존중도 하지 않은 채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곤 합니다. 더 참혹한 것은 이 같은 하나님에 대한 주장과 해설들을 교회는 마치 결론 지어진 최종의 진리라고 간주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목회적 상황에서 오늘 교회와 신학의 과제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안에서 발견되는 우상적이고 억압적인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감지함과 동시에 그것을 전환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형상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되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참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 다시 말하면 제한적이고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언어로 인간과 소통하고 계시며 그것의 결과가 성경이라는 매우 단순하고 간단한 사실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최악의 문자주의, 교리주의와 같은 폐쇄적인 태도에 빠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제 4번에 걸쳐 우리 안에 있는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전환하는 여행을 떠나봅시다. 먼저 오늘은 하나님의 형상 개념에 있어서 가장 흔한 내용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제3의 눈

카트만두 서쪽 3km 지점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스와얌부나트사원은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사원으로 약 2000년 전에 건립되었습니다. 카트만두 중심과 가깝고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서 시내 전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사원 중앙의 커다란 탑(스투파)에는 두 개의 눈과 미간에 제3의 눈, 물음표처럼 생긴 코가 그려져 있는데 그 중 제3의 눈은 ‘우주의 눈’, ‘지혜의 눈’, ‘통찰의 눈’이라고도 불립니다. 항상 높은 곳에서 온 세상을 주시하고 있는 ‘통찰의 눈’은 세상만물의 이치를 꿰뚫어 보고, 사람들의 모든 생각과 번뇌를 내려다보고 있다고 합니다.

카트만두에서는 곳곳에서 ’지혜의 눈, 붓다의 눈’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품고 내려다보고 살피는 부처님의 눈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저는 좀 무서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마치 사찰 받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결코 부처님 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은 한편으로, 보호받는 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공포심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인간, 의미를 추구하는 연약하고 불안정한 존재

어쩌면 인간이 신(하나님)에 대한 첫 경험은 공포의 경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물론 다른 의견도 강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신은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입니다. 공포의 체험은 인간 존재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은 연약하며 쉽게 상처받고 상처를 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도피적이며 공포에 젖어있고 따라서 어떠한 종류의 보호를 추구하며 삽니다. 또한 우리는 불안정한 존재이며 생애의 주변은 온통 불확실성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그러기에 무엇인가 안정적이고 확실한 것을 의지하고자 합니다.

연약함과 불확실성은 인간존재를 형성하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이고 따라서 두려움에 싸여 살아갑니다. 공포에 매여 있는 인간의 연약함은 우리로 권력과 힘에 대하여 의존적인 삶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삶의 불확실성은 우리로 이에 대한 방어와 확실함을 추구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를 보호해주고 방어해주며 확신을 줄 수 있는 권력과 힘을 지향합니다.

공포목회

이 시점에서 종교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종교는 여러 종류의 신화를 통하여 우주적 공포와 고통을 우주적 신뢰와 확실성으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합니다. 종교는 자연과 우주가 주는 공포와 위협을 이름과 얼굴을 가진 ‘신’이라는 ‘다른 존재’로 대치함으로서 조금 더 가깝고 접근 가능한 존재로 변화 시킵니다. ‘절대적인 신’을 제시합니다.

이렇게 해서 종교는 공포를 조절하고 통제합니다. 종교는 자신들이 신의 분노를 잠재우고 오히려 신의 축복과 신성한 은총들을 요구할 수 있는 중재자가 될 수 있는 능력과 방법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종교는 신자들에게 용납되고 받아들여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 수용에 있어서 공포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또한 자신의 확장을 위해서 종교는 공포 요소를 활용합니다. 교회는 죄를 예방하고 회개의 부름을 위하여 ‘공포의 신’이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러한 의미의 공포의 사용은 종교로 하여금 점차 예방, 죄에 대한 경고, 위협, 주의사항, 인간의 실수와 잘못에 대한 견책을 강조하였으며 또한 인간의 잘못 혹은 죄가 인간존재에게 가져오는 참혹한 결과에 집중하게 만들었습니다.

설교자들은 믿는 이들의 구원에 대한 강론보다는 정죄의 위험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가톨릭의 교회의 경우에, 기도는 온갖 종류의 간청 특히 죽은 사람들이 게헤나, 징벌의 장소인 지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요청하는 간청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지옥에 대한 상상력은 인간의 본능적 공포를 자극하여 공포의 교리들이 조직적으로 형성되어지도록 하였습니다.

중세부터 모든 강론과 형상들은 사람들의 공포심을 증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졌습니다. 또한 인간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인 죽음과 연결하여 심판과 지옥 혹은 (가톨릭의 경우) 연옥의 강조를 통하여 두려움을 발생케 함으로서 공포감으로 가득 차도록 만들었습니다. 일명 공포목회라는 것입니다.

물론 공포목회, 공포의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이 일면으로 효과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교회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만드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위협의 지나친 남용은 결국에는 그 효율성을 약회시키고 맙니다. 청중들은 더 이상 공포의 설교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으며 감동도 받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관습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물론 지나친 사용은 자제 되었지만 공포의 교리는 우리의 시대에서도 여전히 교리교육이나 설교 등을 통하여 그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지금도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용이한 것은 공포목회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전도할 때도 공포목회 다시 말하면 공포의 하나님을 선전하는 것이 주를 이룹니다.

경찰-신(police-God)

이러한 공포의 목회는 우리에게 신의 형상은 단 하나의 작은 죄도 놓치지 않고 징벌하는 엄격한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을 남겼습니다. 엄격하고 철저한 수사를 실행하는 엄격한 수사관으로서의 신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우리의 범죄를 낱낱이 기록하고 있으며 심판의 날에 마치 계산서를 내놓듯이 우리 앞에 죄 값을 치룰 것을 요구하는 신으로 남겨진다. 이 신은 경찰-신(police-God)의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첫 번째 신(하나님)의 형상은 이처럼 공포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형상은 가장 강력하게 우리의 신앙의 양태를 결정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 하나님은 이런 공포의 신입니까?

저주와 복 사이에서

그렇다면 성서는 어떤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요? 많은 경우 특히 구약은 하나님을 저주와 복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신명기 28장의 기록은 하나님을 복(28:1-13)과 저주(28:14-68, 29장)의 이중주로서 소개합니다. 신명기 28장을 읽다 보면 몸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이렇듯 저주와 복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정말 우리의 하나님은 복과 저주라는 무서운 무기를 가지고 우리를 윽박지르면서 자신을 따르면 복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저주를 하겠다고 하면서 선택을 강요하는 분이실까요?

오늘 본문은 구약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십계명의 일부로서 주어진 구절입니다. (이집트탈출기 20장/신명기 5장) 이스라엘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 기독교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십계명 중의 일부입니다.

그렇다면 복과 저주의 이중주를 연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신(하나님)을 십계명에서는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9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죗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10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이 기록은 당시에 알려져 있던 일반적인 신의 개념을 뒤집어 놓은 혁명적인 구절이 아닐까요? 지금까지의 신의 형상을 완전하게 전환시켜 놓습니다. 신명기 28-29 장에서 소개하는 신(하나님)을 넘어서게 합니다.

당시 사람들이(오늘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에 대하여 갖고 있던 형상은 무엇보다도 저주의 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공포의 존재입니다. 신을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축복과 사랑의 신으로 이해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구절은 이러한 형상과 개념을 뒤집어 놓습니다. 쉽게 말하지만 신은 화를 내고 저주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주 조금이며(본인과 삼사 대 자손에게 저주) 오히려 신은 인간을(본인과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도와주고 복 주고 사랑해주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기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삼사 대 자손에게까지”이라는 표현과 “수천 대 자손에게까지”라는 표현의 놀라운 대조를 봅니다. 인간을 향한 신(하나님)의 행위는 저주가 아니라 복 주심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전환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형상은 공포에서 사랑으로를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는 그 어떤 다른 것도 끼어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조건부사랑이 아닙니다. 그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늘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하나님도 약점이 있습니다.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약점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점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이 경험한 하나님은 오직 “사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일반적으로 유대 율법을 거부하고 예수의 은혜만을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가 율법을 폐기하고자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율법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까요? 바울이 거부한 것은 율법 자체라기보다는 율법이 가르쳐주고 있는 공포의 하나님 아니었을까요? 늘 저주와 복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강요하고 압박하는 무서운 하나님에서 모든 것을 뛰어넘는 사랑의 하나님으로의 전환이 아니었을까요?

그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 위에서 부활의 예수를 체험한 이후 깨달은 것은 사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공포에서 사랑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바울이 부활의 예수님을 통하여 경험한 하나님은 복과 저주, 사랑과 미움의 이중주(二重奏)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복 혹은 사랑만을 연주하는 독주(獨奏)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점은 복과 저주, 공포와 따뜻함, 사랑과 미움의 이중주(二重奏)를 연주할 수 없으시고 오직 복, 따뜻함과 사랑의 독주(獨奏)만 가능함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 그것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완벽한 존재로서의 하나님,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복과 저주를 우리 앞에 두고 선택하라고 압박하는 이중주(二重奏) 하나님의 존재를 사람들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도무지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의 독주가(獨奏家)하나님을 본 받아 하나님의 사람들이 연주하는 사랑의 독주(獨奏)입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사랑의 독주가(獨奏家)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 성향, 사는 모습, 성적 지향서, 가난과 부, 그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사랑의 독주자이시며 사랑의 챔피온이십니다. 우리에게 지금도 끈질기게 남아 있는 공포의 하나님의 형상을 떨구어 내야 합니다. 저주의 하나님의 형상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진정한 하나님의 존재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독주자,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러한 하나님을 믿는 교회와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그 어떤 이유로도 결코 사람을 차별하고나 소외 혹은 배제시킬 수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인간을 차별하지 않고 오직 품에 안으시면서 사랑해 주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여전히 이러저런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고 정죄하고 죄인과 의인으로 구별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저주와 복, 사랑과 미음, 구원과 심판과 공포의 이중주의 하나님의 형상을 지우고 사랑의 독주가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 외에 다른 것은 하나님 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오직 사랑의 전능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사랑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행위이다. 사랑함은 신(하나님)자체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행위자체이다. 하나님은 사랑 외에는 아는 것이 없으며 그것만이 그의 일이다. 그는 사랑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중주의 하나님의 전능이 아니라 독주가 하나님의 전능을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낼 것이 없고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고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성 부에나벤투라(Saint Buenaventura)는 “신(하나님)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최대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최선의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에 대하여 확장 혹은 과장되게 생각되는 것을 두려워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의 사랑의 위대함은 결코 한계 지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공포의 형상을 극복하는 일은 기독교 신앙의 매우 중요한 과제이며 또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왜곡하거나 숨기는 모든 형상들은 하나님에 대한 우상적 변형임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에 대한 우상적이고 해악한 형상과 개념들을 전환시켜야 합니다.

 사랑, 사랑의 독주(獨奏)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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